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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린 교회 (계 3:7-13)
문은 열고 닫는 기능이 있습니다. 문을 열어야 할 때는 반드시 열려야 하고 문이 닫혀야 할 때는 반드시 닫혀야 합니다. 열렸다는 말은 문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근간에 우리 사회에 화제사건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중 술집에서 인명피해가 많이 있었는데 불이 났을 때 비상구가 잠겨 있다든지 통로에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해도 열 수가 없어서 비참하게 많은 인명피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최근에 일어났던 어느 술집에서도 고스란히 15명의 젊은 여성들이 문이 열리지 않아서 갇혀서 죽고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열린 문이 있는 교회는 대단히 의미있는 교회입니다. 문이 열렸다는 것은 주일날 여러분들이 예배당에 출입하는 문이 열려있다는 그런 개념은 아닙니다.
네 가지 의미
먼저 열렸다는 개념을 21세기에서 많은 사회적인 의미를 두고 열렸다는 개념을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열린 시대, 열린 공간, 열린 예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열린 교회라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열렸다 라는 개념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다양성입니다. 백화점과 같은 개념입니다. 백화점은 모든 시민을 향하여 열린 공간입니다. 만약 백화점에 한 품목의 물건만 판다면 결코 사람들로 붐비지 않을 것입니다. 서울 시민 전체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다양성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백화점은 누구나 찾아가고 모든 사람들이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렸다 라는 개념으로 보는 것입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찾아오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찾아와서 영적인 감각을 느끼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무엇인가 가치를 발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백화점과 같은 다양한 은사와 가치가 준비되어 있는 교회라야 열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편리성입니다. 쇼핑센타가 있는 곳은 모든 면에서 편리합니다. 교통면이나 주차장도 편리합니다. 모든 면에서 편리하다는 것이 열렸다는 개념입니다. 현대인들은 불편한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우리 교회도 영적인 면에서 편리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불편해지는 것이 많습니다. 장애물들이 자꾸 생깁니다. 내가 은혜를 받는데도 장애물이 생기고 교회를 섬기는데도 장애물이 생깁니다. 신앙생활에 불편한 것이 없도록 편리함의 여건을 갖추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실명성입니다. 개인이 인정되고 개인이 존중되고 개인의 은사가 활용되는 교회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교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교회가 열린 교회라는 개념이 됩니다. 개인이 무시되거나 개인이 존중을 받지 못하는 교회는 열린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백화점에 가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한 고객입니다. 또 그렇게 취급을 합니다. 교회가 백화점만큼 생명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는 닫힌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출입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실명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이 실명성이 바로 열린 개념입니다.
네번째는 개방성입니다. 신세대들을 수용하고 신사고를 수용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화점이나 쇼핑센타를 경영하는 경영원리나 오늘날 신사고를 가지고 목회를 하는 목회원리에 바로 이 네 가지 원리를 도입합니다. 다양성이 있는 교회, 편리성이 있는 교회, 실명성이 있는 교회, 개방성이 있는 교회를 가리켜 사회적인 면에서 열린 교회라는 것입니다.
하늘문이 열린 교회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는 신령한 면에서 열린 교회를 소개합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가 열린 교회로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하나님은 빌라델비아 교회를 통하여 문이 열린 교회를 소개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 시대에 문이 열린 빌라델비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문이 열린 교회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늘문이 열렸다는 뜻입니다. 예배당의 출입문이 열렸다는 보이는 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이 열린 교회는 하늘문이 열려있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를 출입하는 여러분은 이곳에 와서 하늘을 보고 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 오셔서 하늘을 보고 가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이 열려있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문이 닫혀 있으면 교회가 되지 못합니다. 하늘문이 열렸다는 것은 그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이 예배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문이 열린 교회에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언제나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른 것을 보고 가면 안됩니다. 열린 문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가셔야 됩니다. 말씀을 듣는 이 순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에 받아들이면서 아멘할 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이 열린 교회는 이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이 하늘의 문을 바라보고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신령하게 만나 뵙는 영적 경험이 있는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10절에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51절에서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운명하시는 순간에 성소에 있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져서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은 하나님과 죄인간에 길이 열리는 순간이요 구원의 문이 열리는 순간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7절에 예수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습니다.
문이 열린 교회란 곧 하늘이 열린 교회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하늘이 열려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소수였지만 다수를 이겼습니다.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8절에서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했습니다. 적은 소수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실명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이긴 자들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12절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능력을 입어서 이긴 교회입니다. 이긴 자들로 세워져있는 교회입니다. 하늘 문이 열려있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를 지키겠다'는 돌보심의 은혜가 있는가 하면 '기둥같이 세우리라'는 은혜가 있고 '영원한 기념이 되게 하리라'는 언약이 있습니다. 하늘 문이 열려있는 교회를 출입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항상 이 언약의 중심에 두고 예수 그리스도가 열어 놓은 하늘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고 은혜를 얻고 하나님의 상급을 얻는 축복이 땅 위에 있는 교회에게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늘이 열린 교회의 의미 안에서 하나님을 늘 만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지방에서 연합집회가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10여명 손님으로 오셨으니까 주최측 에서 그 지방에서 아주 유명한 보신탕집에 예약을 하고 모두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하고 함께 갔습니다. 그런데 강사로 오신 목사님은 보신탕을 안 드시는 분이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모두 싱글벙글 좋아하며 식사를 하는데 강사 목사님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지혜를 발휘했습니다. 자기도 보신탕을 좋아하는 것처럼 얼굴을 밝게 하고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수육과 채소를 먹는 것처럼 하고 수육을 상대방 쪽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강사 목사님이 왜 개고기를 안 드시냐 하면 소문난 애완견 애호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저는 큰 교훈을 하나 느낍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좋아하시는지 않 좋아하시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하나님 이름으로 내 기분만 내고 있는 신앙생활이 아닌가? 강사가 좋아하지 않는지 나만 맛있게 먹고 있는 눈치 못 챈 사람들처럼 목회가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는 것은 여기 있는데 나는 이쪽 동네에 가서 내 기분을 내고 있지는 않은가? 하고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정직한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한 주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고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그렇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우리의 삶 현장에서 하늘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 성도가 정말 복된 성도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이 열린 교회
두번째로 문이 열린 교회라는 것은 그 교회에 출입하는 성도의 마음이 열린 교회라는 뜻입니다. 예배당 문은 주일날 다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예배당을 출입하는 성도의 마음이 열려있을 때 문이 열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문이 열리면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나갑니다. 또 하나는 들어옵니다. 문은 열고 나오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능은 당연한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의 문이 열려있을 때 들어오는 기능이 있습니다.
8절 이하에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緇갼?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너희들이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했는데 성도의 마음이 열리는 그 곳에 말씀이 들어옵니다. 우리의 심령이 열려있을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들어오면 나가는 것이 있습니다. 들어온 말씀은 우리 안에서 믿음을 일으킵니다. 믿음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결심이 아닙니다. 믿음은 믿는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믿음이 생성됩니다. 말씀의 원료가 없으면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말씀은 받아들이지 않고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믿겠다고 결심하는 우매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0장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일 때 내 안에서 믿음이 생겨나는 줄을 믿습니다. 그 말씀에 근거한 믿음이라야 영원히 변치 않는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심을 가지고 만든 믿음은 결심이 무너지면 믿음도 무너져버립니다. 어떤 경험을 하고 '내가 믿는다'고 할 때 그 경험이 무너지면 믿음도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만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이제 믿음의 소문으로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8절에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진 고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고 했습니다.
들어오는 것은 말씀이고 나가는 것은 믿음의 소문이 나가는 것입니다. 열린 마음을 가진 성도는 이 기능이 항상 살아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늘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믿음을 일으켜서 우리의 행위와 삶을 통하여 믿음의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예배당 문이 좋은 것이 중심이 아니라 성도의 마음이 열려있는 그 상태가 열린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출입하는 성도들의 심령의 문이 열린 교회를 규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문이 열려있고 이 교회에 출입하는 성도들 마음의 문이 열려서 그야말로 내가 섬기는 교회가 열린 교회로 세워져가기를 바랍니다. 그 분이 가장 기뻐하는 것, 그 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을 이루어가는 열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전건축을 할 계획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건축에도 신학이 필요합니다. 저는 요즘 성전건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기도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 기도를 안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중심기도는 성전건축이 일차적인 기도가 아닙니다. 저의 중요한 기도는 성전건축 이후에 이 교회를 내가 어떻게 부흥시키고 목회를 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전건축은 교회가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전건축을 하고 나면 담임목사의 목회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새로운 목회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다고 탈진이 되버린 목사님이 더러 계십니다. 예배당을 지을 때 목사님의 힘을 다 허비해 버리면 예배당을 지어놓고 목회를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을 지으면서 목사님의 힘을 뺀다면 그 교회는 어리석은 교회입니다. 교회의 일차적인 사명은 예배당을 짓는 게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 목사님이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는 건가? 안 지으려고 하는 건가?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지으려고 하는 설교입니다. 그러나 예배당을 바로 지으려면 제가 말씀드리는 이 건축신학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배당 건축이 교회의 제일의 목적이라는 생각을 깨뜨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당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당을 짓는다고 상회비를 못내겠다고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는다고 선교를 축소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예배당을 짓는다고 구제하는 것을 축소합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려고 예배당을 짓습니까? 우리 교회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가? 그것을 이루어 드리면서 보이는 예배당을 지어 가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제하고 선교하고 교육하는 것을 바로 하기 위해서 예배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것을 희생해 가면서 예배당을 지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문을 닫아놓고 집을 지으면 안 됩니다. 하늘문을 열어놓고 열린 문을 가지고 예배당을 짓고 선교를 하고 구제도 하고 성도들이 복을 받고 사업도 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성도는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일어납니다. 믿음의 원료가 되는 말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대단히 어리석고 막연한 말 같지만 이보다 지혜로운 말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지혜로운 말씀이 없습니다. 아침마다 열린 하늘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뵙기를 바랍니다. 그 분의 말씀이 내게 있고 그 말씀을 의지하고 우리 가정도 직업도 생명도 다 맡기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 분 앞에 우리의 전 생애를 맡기고 사는 믿음의 발걸음이 힘차기를 바랍니다.
기억하기도 싫은 사건이 있습니다. 성수대교 붕괴사건입니다. 그 사건을 말하면 너무 충격이 커서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호주에 가니까 교포 한 사람이 '목사님, 성수대교가 무너졌다고 하는데 다리가 어떻게 그렇게 무너질 수가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만큼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성수대교가 무너지기 전에 저도 몇 번 지나다녔습니다. 제가 지나다닐 때도 무너져 가고 있었습니다. 무학여고생들이 많이 희생이 되었습니다. 어제도 그 차를 타고 통학을 했을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상상도 하지 않고 그 다리를 건너다녔습니다. 아침 7시에 무너졌는데 7시 이전에 수많은 자동차가 그 다리를 지나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7시 이전에 그 난간에 걸려 떨어진 그 버스 앞에 버스는 무너지는 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다리가 무너질 줄 모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무지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 믿고 어떤 답이 나옵니까? 무너질 줄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들이 왜 하나님을 안 믿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무슨 지혜로 살겠다는 것입니까? 무엇을 가지고 자신을 보장하겠다는 것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거기 죽은 사람들이 그들만의 운명입니까? 죽을 줄도 모르고 다리를 건너가는 우리의 존재입니다. 우리도 모르고 건너갔습니다.
그러니까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는 수정을 해야 합니다. 오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일입니다. 가는 것은 내가 갑니다. 그러나 오겠다는 보장은 내가 못합니다. 정직하게 인사를 하려면 '저 갑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 말입니다.
며칠 전에 천안에 갈 일이 있어서 갔는데 설 연휴 때 사고 났던 현장을 지나 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집에서 나올 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했습니다. 사고 나기 전에 모두 휴대폰으로 몇 시에 들어가겠다고 연락했을 것입니다. 제가 그 현장을 지나오면서 "하나님, 오늘 나와 이 차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귀가하는 시간까지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여 주시옵소서" 그런 기도가 나왔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런 열린 심령으로 섬기는 교회라야 문이 열린 교회가 될 줄을 믿습니다.
열쇠를 활용하라
그런데 오늘 말씀에 흥미있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7절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천국문을 열고 닫는 열쇠 이름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열쇠'라고 했습니다. 이 열쇠는 하나님이 가지신 열쇠인데 이름이 '다윗의 열쇠'입니다. 이 말은 다윗을 통해서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속죄의 역사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곧 열쇠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열쇠라는 말은 다윗의 왕통을 통해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열쇠는 누가 가지게 됩니까? 믿는 자가 이 열쇠를 가집니다.
마태복음 16장19절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따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열쇠를 베드로 개인에게만 준 것이 아닙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천국열쇠를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 열쇠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이름입니다.
맺는 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러면 내가 시행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축복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예수 이름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쇠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만큼 존귀합니다. 예수 이름이라는 열쇠를 가지고 축복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하늘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를 열린 교회로 만드는데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쓰지 않는 열쇠는 가치가 없습니다. 중요한 열쇠는 황금으로 만든 열쇠가 아닙니다. 날마다 사용하는 열쇠입니다. 예수 이름을 날마다 사용하고 순간마다 활용하는 축복의 열쇠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용호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