여리고 성의 싸움  (수6:1-7)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 무려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했다. 드디어 가나안의 문턱에 다다랐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들어가자면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통과해야만 되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 여리고성을 통과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하여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 없더라"라고 했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가능의 성 이었다. 이와같이 천성을 향하여 가는 성도들에게도 앞길을 막는 닫혀진 문이 있다. 불가능한 여리고 성이 있다. 그러면 이 문을 어떻게 통과할까? 이것은 오늘을 사는 성도들에게 삶의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본문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성도 여러분!. 믿음의 생활이 어려운가? 쉬운가? 대체로 "어렵습니다"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국제 C.C.C를 창설한 미국의 빌 브라이트 박사는 "믿음 생활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고 불가능하다"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믿음 생활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진정한 믿음 생활은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 안에서만, 하나님에 의해서만, 하나님을 통해서만 할 수 있다.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도 많은 어려움에 부딪힐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할꼬? 갈등을 한다. 인생이 무엇인가? 하나의 싸움, 전쟁이다. 영국의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그는 성도의 싸움을 "거룩한 싸움"이라고 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싸워주시고 또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기 때문이다. 본문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라고 했다. 여리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이다. 전략도 하나님께서 짜시고, 친히 싸우시고, 여리고 성을 여호수아에게 맡기셨다. 여리고 왕도, 용사들도 여호수아에게 맡기셨다. 그러니까 이미 이겨놓은 전쟁이요, 여리고 싸움에서의 성공은 벌써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여리고 싸움에서 우리의 역할이 있다. 삶 속의 전쟁에서 성도가 지녀야 될 자세가 있다. 다시 말하면 닫혀진 문 앞에서 마땅히 취하여야 할 삶의 초점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한다. "모든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 생각하면 사람마다 삶의 본능적인 초점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를 삶의 초점에다 두고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서나 "나 나 나"하면서 살아 간다. 정치를 하면서도 나를 위해서라고 말한다. 나 때문에 라고 고집을 부린다. 사업을 하면서 내가 부자 되어야지, 그리고 나는 나의 장래를 위해서 사업을 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이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 이것은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이 당부하는 말씀이다. 케이블 T.V를 시청할 때 가령 채널 32에 맞추면 나무아비 타불 관샘보살을 듣게 되고, 채널을 42에다가 맞추면 할렐루야 찬양을 듣고 생명의 말씀을 듣게 된다. 상황이 달라진다.
여리고 싸움에서 성공하기를 원하는가? 삶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 이 교훈을 주시기 위해서 본문은 두 가지의 도구를 동원하고 있다. 하나는 법궤요, 또 하나는 나팔이다. 먼저 법궤을 생각해 보자.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다. 본문7절에 보면 "여호와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했고, 8절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 진행하며"라고 했다. 즉, 법궤 앞에서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임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항상 성도의 삶은 하나님이 초점 되도록 하는 삶이다. 그래서 우리의 찬송은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한다.
다음 나팔의 역할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 소리가 울릴 때 하나님의 행동 계시로 여겼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팔소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겼다. 나팔소리가 나면 그들은 이제 행동을 개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 나팔은 명령의 도구이다. 나팔이 울리는 명에 따라 살아야 한다.
여기 법궤와 나팔의 초점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성도의 삶의 초점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의 삶의 바탕이요, 목적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누구인가? 여리고 작전에 출전한 십자가 군병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진군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곤란하다. 여리고 성을 날마다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진군이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아야 한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양각나팔을 불어야 한다. 전쟁은 전쟁인데 너무 이상한 전쟁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동참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본문은 전쟁하는 방법 세 가지를 생각해 보자.

첫째 침묵하라.
10절을 보면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고 했다. 여리고 싸움은 어떤 작전이라는 것인가? 눈은 법궤에만 고정시켜 두고, 귀는 나팔소리를 향하여 열어두고, 입은 꼭 다물고 침묵하는 작전이다. 왜 침묵하라고 했는가? 만일 그대로 두었더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돌면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러한 전쟁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무슨 산책하러 왔다는 말인가. 이 모양으로 백 번 여리고 성을 돈다고 이 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말인가 온갖 부정적인 말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교회의 일은 이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잡음이 생겨나지 않기를 위해서 입을 다무는 훈련이 필요하다. 원망을 해서도 안되고, 불평을 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의 나팔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오직 하나님의 법궤만 바라보면서 진군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경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 훈련이다. 왜냐하면 침묵을 배우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시끄럽게 할 때 하나님께서는 입을 다무신다. 내가 침묵할 때 비로소 하나님은 입을 열어 말씀하신다. 내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이웃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다. 내가 지껄이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여유를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다. 고전14:28에서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솔로몬도 전도서5:2에서 말한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고 했다. 다윗도 시141:3에서 말한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했다. 교회를 섬기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매우 은혜스런 말씀이다.

둘째 순종하라.
본문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런데 백성들이 한 번 돌았다. 그러나 성이 무너지기를 아니한다. 이틀째에도 돌았으나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육일간을 매일 한 번씩 돌고 마지막 날은 일곱 번을 합하면 열 세 번을 돌았는데 그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다시 말하면 끝까지 순종해야 기적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본문을 묵상하던 한 성경학자는 "한 번의 순종이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온전한 순종은 반듯이 상황을 바꾼다"고 했다. 그렇다. 엘리야의 경우를 보면 한 번 기도했을 때 아무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일곱 번을 기다리며 기도했을 때 손바닥만한 구름이 생겨나고 그것이 소낙비를 내리게 되었다. 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여러 번 돌라고 했을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온전한 순종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시37:7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했다. 우리는 기다리지 못하고 불평을 먼저 토설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좀더 기다린가를 보시려고 우리를 주목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도 우리를 위하여 기다리신다. 집을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를 생각해 보자. 아직도 상거가 먼데 저 멀리 바라다보면서 오늘이나 돌아올까를 생각하며 기다렸다.

셋째 신뢰하라.
20절에 "이에 백성이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고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밀가루 떡이 깨지듯이 모래성이 와르르 무너지듯이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함성을 지를 때에 무너졌다. 그러나 여리고의 그 견고한 금성 철벽이 사람의 함성 소리 때문에 무너졌는가? 함성을 지른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 함성은 "하나님이여 명하신 대로 행하였나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실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이제 무너지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라는 함성이다. 그러므로 여기 함성은 믿음의 함성이요, 믿음의 기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함성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히11:30에서 "믿음으로 칠일 동안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라고 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것은 바로 믿음이다. 여리고 싸움이 무엇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믿음 작전이다. 우리의 싸움은 처음부터 믿음이 요청되는 전투이다. "성 주위를 한 번씩 돌 때에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믿음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돌지 아니했을 것이다. 또 돌지 아니했다면 여리고 성은 무너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돌을 던지라, 망치로 때려 부수라" 하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씩 성을 돌라 그리하면 성이 무너지리라"고 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싸움인가?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 그리고 믿음으로 돌고, 믿음으로 나팔을 불고, 믿음으로 잠잠하고, 믿음으로 때가 되매 함성을 질렀다. 결국 여리고 성은 믿음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그러면 믿음생활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완성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믿음으로 진군하는 삶이다.
삶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리고 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리고 싸움에서의 승리는 무엇인가? 미사일인가? 스텔스 전투기인가? 아파치 헬기인가? 아니다. 여리고 성을 돌기만 했다. 그런데 돈다고 그 철벽이 무너질 수 있는가? 백 번을 돌아도 도는 그 것은 성이 무너지는 데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러나 열세 번을 돌았을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다. 그냥 돈 것 아니다. 그들이 돌 때 믿음으로 돌았다. 무의미하게 보인 것 같으나 믿음으로 행하면 기적이 나타난다. 우리의 삶 속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원하는가? 또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런데 기적은 사람의 꾀로 만들 수 없다. 욕심과 지혜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기적은 믿음이 만든다. 축복도 믿음이 만든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경의 원리는 똑 같은 것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순종하면 축복이다. 그러나 불신앙으로 불순종하면 저주이며 실패다. 그런데 믿음 생활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사는 생활이다. 믿음 생활에서 믿음을 빼 버리면 의미없는 생활이다. 처음도 믿음, 나중도 믿음, 믿음 이것이 성도들 생활의 알파요 오메가이다. 귀신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마9:23에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다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책망을 들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성을 돌았고, 잠잠했고, 궤를 앞장 세웠고, 나팔을 불었고, 함성을 질렀다.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이요. 유치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누가 보고 있었는가? 수3:10을 보니까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살아 계신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하는 삶을 보신다. 우리의 삶의 초점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를 보신다. 삶의 중심에 믿음이 있느냐, 욕심이 있느냐를 보신다. 또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 침묵하라, 순종하라, 신뢰하라 이 세 가지를 삶 속에서 실천하면서 우리 눈앞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을, 몸에있는 질병의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를, 내 갈길을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 승리의 역사가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종갑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