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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요요현상을 극복합시다 (마25:1-13)
이웃교회의 여자 집사님이 체중이 계속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절제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찾았습니다.
잠 못 이루며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다이어트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냉장고 안에 아주 날씬한 Small-s 라인의 몸매를 가진 여자배우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그 날씬한 여인을 보며 말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날씬해져야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냉장고문을 다시 닫고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5㎏이나 체중이 줄었습니다.
너무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달 동안에 남편의 체중이 5㎏나 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편은 냉장고 안에 붙어있는 S라인 여인의 몸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주워먹다 보니 남편이 비만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인기 순위에 올라 있는 단어가 ‘다이어트’입니다.
황신혜 다이어트, 건강 다이어트, 덴마크 다이어트, 포도 다이어트....등
살 빼는 것이 거의 전쟁수준입니다.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이제는 오히려 영양이 부족하고, 심지어 죽기도합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살을 빼려고 합니다.
4-50년 전만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난리였는데 이제는 너무 먹고 살을 빼느라고 야단입니다.
다이어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요요yoyo현상>이 있습니다.
줄어든 체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살을 빼려면 적당한 운동이나 음식의 섭취조절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빼야합니다.
그런데 무리한 운동이나 특정한 음식, 약을 통해 다이어트를 했을 때 처음에는 금방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이런 요요현상이 발생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집니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주님이 주시는 위로 속에서 눈물 흘리던 은혜와 감사가 점점 약해집니다.
열정을 가지고 충성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게을러지고,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점점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내 몸의 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에 쌓여가는 비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내 마음에 세상적인 콜레스트롤이 쌓여서 영적인 생명력이 약해집니다.
자꾸만 옛 사람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적요요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내 영혼의 비만, 내 영적생활의 요요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천국은~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원래 미래적 의미로서 ‘천국은 ~와 같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종말의 때가 되면 이루어질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보는 천국은 언제 이루어지고, 천국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을 오늘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랑과 신부는 등장하지 않고 들러리인 열 처녀에 관한 비유입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신랑과 신부가 먼저 정혼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먼저 정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정혼을 한 뒤에 신랑은 아버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할 집을 짓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신랑이 데리러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전적으로 신랑의 아버지가 결정을 합니다.
아들이 신부를 맞을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판단되면 결혼식 날을 정하고, 그날 밤에 신랑은 신부의 집에 갑자기 갑니다.
먼저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 도착해 큰 소리로 신랑이 온 것을 알립니다.
그러면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은 떠날 준비를 하고 신랑을 맞이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 본문에 신부의 친구인 열 처녀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등을 준비하고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깜짝 놀라서 잠자던 처녀들이 일어납니다.
신랑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는 사이에 기름이 다 타버리고 불이 꺼져갑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눠 쓰기에는 서로 부족할테니 빨리 가서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기름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만 잔치자리에 들어갑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이미 잔치집의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을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냉정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여기서 예수님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비유의 초점은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재림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잔치자리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결혼식 잔치를 기다리며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잔치자리까지 갈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등불은 신앙생활의 태도나 모습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들의 외적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 날이 되면 예배에 참석을 합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가끔 구역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은혜도 받습니다.
때로는 예배를 통하여 가슴이 찔리기도 하고, 감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더 열심히 예수님을 믿어야지’ 결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안이나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좀 괜찮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 밭이 길가나 돌밭과 같아서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어렵고 힘이 들면 뒷걸음질 칩니다.
세상의 취미생활이나 운동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일 축구시합이 예배 시간에 열리면 갈등을 하다가 TV를 선택합니다.
친구와 주일날 골프약속을 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면서 골프장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을 묵상합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그린필드와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길보다는 세상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입니다.
교회 중심이 아니라 세상 중심입니다.
예배 중심이 아니라 취미나 운동중심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겉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있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기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외적인 신앙생활의 조건을 다 구비하고 있어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백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라 할지라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깃털하나 들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전원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시기도 하고, 상담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려울 때는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세상의 소욕을 좇지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기름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시편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기서 등과 빛이 나오는데 주의 말씀이 바로 기름이라고 합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기름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며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성령님과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천국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
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임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입니다.(벧전1:9)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질병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이 있습니다.
어린양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잔치자리입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의 삶을 위해서는 부단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실지 알 수 없기에 오늘 하루하루를 내 인생의 종말인 것처럼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련한 다섯처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신호등으로 말하면 주황색등입니다.
빨간색 정지 신호 전에 준비하라고 주황색 등이 깜박거립니다.
이 주황색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면 대형사고가 납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을 때에도 그분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헤롯 대왕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힘을 보장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주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도 그런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잔치자리에 못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모른다’는 준엄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그의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만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입술로만 ‘주여 믿습니다’ 라는 것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성경에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회적인 고백이나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고백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역할을 하고,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겉으로 들어나는 외적인 모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형식적인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망거리가 되고, 천국 백성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해 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앞섭니다.
사도바울이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멸망 받을까 두려워했던 것처럼 거룩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같은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첫째로, 마음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지만 생각이 너무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가시나무 새’ 라는 노래의 제목처럼 내 속에 너무나 많은 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상처받은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열등감, 낮은 자존감, 시기와 질투, 미움의 감정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쓴 뿌리들이 찌를 때마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또한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교묘하게 다른 사람을 찌르기도 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욕심들이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세상의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욕심의 콜레스트롤 수치가 너무 높아서 주님이 동거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영적인 비만도가 너무 높아서 주님과 동행하기가 거북합니다.
따라서 내 마음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다이어트도 중요하지만 내 영혼의 다이어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다이어트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마음 속의 찌꺼기들을 눈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냄새나는 것들을 비워내고 그 안에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쓰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쓸줄 아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날마다 채워갈 때 우리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듯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예수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다이어트, 영혼의 다이어트입니다.
둘째로, 삶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게으름의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합니다.
가족보다 일이 더 좋아서 일 중심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도 고쳐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나쁜 습관이나 버릇들이 있다면 그것도 고쳐야합니다.
아직 술이나 담배가 해결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까?
이 시간 싹 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은 계속해서 버려야 합니다.
잘라내야 합니다.
농부가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듯이 불필요한 것들, 좋지 못한 것들은 끊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화의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습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십니다.
여전히 내 방법으로 내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면 주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방법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능력으로 버티는 사람에게는 힘 빠질 때 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빨리 내려놓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내 삶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제거 될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일시적인 은혜체험만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결혼식이 결혼생활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인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의 다이어트와 삶의 다이어트를 해야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순종이나 충성이 아니라 몸에 밴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약물을 통해서 하는 다이어트는 처음에는 살이 빠집니다.
그러나 멈추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은 살이 찌는 요요현상이 벌어집니다.
살을 뺀 상태를 유지하려면 완전히 생활습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요요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시 살이 찌면 이전보다 더욱 살을 빼기가 힘이 듭니다.
신앙생활의 거룩한 삶의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단기간 동안의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에 안심하거나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일생동안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습관, 기도의 습관, 말씀의 습관, 섬김의 습관, 전도의 습관.. 이런 것들이 일상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합니다.
처음 입은 옷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깨어있는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입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 요요현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다이어트와 삶의 다이어트를 통해 거룩한 습관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잘했다 칭찬받고, 천국 잔치 자리에 모두 참여하여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양인순 목사 설교 중에서
이웃교회의 여자 집사님이 체중이 계속 불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음식을 절제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냉장고 문을 열고 먹을 찾았습니다.
잠 못 이루며 고민을 하다가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가 막힌 다이어트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냉장고 안에 아주 날씬한 Small-s 라인의 몸매를 가진 여자배우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음식을 먹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그 날씬한 여인을 보며 말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날씬해져야지..."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하고 냉장고문을 다시 닫고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 결과 한 달 만에 5㎏이나 체중이 줄었습니다.
너무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달 동안에 남편의 체중이 5㎏나 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편은 냉장고 안에 붙어있는 S라인 여인의 몸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시로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주워먹다 보니 남편이 비만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인터넷 검색창에서 인기 순위에 올라 있는 단어가 ‘다이어트’입니다.
황신혜 다이어트, 건강 다이어트, 덴마크 다이어트, 포도 다이어트....등
살 빼는 것이 거의 전쟁수준입니다.
다이어트 부작용으로 이제는 오히려 영양이 부족하고, 심지어 죽기도합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살을 빼려고 합니다.
4-50년 전만해도 보릿고개가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난리였는데 이제는 너무 먹고 살을 빼느라고 야단입니다.
다이어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요요yoyo현상>이 있습니다.
줄어든 체중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현상입니다.
살을 빼려면 적당한 운동이나 음식의 섭취조절을 통해서 점차적으로 빼야합니다.
그런데 무리한 운동이나 특정한 음식, 약을 통해 다이어트를 했을 때 처음에는 금방 효과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곧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도 이런 요요현상이 발생합니다.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과 감격이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집니다.
어렵고 힘들었을 때 주님이 주시는 위로 속에서 눈물 흘리던 은혜와 감사가 점점 약해집니다.
열정을 가지고 충성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게을러지고,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갑니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점점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내 몸의 비만이 문제가 아니라 내 영혼에 쌓여가는 비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내 마음에 세상적인 콜레스트롤이 쌓여서 영적인 생명력이 약해집니다.
자꾸만 옛 사람의 본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영적요요현상이 일어납니다.
이런 내 영혼의 비만, 내 영적생활의 요요현상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은 ‘천국은~같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원래 미래적 의미로서 ‘천국은 ~와 같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앞으로 다가올 종말의 때가 되면 이루어질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천국에 들어가 주님과 더불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보는 천국은 언제 이루어지고, 천국은 어떤 모습인가?
그리고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을 오늘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말씀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신랑과 신부는 등장하지 않고 들러리인 열 처녀에 관한 비유입니다.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우리와는 좀 다릅니다.
신랑과 신부가 먼저 정혼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먼저 정혼을 하지 않았습니까?
정혼을 한 뒤에 신랑은 아버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할 집을 짓습니다.
그동안 신부는 신랑이 데리러 올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문제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전적으로 신랑의 아버지가 결정을 합니다.
아들이 신부를 맞을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판단되면 결혼식 날을 정하고, 그날 밤에 신랑은 신부의 집에 갑자기 갑니다.
먼저 신랑의 친구들이 신부의 집에 도착해 큰 소리로 신랑이 온 것을 알립니다.
그러면 신부와 신부의 친구들은 떠날 준비를 하고 신랑을 맞이합니다.
이런 배경 속에 본문에 신부의 친구인 열 처녀가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등을 준비하고 결혼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기다리다 지쳐서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깜짝 놀라서 잠자던 처녀들이 일어납니다.
신랑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다섯 처녀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조는 사이에 기름이 다 타버리고 불이 꺼져갑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다섯 처녀에게 기름을 좀 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나눠 쓰기에는 서로 부족할테니 빨리 가서 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습니다.
기름을 준비했던 지혜로운 다섯 처녀만 잔치자리에 들어갑니다.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다섯 처녀는 이미 잔치집의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합니다.
문을 열어달라고 사정을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냉정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12절)
여기서 예수님은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를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비유의 초점은 미련한 다섯 처녀입니다.
여기서 신랑은 재림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잔치자리는 천국을 의미합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열 처녀는 주님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결혼식 잔치를 기다리며 등불을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잔치자리까지 갈 수 있는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등불은 신앙생활의 태도나 모습을 비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도들의 외적인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일 날이 되면 예배에 참석을 합니다.
세례도 받았습니다.
가끔 구역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은혜도 받습니다.
때로는 예배를 통하여 가슴이 찔리기도 하고, 감격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이러지 말아야지. 더 열심히 예수님을 믿어야지’ 결단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가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 안이나 믿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좀 괜찮습니다.
그런데 직장이나 친구들을 만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 밭이 길가나 돌밭과 같아서 말씀이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조금만 어렵고 힘이 들면 뒷걸음질 칩니다.
세상의 취미생활이나 운동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일 축구시합이 예배 시간에 열리면 갈등을 하다가 TV를 선택합니다.
친구와 주일날 골프약속을 하고 마음의 가책을 느끼면서 골프장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시편 23편을 묵상합니다.
“골프는 나의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그린필드와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신앙의 길보다는 세상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입니다.
교회 중심이 아니라 세상 중심입니다.
예배 중심이 아니라 취미나 운동중심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무엇입니까?
겉으로 갖추어야 할 것은 다 있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기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기름은 무엇을 가리킬까요?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외적인 신앙생활의 조건을 다 구비하고 있어도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능력이 없습니다.
아무리 수백톤을 들어 올리는 기중기라 할지라도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면 깃털하나 들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바로 전원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위로해주시기도 하고, 상담해 주시기도 합니다.
어려울 때는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셔서 우리의 삶을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세상의 소욕을 좇지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기름을 ‘말씀’이라고 합니다.
시편 119: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여기서 등과 빛이 나오는데 주의 말씀이 바로 기름이라고 합니다.
결국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며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기름은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며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성령님과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삶임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천국잔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
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을 수 있는 헌신된 그리스도인임을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입니다.(벧전1:9)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그곳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눈물도 없습니다. 질병도 없습니다.
그곳에는 영원한 기쁨과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면류관이 있습니다.
어린양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영원토록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잔치자리입니다.
이 아름다운 천국의 삶을 위해서는 부단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언제 우리를 부르실지 알 수 없기에 오늘 하루하루를 내 인생의 종말인 것처럼 준비된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미련한 다섯처녀의 모습은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경고 메시지입니다.
신호등으로 말하면 주황색등입니다.
빨간색 정지 신호 전에 준비하라고 주황색 등이 깜박거립니다.
이 주황색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면 대형사고가 납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오셨을 때에도 그분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당시의 헤롯 대왕이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핍박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힘을 보장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주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실 때도 그런 현상이 벌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자기 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잔치자리에 못들어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모른다’는 준엄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무는 그의 열매로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만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결코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찍어서 불에 던진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입술로만 ‘주여 믿습니다’ 라는 것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다는 것이죠.
물론 성경에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순히 일회적인 고백이나 선언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고백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지자 역할을 하고,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했을지라도 마음의 중심이 중요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겉으로 들어나는 외적인 모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내면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같은 형식적인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책망거리가 되고, 천국 백성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해 봅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앞섭니다.
사도바울이 남은 구원하고 자기는 멸망 받을까 두려워했던 것처럼 거룩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람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미련한 다섯 처녀같은 자리에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첫째로, 마음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마음 중심에 모시고 있지만 생각이 너무 복잡할 때가 많습니다.
‘가시나무 새’ 라는 노래의 제목처럼 내 속에 너무나 많은 내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상처받은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열등감, 낮은 자존감, 시기와 질투, 미움의 감정들이 있습니다.
내면의 쓴 뿌리들이 찌를 때마다 괴로워하고 힘들어합니다.
또한 이것을 감추기 위해서 교묘하게 다른 사람을 찌르기도 합니다.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욕심들이 아직도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많은 세상의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욕심의 콜레스트롤 수치가 너무 높아서 주님이 동거하시기가 어렵습니다.
영적인 비만도가 너무 높아서 주님과 동행하기가 거북합니다.
따라서 내 마음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다이어트도 중요하지만 내 영혼의 다이어트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내 마음의 다이어트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마음 속의 찌꺼기들을 눈물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냄새나는 것들을 비워내고 그 안에 예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은 통제된 힘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만의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 쓰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쓸줄 아는 능력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날마다 채워갈 때 우리는 사랑과 평화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예수의 향기가 흘러나옵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 비린내가 나고, 향을 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듯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예수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다이어트, 영혼의 다이어트입니다.
둘째로, 삶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잘못된 습관들을 고치는 작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하는 게으름의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합니다.
가족보다 일이 더 좋아서 일 중심으로 살고 있다면 그것도 고쳐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나쁜 습관이나 버릇들이 있다면 그것도 고쳐야합니다.
아직 술이나 담배가 해결되지 않은 분들도 있습니까?
이 시간 싹 끊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들은 계속해서 버려야 합니다.
잘라내야 합니다.
농부가 과감하게 가지치기를 하듯이 불필요한 것들, 좋지 못한 것들은 끊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성화의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룩한 습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훈련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노력하는 자에게 도움을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손을 내밀어 잡아 주십니다.
여전히 내 방법으로 내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치면 주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방법은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능력으로 버티는 사람에게는 힘 빠질 때 까지 주님은 기다리십니다.
빨리 내려놓는 것이 지혜로운 모습입니다.
내 삶의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이 제거 될 때 우리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일시적인 은혜체험만으로 부족합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한 것은 신앙생활의 출발점입니다.
결혼식이 결혼생활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인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회 다닌다고 해서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예수님을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의 다이어트와 삶의 다이어트를 해야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된 삶의 모습이 나타나야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인 순종이나 충성이 아니라 몸에 밴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다이어트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일시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약물을 통해서 하는 다이어트는 처음에는 살이 빠집니다.
그러나 멈추게 되면 오히려 더 많은 살이 찌는 요요현상이 벌어집니다.
살을 뺀 상태를 유지하려면 완전히 생활습관이 바뀌어야 합니다.
습관이 바뀌지 않으면 달라진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요요현상이 나타납니다.
다시 살이 찌면 이전보다 더욱 살을 빼기가 힘이 듭니다.
신앙생활의 거룩한 삶의 습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단기간 동안의 마음의 변화, 행동의 변화에 안심하거나 안주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일생동안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습관, 기도의 습관, 말씀의 습관, 섬김의 습관, 전도의 습관.. 이런 것들이 일상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합니다.
처음 입은 옷처럼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항상 깨어있는 천국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모습입니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여러분의 신앙생활 속에 요요현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다이어트와 삶의 다이어트를 통해 거룩한 습관이 여러분의 삶을 지배하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주님 다시 오실 그날 잘했다 칭찬받고, 천국 잔치 자리에 모두 참여하여 영생복락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양인순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