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42
서머나 교회 (계 2:8-11)
본문의 말씀은 서머나 교회에 대한 권면의 말씀입니다.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6㎞ 정도 떨어져 있는 항구 도시로서 오늘날 터키의 이즈메르(Izmer)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3차 전도 원정 중에 세워졌다는 학설이 가장 유력합니다(행19:10). 서머나 교회는 책망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감히 주님을 위해 생명을 포기한 교회인데 주님이 무슨 책망을 하시겠습니까?
서머나 교회 교인들은 당시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을 그리스도의 제자 됨의 한 대가로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찌 보면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오히려 교회가 더 순수하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장점을 가지기도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다 보니 죄가운데 빠질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서머나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회는 더 큰 핍박을 받게 되었고, 황제 숭배를 거역하다 보니 반국가적인 기관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되고 아주 극한 가난에 처하는 서머나 교회를 보게 됩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 이름 그대로 향기를 발하는 교회였습니다. 서머나에서의 '머'는 유향을 뜻하는 말입니다. 유향을 흩을수록 그 향은 멀리 퍼져 나가듯이 서머나 교회의 핍박은 오히려 그들의 신앙의 향기를 더욱 멀리 퍼지게 했습니다. 그 향기를 지금 우리들도 맡고 있습니다. 그러면 서머나 교회의 모습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으며, 건강한 신앙을 유지해야 하는지에 큰 은혜를 받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그 교회가 처한 형편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핍박을 받는 서머나 교회를 향해 처음이요 나중이신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주님은 영생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시종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모든 역사의 시작과 끝을 주장하시는 주관자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핍박 속에 죽음에 처한 서머나 교회를 향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 이 말씀은 곧 모든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해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은 시작과 끝을 알고 계시며,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죽음도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이렇게 나타나신 주님이 저들의 소망이었고, 힘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본문 9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서머나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과 훼방이 있었습니다.
① 서머나 교회는 환난이 있었습니다. 여기 환난은 압력이라는 뜻입니다. 큰 돌이 위에서 짓누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당시의 만행을 보면 기독교인들을 잡아서 기름을 짜 정원을 밝히는데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산에다 풀어놓고 인간 사냥을 즐겼습니다. 때론 끓는 물로 부어 고문을 시키기도 하고, 양쪽 안구를 뽑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환난 속에서도 서머나 교회는 믿음을 지켜 나갔습니다.
② 서머나 교회는 궁핍했습니다. 이것은 극한 가난을 말합니다. 여기 '궁핍'은 아예 가진 것이 전혀 없는 극한 가난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도 잃는 불행을 맛보았습니다. 지금도 신앙 때문에 좋은 직장도 포기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비방을 받으며 조롱을 받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처럼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오직 주님만을 섬기면서 믿음으로만 사는 성도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③ 서머나 교회가 받은 환난은 유대인의 훼방입니다.
여기 '훼방'은 중상 모략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자신들에 대해 '여호와의 총회'(민16:3)로 묘사하기를 좋아했으나 주님은 사단의 회라고 간주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위해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내가 너희들의 형편을 다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다 아신다고 할 때 성도는 큰 위안이 되지만, 대적자들은 두려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시는 것도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겪는 가난이 어떤 것인지도 다 아십니다. 믿음 때문에 흘리는 눈물도 몸소 경험하신 주님이 다 아십니다.
인생이 가진 모든 문제들을 다 아시는 주님이 그래, 내가 너의 형편을 다 안다고 말하시면 그 이상의 위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은 다 아십니다. 크고 작은 인생의 문제들, 우리가 가슴 조리며 애타는 문제들을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핍박, 환난, 궁핍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해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육신적인 모든 것을 다 강탈당했어도 영적인 부요는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풍성함은 자기가 현재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고 믿음으로 평가하신다는 사실 앞에 새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사회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재산을 몰수당해도 오직 주님만 섬겼던 위대한 승리자들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신 주님이 '그래, 내가 이제 너희를 도와주마'라고 하지 않고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무서운 환난이 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장차 올 고난을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설상가상입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고난이 없을 것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 이해할 수 있을텐데 더 큰 고난이 있으니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저들은 이미 극한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지금도 환난을 당하고 있고, 가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더 큰 환난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서머나 교회는 아직도 영전(靈戰)이 남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당하는 고난은 무엇입니까? 장차 마귀가 몇 사람을 옥에 넣겠다는 환난입니다. 십일 동안 그 환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보면 신앙 생활하다가 지쳐 버릴 수 있는 시험입니다. 환난이 끝이 안 보이는 상태일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일 동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여기 십일은 한시적이고 짧은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종종 조금 어려운 일이 있으면 쉽게 신앙을 포기해 버리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뼈저린 고통이 중복되어 공격해 와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나갔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환난은 잠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좀더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 환난을 허용하십니다.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환난들을 피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극심한 환난이 있다고 해도 반드시 환난을 마치는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것처럼 절망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떤 환난 속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해야 합니다. 이 능력이 여러분을 지배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0절, 11절을 보면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생명을 잃는 환난이 온다 해도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살기 위해 인간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단 죽을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충성은 어떤 상태입니까? 시간이 있으면 하는 충성입니까? 건강하고 피곤치 아니하면 하는 충성입니까? 성경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십니다. 여기 '죽도록'은 죽기까지,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캅은 정말 죽도록 충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가이사가 주(主)라는 고백을 하도록 강요를 받았지만 그는 '내가 86년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 왔는데 그 분은 나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았다. 하물며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시며, 구세주이신 그 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화형을 처하는 순간에도 '그대는 한시간 동안 타다가 꺼져 버릴 불로서 나를 위협하고 있으나 악인을 위해 예배된 장차 올 심판과 형벌의 영원한 불은 모르고 있소. 뭘 주저하시오. 원하는 데로 시행하시오'라고 하면서 불에 태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불에 타 죽는 순간에도 자신을 순교자의 반열에 서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집니다. 희랍어에는 면류관이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디아데마'입니다. 이것은 왕관을 말합니다. 또 하나는 오늘 본문에 사용된 '스테파노스'인데 경기에서 승리한 자에 주어지는 면류관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승리한 자에게만 주는 면류관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면류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썩지 아니할 면류관(고전9:25),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의의 면류관(딤후4:8), 영광의 면류관(벧전5:4), 금면류관(계4:4), 생명의 면류관(약1:12,계2:10)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곧 상급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또한 주님은 이기는 자에게 둘째 사망의 해(영원한 죽음)를 받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세 가지 죽음을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분리된 영적 죽음과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신체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지옥형벌)을 말합니다. 그런데 끝까지 죽도록 충성한 성도에게,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생명을 아끼지 않는 그들에게 영원한 죽음(지옥)의 고통을 받지 아니한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환난 속에서도 주님을 섬기는 서머나 교회를 보았습니다. 우리에게도 장차 어떤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난에 시달리고 있지만 또 어떤 극한 가난이 나를 괴롭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오직 주님만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심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며,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 소망의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