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42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골 1:24~29)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기꺼이 수단으로 삼는데 익숙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생의 마지막을 예감했을 때는 더욱 분명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증거하다가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환난 가운데서도 의의 도구로 사용하심에 여전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후 62년 경에 옥중에서 골로새교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당시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고 에바브로디도의 사역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자기가 세운 빌립보교회나 에베소교회처럼 골로새교회도 똑같이 중대했습니다.
골로새는 리쿠스계곡에 위치한 브리기아의 중요한 도시로서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로부터 가까운 곳입니다. 특히 이 지방에는 석회석광산이 있었고 이 계곡은 매우 비옥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이 골로새교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아주 엄격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고 했습니다(골 1:24).
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바른 이해 입니다.
본문 1장 24절에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했습니다.
『남은 고난』(The things laking of the aticions)은 '결핍된 고통', '늦게 오는 고통'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불충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가 머리와 몸의 관계라는 전제아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머리가 받는 고통을 몸이 받지 아니할 수 없는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받은 고난에 그의 몸된 교회가 동참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에는 어떤 논리적인 장애도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몸이 받는 고통을 머리가 받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수난은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인 것입니다(행 9:5; 마 10:39; 요 15:18). 여기에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수난은 십자가상의 수난처럼 대속적인 직접수난의 가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의 교회가 지향하는 목표이며 교회의 성장과 순결을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직접 수난은 단번에 완성하였습니다.(롬 6:10). 그리스도 자신이 직접 당하신 고난은 십자가에서 종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된 교회의 수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을 통하여 당하실 고난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그날까지 일정한 분량의 것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우리 육체에 채운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한다는 의미인데 이것은 성도의 고난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감사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희생입니다(살전 3:9).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1) 교회의 일꾼이 되는 데 오는 고난입니다.
본문 1장 25절에 『내가 교회 일꾼된 것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말은 청지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일꾼이 경륜(오이코노미안, )을 따라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 일꾼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2) 하나님 말씀을 이루려 함에서 오는 고난입니다.
본문 1장 25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루다』(플레로사이, )는 말은 '가득 채우다', '완성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방인을 향한 복음운동을 말합니다.
로마서 11장 25절에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충만』(pleroma)은 완전히 가득찬 수를 말합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는 구원받기로 작정된 자의 수를 가리킵니다.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란 이방복음으로 그리스도에게로 택자들이 완전히 소집되는 시기를 말합니다.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복음을 다 받게되는 시기입니다(행 13:48).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란 선택된 유대인의 총수와 이방인의 총수 곧 모든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십 사만 사 천명으로 나타납니다(계 14:1-4).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3) 하나님의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풍성함
을 알게 하는데서 오는 고난입니다.
본문 1장 27절에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풍성함』(플루로스, )을 그리스도와 관련시켜
① 길이 참으심에 풍성함(롬 2:4)
② 영광의 풍성함(엡 1:18; 빌 4:19)
③ 지혜의 부요함(롬 11:33)
④ 은혜의 풍성함(엡 1:7; 2:7) 등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풍성함』이란 곧 그리스도와의 한 몸으로서의 신령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Ⅱ.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실재입니다.
1)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전도)
본문 1장 28절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라고 했습니다.
『그를 전파한다』 함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골 1:15). 만물이 그로부터 창조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골 1:16). 그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며 만물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골 1:17).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셨고 만물의 으뜸이 되신 분입니다(골 1:18).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화목하게 했습니다(골 1:22).
고린도후서 4장 5절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다시 오십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고, 전할 때 오는 수고로움과 아픔을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2) 권하는 것입니다.(양육)
본문 1장 28절에 『…각 사람을 권하고…』라고 했습니다.
권하는 것은 성도 각자의 양육과 성장에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머리에 주입시키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권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주입시킴에 설득력 있는 감화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양육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인 접촉이 있게 됩니다. 복음전파는 미련한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고전 1:21).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권할 때 오는 아픔과 고통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합니다.
3) 가르치는 것입니다.(제자)
본문 1장 28절에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가르침이 이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로 삶에 적용시켜서 제자로서의 삶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를 체험하고 그에게 보답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제자의 삶입니다. 이 가르침에는 의무와 사명이 함께 수반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절대화되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의 관계가 삶의 목적이 되게 합니다. 골로새 교회는 당시에 금욕주의자와 천사 숭배자와 영지주의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이들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될 사명이 있는데 그 방법은 모든 지혜를 각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몸된 교회의 성장과 순결을 위하여 흘리는 땀과 고난을 남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Ⅲ.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의 가치입니다.
1) 각 사람을 완전한 자로 세우는데 있습니다.
본문 1장 28절에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유아가 아니라(히5:14) 영적인 성인으로 성숙한 기독교인들(골 4:12)을 두고 한 말입니다. 비교적 완전한 자들(빌 3:15), 노련한 신앙인들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세우기 위함이라' 함은 그리스도의 소유인 성도들을 그 소유주이신 하나님께 헌납한다는 의미입니다. 먼저는 이 세상 있을 동안이고 나중에는 세상 끝날 심판 때에 종말적인 드림입니다(눅 21:36). 이것을 위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했습니다.
2) 그리스도의 능력의 역사를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본문 1장 29절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사명을 수행하는 힘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므로 복음전파를 가능케 했다는 것입니다.
3) 수고에 따르는 내세의 상급에 있습니다.
본문 1장 29절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4장 9절에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에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찾는다』는 말은 '믿는다'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말은 행하는데서 그 믿음이 온전해 집니다.
히브리서 11장 26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당하므로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참예할 것을 생각했습니다(고후 2:11-15; 롬8:8; 벧전 4:13,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적어도 모세에게는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가치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같은 입장이었습니다(고전 15:19).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의 몸된 교회 운동을 위한 고난입니다.
유대인의 충만한 수와 이방인의 충만한 수, 곧 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소집될 때까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도 한번 해 봅시다.
우리에게 있는 우리가족, 골육친지, 동료, 그리고 우리 이웃을 교회로 인도하는데 나의 육체가 더 이상 여분의 에너지가 없도록 힘을 다하여 수고해 봅시다.
-아 멘 -
출처/강구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