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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사 소 통 (눅 10:38-42)
마가복음 7장 31-37절에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를 못하고 아무리 상대방이 말을 해도 자신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에바다”(열리라)를 외치면서 그의 맺힌 것이 풀려지게 하셨고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그 귀먹고 어눌한 환자의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저주의 사슬에서 풀려 축복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도 영적 상태가 마치 귀먹고 어눌한 사람처럼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알아듣지를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답답함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같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잘 될 수 있으며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이 잘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아닌 상호 교체되면서 진행되는 삶의 요소입니다.
요즈음 통신문화가 발달되어 너나없이 휴대용 전화기를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무선으로 통화수단이 되는 전화기이고 보면 종종 상대방의 말소리는 들리는데 내 말이 상대방에게 전혀 들려지지 않거나 반대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말할 것 없이 그럴 때는 짜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린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전화기를 그고 다시 걸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의사소통도 그렇습니다.
의사소통이란 일방적인 아닌 상호 교체적으로 진행되면서 서로의 듯이 전달되어 교감하는 것으로 어느 한족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생활, 특히 영적 신앙생활에서는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또한 의사소통이 원만하지 못해서 그 삶 자체가 무질서하게 되어 고통을 경험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한국 가정 법률소 95년도 상담 통계가 발표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이혼 사건이 47.3% 였습니다. 이혼 상담 다음으로 부부관계 상담이 26.4%를 차지했고 그 가운데서도 30대가 43.2%로 30대가 결혼의 위기 상황을 드러냈습니다. 이와 같은 원인의 공통점이 부부간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음으로 인한 폭행, 외도, 가출 등으로 인한 가정 파탄이 주종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의사소통은 더욱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듯은 상관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광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아니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자기 도취에 빠진 경우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이해하고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상호 유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해 버리는 일이 허다하여 스스로 무너지는 삶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기 중심에서 너희들은 내 말만 들어라 하는 것은 일방적인 통화이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말만 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다리는 내 쪽에서 저쪽으로만 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도 놓아 오는 것일 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네게로 오라고 하기 전에 내가 네게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상호 뜻이 전달되고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어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로 말미암아 불평이 많았습니다.
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거들지 않고 방에서 선생님의 말씀만 듣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제자 분주히 일을 하는데 동생은 거들지를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도우라 하소서”
불평 어린 어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르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가 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오늘 말씀의 주안점을 찾는 것은 언니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에게 직접 자기의 뜻을 전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전하려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니가 동생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피차 뜻이 잘 통할 수 있는 자매간입니다. 그리고 항상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는 환경에서 그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의사소통이 되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한다”는 아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들의 가정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형제간,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일들이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직접 아내에게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삼자에게 아내의 잘못된 것을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의 가정 이혼율이 늘어가게 되고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사랑도 이해도 없는, 좀 가혹한 표현이지만 동물처럼 살아가는 하나의 우리로 전략해 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이를 교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식의 잘못을 늘어놓으면서 대신 교훈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여 줄 것을 소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상호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있게 될 때 의사소통의 기회를 통하여 보다 아름다운 교우 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하여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지적하고 문제를 삼아 가는 데서 교회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상호 이해와 관용으로 잘못된 것을 교정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이상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같은 교인의 허물과 잘못을 이야기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러면서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바로 의사소통의 결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직장 생활에서도 그렇고 친구간에도 그렇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 지각이 있는 사람, 정말로 믿음 있는 사람, 인격적 품성을 높이 갖춘 사람,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축복된 삶의 수단인 커뮤니케이션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면 그 사람의 생활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끝내 버리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조용한 시간,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거기에서 위대한 믿음의 힘이 생겨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히브리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잘못과 낭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직접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그 때부터 인간은 직접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인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전해 드립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게 되고 혼란이 옵니다. 무질서가 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성도는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에 들어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인간 생활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는 축복의 열매를 맺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
마가복음 7장 31-37절에는 귀먹고 어눌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상대방이 알아듣지를 못하고 아무리 상대방이 말을 해도 자신이 알아듣지를 못하는 안타까운 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에바다”(열리라)를 외치면서 그의 맺힌 것이 풀려지게 하셨고 온전하게 할 수 있도록 고쳐 주셨습니다. 그 귀먹고 어눌한 환자의 삶은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저주의 사슬에서 풀려 축복을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도 영적 상태가 마치 귀먹고 어눌한 사람처럼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말을 하지만 하나님이 알아듣지를 못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우리가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으로 귀먹고 어눌한 상태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사소통이 되지 않은 답답함과 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같이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원만하게 잘 될 수 있으며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의사소통이 잘 되어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면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의사소통은 일방적인 아닌 상호 교체되면서 진행되는 삶의 요소입니다.
요즈음 통신문화가 발달되어 너나없이 휴대용 전화기를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무선으로 통화수단이 되는 전화기이고 보면 종종 상대방의 말소리는 들리는데 내 말이 상대방에게 전혀 들려지지 않거나 반대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말할 것 없이 그럴 때는 짜증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고 들리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린다거나 소리를 지르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전화기를 그고 다시 걸어야 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에 의사소통도 그렇습니다.
의사소통이란 일방적인 아닌 상호 교체적으로 진행되면서 서로의 듯이 전달되어 교감하는 것으로 어느 한족이 일방적으로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 생활, 특히 영적 신앙생활에서는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는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또한 의사소통이 원만하지 못해서 그 삶 자체가 무질서하게 되어 고통을 경험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한국 가정 법률소 95년도 상담 통계가 발표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이혼 사건이 47.3% 였습니다. 이혼 상담 다음으로 부부관계 상담이 26.4%를 차지했고 그 가운데서도 30대가 43.2%로 30대가 결혼의 위기 상황을 드러냈습니다. 이와 같은 원인의 공통점이 부부간의 의사소통이 되지 않음으로 인한 폭행, 외도, 가출 등으로 인한 가정 파탄이 주종을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개인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의사소통은 더욱 중요한 삶의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의 듯은 상관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기도하고 찬송하고 광신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의 뜻을 좇지 아니하면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으로 자기 도취에 빠진 경우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이해하고 상대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상호 유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 위주로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해 버리는 일이 허다하여 스스로 무너지는 삶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기 중심에서 너희들은 내 말만 들어라 하는 것은 일방적인 통화이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말만 들어야 한다는 논리는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다리는 내 쪽에서 저쪽으로만 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도 놓아 오는 것일 때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내가 네게로 오라고 하기 전에 내가 네게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원만하게 상호 뜻이 전달되고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어 아름다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동생 마리아로 말미암아 불평이 많았습니다.
언니는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는데 동생 마리아는 거들지 않고 방에서 선생님의 말씀만 듣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선생님 제자 분주히 일을 하는데 동생은 거들지를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을 도우라 하소서”
불평 어린 어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르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마리아가 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본문을 통해서 오늘 말씀의 주안점을 찾는 것은 언니 마르다가 동생 마리아에게 직접 자기의 뜻을 전하지 않고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의 뜻을 전하려는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언니가 동생에게 전달하는 의사소통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피차 뜻이 잘 통할 수 있는 자매간입니다. 그리고 항상 의사소통이 잘 될 수 있는 환경에서 그들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의사소통이 되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한다”는 아량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우리들의 가정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사이, 형제간, 부모와 자식간에 이런 일들이 흔히 있을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문제가 있을 때 내가 직접 아내에게로 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 삼자에게 아내의 잘못된 것을 늘어놓으면서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오늘의 가정 이혼율이 늘어가게 되고 가정은 가정이 아니라 사랑도 이해도 없는, 좀 가혹한 표현이지만 동물처럼 살아가는 하나의 우리로 전략해 가는 것입니다. 자식이 분명 잘못하고 있는데도 아버지가 이를 교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식의 잘못을 늘어놓으면서 대신 교훈해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여 줄 것을 소망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하면서 상호 실수를 할 수 있고 잘못된 것이 있게 될 때 의사소통의 기회를 통하여 보다 아름다운 교우 관계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아름다운 것인데 항상 다른 사람을 통하여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지적하고 문제를 삼아 가는 데서 교회가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상호 이해와 관용으로 잘못된 것을 교정해 가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지만 이상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먼저 같은 교인의 허물과 잘못을 이야기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그러면서 교회를 무질서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경우도 흔히 있습니다. 모든 문제는 바로 의사소통의 결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도 마찬가지이고 직장 생활에서도 그렇고 친구간에도 그렇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 지각이 있는 사람, 정말로 믿음 있는 사람, 인격적 품성을 높이 갖춘 사람,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커뮤니케이션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고자 합니다.
우리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축복된 삶의 수단인 커뮤니케이션은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면 그 사람의 생활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성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를 끝내 버리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조용한 시간, 하나님과의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때 거기에서 위대한 믿음의 힘이 생겨납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히브리 백성들은 얼마나 많은 잘못과 낭패를 당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직접 의사소통을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그 때부터 인간은 직접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도에게 주어진 특권인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전해 드립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을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게 되고 혼란이 옵니다. 무질서가 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성도는 하나님과의 단절 상태에 들어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질 때 인간 생활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는 축복의 열매를 맺는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박청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