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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도하라(2) (마태 6 : 11-15)
동구 루마니아에 살아있는 순교자라는 별명을 가진 아주 위대한 분이 한분 계십니다. 리차드 범브란트 박사인데, 이분은 저술가이면서 또 신학교 교수 입니다. 원래 혈통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나치가 루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가족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마니아가 공산화 되고 나서는, 이 범브란트 박사는 지하조직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1948년도에 잡혀서 투옥을 당하고 그 후 15년 동안 감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어두운 인생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석방이 되고 서방으로 빠져 나와서, 공산권 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그 노구를 끌고 다니며 복음을 전하셨는데, 지금 생존하고 계시는지 아직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처음에 잡혀서 3년 동안 지하 감옥 독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생각을 나눌 만한 말벗도 없습니다. 읽을 책도 없고, 자기 생각을 써 볼만한 종이나 연필도 없었고, 심지어 지저귀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았으며 파란 풀 포기 하나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조용히 스며드는 햇빛도 구경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그는 3년을 버티면서 혹독한 굶주림을 가지고 시름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매일 주는 것은 더러운 감자껍질을 가지고 만든 스프였는데, 그것도 충분하게 주는 것이 아니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빵 조각을 주는 것으로 연명을 했습니다. 게다가 자주자주 끌려 나가서 고문 당하고 매질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 악독한 공산주의자들은 범브란트의 정신세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그리고 영적인 세계를 마비시키기 위해서 스프에다가 매일 마약을 탔습니다. 마약이 든 스프를 계속 먹어대니 점점 정신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심각한 것은 기억력 상실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성경에 있는 내용을 깡그리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학자로서 그 동안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연구한 사람이었지만 그 신학적인 지식도 다 날라가 버렸습니다. 1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정도의 탁월한 언어학자였지만 모든 언어를 다 잊어버리고 자기 모국어인 루마니어를 조금 기억하고 있을 정도 입니다.
어느날 밤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문을 외우려고 했는데, 그날 따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하고는 그 다음 내용이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것이었습니다. 잊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당황하고 너무나 서글펐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매우 슬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늘에서 땅에 오셨는데 내가 그 분의 기도를 잊어 버리다니" 그리고는 옷 매무새를 다시 고쳐 잡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내가 주님의 기도문을 다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제 마음을 아시죠?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멘."
마약으로 인한 정신적 암흑상태를 2년 동안 버티면서 그는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마약 투여가 중단이 되고 음식이 조금씩 질이 나아지기 시작하면서 몇 달 지나자 기억력이 다시 되살아 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주기도문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잊어버렸던 주기도문의 단어 하나하나가 샘이 솟듯이 다시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기절했다가 갑자기 깨어난 사람처럼 잊어버렸던 주기도문을 마음에 담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사랑과 믿음을 담아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기도문을 골자로 해서 자신의 마음에 있는 모든 기도를 거기에 첨가하고, 드리고 싶은 모든 이야기를 그 기도에 담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올렸습니다. 그 회복된 주기도문의 기도를 통해서 그의 메말랐던 심령에 다시 한번 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의 영혼이 다시 회복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면서 그 혹독한 감옥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고 그가 쓴 것을 보았습니다.
사탄이 성도에게서 마지막으로 빼앗고 싶은 기도가 있다면 주기도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만큼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는 중요하고 사탄에게는 너무너무 듣기 싫은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바쁩니까?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돌아가는 세상, 조금만 아침에 늦잠을 자도 기도할 틈을 얻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달려나가야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운전대에 앉아서 잠깐이라도 머리 숙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며, 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한마디 한마디에다가 우리의 혼을 담고 우리의 믿음을 담고 우리의 뜨거운 열정을 담아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리면, 그 날은 기도 없이 시작한 하루라고 하는 딱지는 붙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아침마다 주기도문만 외우고 하루를 시작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만큼 주기도문이 중요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 안에 들어있는 정신, 원칙, 그리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귀한 진리들을 마음에 담고 잊지 않고 적용하면 우리의 기도는 훨씬 더 풍성해 지고 능력 있고 놀라운 하늘의 축복을 끌어 내리는 은혜의 손길이 될 줄 믿습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먼저 하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나온다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많은 기도를 들으시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과 열정을 담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는 것을 기뻐 하신다고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세 가지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아멘.' 이 세가지 기도가 나오는데 모두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윌리암 버클리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성경 학자는 이 세 가지를 놓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성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고,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건져 달라'고 하는 기도는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와 동행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하는 기도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담아두면 주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릴 때마다 매우 유익하게 생각할 수 있는 좋은 해석이라고 봅니다.
이 세 가지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안에 3가지의 중요한 기도원리가 들어있습니다. 기도의 원칙이 있고 기도의 정신이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욕심을 비우고 하는 기도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라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는 오늘 하루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말합니다. 오늘날 하는 말로 하면 '오늘을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입니다. 신약의 카피본인 다른 사본에 보면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 하고 기도 하고 있는데 다 똑같습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처럼 하루가 저녁에 시작하는 경우에는 엎드려 기도할 때에 날이 새야 되기 때문에 내일의 양식을 달라는 기도가 될 수 있고, 우리처럼 눈을 뜨고 해가 솟는 그 시간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는 '오늘날 우리에게 양식을 주옵시고' 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일용할 양식입니까? 가장 좋은 샘플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 한번 지을 수 없는, 온통 광야뿐인 그 시내산 아래서 40여 년을 방황하면서 살 때 그들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하늘에서 내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나를 주실 때 "너희들은 아침마다 나가서 들에서 만나를 거두어 찧고 삶고 해서 그 날의 양식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나갔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마음에 걱정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욕심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당일분만 거두라고 했지만 말을 안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두 부대도 거두고, 어떤 사람은 세 부대도 거두고 해서 식구대로 나가서 한 짐씩 지고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 하루 먹고 남은 것은 내일 먹지.' 하고 생각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녁이 되자 썩어서 못쓰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제서야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일 나가서 매일 먹을 것만 거두어 왔습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공중에 새가 날마다 먹고 마시는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하면 먹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은 이처럼 날마다 사는 양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이요, 날마다 우리에겐 필요한 건강이요, 날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먹고 마시는 물질입니다. "하나님이여, 오늘 우리가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 안에는 욕심이 자리를 잡을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더 가지고 싶다, 쌓아 놓고 싶다, 저축해 놓고 살고 싶다, 남 보다도 화려하게 살고 싶다.' 하는 생각들이 끼여들 만한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오늘을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얼마나 욕심 없는 기도입니까? 얼마나 소박한 기도입니까?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이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서구의 선진국에서는 50년 전만 해도 한 사람이 그래도 사람 대우 받고 살려면, 적어도 생필품이 70가지 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세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사람들이 그래도 삶의 질을 높여 가면서 살려고 하면 10배가 더 되는 생필품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800가지 정도가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삶의 질은 점점 높아지는데 그 반면에 사람들은 800가지 900가지를 충족시켜야 되기 때문에 점점 더 구하는 것도 욕심을 부리게 되고 점점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해졌습니다. 그래서 삶의 질은 높아질지라도 행복도는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많아지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면서도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자기밖에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릅니다. 결국은 영적으로 부도 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 사람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까지도 가만히 보면 그 기도에 욕심이 너무 많이 끼여 있습니다. 탐욕의 냄새가 물씬물씬 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줄 모르고 드리고 있습니다. 그만큼 기도가 오염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기도만큼 인기 없는 기도가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이 기도만 가지고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루 사는 것을 가지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기도는 인기 없는 기도라는 말입니다. 좀 더 얻기를 바라는 것이고 할 수 있으면 더 많이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 대부분의 소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구두와 같다고 교부 클레멘트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구두는 마냥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구두는 화려하다고 좋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발에 맞아야 되고 자기 신분에 맞아야 되고 자기 멋에 맞아야 합니다.
요즘 필리핀의 독재자였던 전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인인 이멜다의 구두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을 TV를 통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얼굴 가만히 보십시오. 꼭 마녀 같지 않습니까? 구두에 보석을 박으면 무엇합니까? 구두에다 금을 입히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자랑이라고 전시회를 연다면서 낯 부끄러운 줄 모르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세상에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정치가들인 것 같습니다. 구두는 크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몸에 맞아야 됩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쌓아 놓았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원하는 것을 다 손에 넣는다고 좋은 것이 아닙니다. 내 분수에 맞아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도할 때마저 무한한 욕심을 가슴에 품고 기도한다 말입니다. 주기도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욕심을 뽑아라. 하나님은 욕심이 들어있는 기도를 원치 않으신다.' 하는 것입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한번 따져 봅시다. 우리가 날마다 사는데 필요한 생명이라든지, 건강이라든지, 먹고 마시는 것이라든지, 자유와 평화라든지, 이것들은 따지고 보면 그날그날 얻어서 사는 일당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내 날이지만 내일을 누가 보장합니까? 오늘이 내 날이요, 오늘만이 내 것이요. 내일도 내 것이요, 모레도 내 것인 것처럼 거드름 피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마치 생명이 자기의 것인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고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내일이 내 날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에게 무슨 욕심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오늘이 내 날이요, 오늘을 살면 되고,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나는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다른 기도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오늘을 살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그 기도 하나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 보면 실직자들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점점 고통을 당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세요.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이 여러분을 위한 복음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은 꼭 주십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쌓아놓고 산 것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70년이라고 보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하루하루 돌보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정이 어려워도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이 꼭 주십니다. 이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내일을 위해 욕심 내고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욕심을 뽑아 버리고 일용할 양식을 매일매일 구하는 자녀,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저 공중의 새를 책임지듯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이렇게 날마다 오늘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 양식을 받아 먹고 마시며 감사하면서 살다 보면 10년도 살고 50년도 사는 것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시를 여러분이 알고 계시죠? 좋은 시를 많이 쓰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가 '가난한 새의 기도'라고 하는 시를 쓴 것이 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십시오. '꼭 필요한 만큼만 먹고/ 필요한 만큼만 둥지를 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새처럼/ 당신의 하늘을 날게 해 주십시오/ 가진 것 없어도/ 맑고 밝은 웃음으로 기쁨의 깃을 치며/ 오늘을 살게 해 주십시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쓰고/ 먼 길을 떠나는 철새의 당당함으로/ 텅 빈 하늘을 나는/ 고독과 자유를 맛보게 해 주십시오/ 나의 선택은 가난을 위한 가난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가난이기에/ 모든 것 버리고도/ 넉넉할 수 있음이니/ 내 삶의 하늘에 떠다니는/ 흰구름의 평화여/ 날마다 새가 되어/ 새로이 떠나려는 내게/ 더 이상/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새에게 물어 보십시오. 탐욕이 있는가 염려가 있는가 물어 보십시오. 그런 것이 있으면 새는 무거워서 날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늘을 나는데 지장을 받는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가볍게 기쁨으로 날 수 있습니다. 무게가 주는 슬픔은 없습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님의 가르치신 기도를 드릴 때마다 여러분의 가슴 속에 흠뻑 담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너무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괜찮습니다. 너무너무 불쌍히 여겼습니다. 얼마나 불쌍히 여겼으면, '나는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다. 무조건 다 용서해줄게.' 하시고는 예수님의 피로 그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모든 죄를 다 씻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나오기만 하면 과거의 죄든, 현재의 죄든, 미래의 죄든, 뭐 다 덮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이분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너무너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불쌍히 여겼으니 너도 너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이런 긍휼을 베풀어라. 그래서 불쌍히 여겨라. 행여나 너의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다고 할지라고 그저 불쌍히 여기고 무조건 용서해 주라.' 그래서 주님이 이 기도를 주기도문 속에 담아 두셨다고 생각합니다. 14절, 15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주기도문을 다 말씀하신 다음에 하필이면 이것을 삽입하였을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 하시려니와 그 다음에 다같이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얼마나 부담스러운 말씀입니까?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초대 교회 위대한 교부가 목회하던 교회에서는 주일이 되면 주기도문을 성도들이 함께 외우는데, 죽 외우다가 이 구절이 나오면 전부 다 입을 다물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는 말을 안 하고 그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고 합니다. 다들 가책이 되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는데 왜 나는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까?' 그 당시 사람들은 그래도 양심이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 기도하다가 중단한 것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이런 양심마저도 없지 않습니까? 용서를 했던 하지 않았던 그저 주기도문이니 외우고 보자는 식으로 다 기도하고 맙니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기도를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믿고 용서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날마다 발을 씻어야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날마다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야 됩니다. 더러운 발을 가지고 아버지 방으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루 오만가지 죄라도 용서 받아야 됩니다. 앞으로도 계속 용서 받을 일이 많습니다. 완전한 자가 없지 않습니까? 생각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고, 감정으로도 죄를 지을 수 있고, 입으로도 죄 지을 수 있고, 성경 말씀을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지키지 않으니 더 양심에 가책을 받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교회에서 가장 큰 죄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목사입니다. 너무너무 많이 가르치면서 그대로 살지 못하는 때가 많으니 나 만큼 죄인이 없습니다. 따라서 엎드릴 때마다 "하나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용서 받아야 됩니다. 오만 가지 죄를 용서 받아야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네가 용서해야 내가 용서한다."고 하나님이 지금 주기도문에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용서 안하고 하나님 앞에 갈 때마다 내가 용서 받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 만큼 염치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손가락질 당해 마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도 손가락질 하십니다. 세상 사람도 그것을 알면 손가락질 합니다.
어느 기독교 잡지에서 앙케이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불신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당신은 예수 믿는 사람을 어떻게 봅니까?' 하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조사자료를 보니 참 기가 막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주 이기적이다.' 31%가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주 비인격자들이다.' 30%가 또 그런 대답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아주 위선적이다' 17%가 그런 대답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한 80%의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을 아주 좋지 않는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기적이다, 위선적이다.' 하면서 하고 싶은 소리 다 하는 것입니다. 겨우 17%만 예수 믿는 사람이 좋다고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왜 이런 꼴이 나옵니까?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느냐는 말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믿기만 하십시오. 어떤 죄를 범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구원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내 모든 죄가 용서 받았다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찬송하고 예배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그렇게 자기를 선전하고 다닌다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이 볼 때 하나님이 자기 죄를 용서했다고 좋아하면서 자기 집안 식구의 죄는 용서 안하고, 친구 죄는 용서 안하고, 한번 비뚤어지면 술잔 하나로 끝낼 문제도 10년을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안 믿는 사람들이 손가락질 안 하겠습니까? 세상 사람이 손가락질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손가락질 안 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용서하십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한 것 같이' 할 때 '용서하다'라는 말은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요한과 야고보를 만나서 "너희는 나를 좇으라."고 명령하시자 그물을 깁고 있던 두 형제는 어떻게 했습니까? 배도 버리고 같이 일하던 아버지도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고 했습니다. 이때 배도 버리고 아버지도 버린다고 할 때 버린다는 말은 바로 용서한다는 단어하고 똑 같은 단어입니다. 헬라어입니다. 그러므로 용서가 무엇이냐면 버리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이냐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설교자가 한 말을 저는 늘 기억하고 있습니다. 키우는 개가 미쳤습니다. 소만 광우병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개도 광견병이 걸립니다. 미친개는 아무나 물어 뜯습니다. 그러면 사람도 또 병이 듭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개를 죽어야 합니다. 죽여 가지고 묻어야 됩니다. 그것은 먹지도 못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미친개를 죽여 가지고 묻을 때 좀 깊이 파고 머리고 몸이고 꼬리고 하나도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묻어 야 합니다. 그런데 미친개를 묻으면서 머리하고 몸은 묻고 꼬리만 세워서 바깥으로 보이도록 묻는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무슨 기념비가 됩니까? 왜 꼬리를 쳐 들고 꼬리를 밖에 내 놓고 묻습니까?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미친개를 묻으려면 꼬리까지 깨끗이 다 묻으십시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형제의 죄를 용서하려면 잊어 버리십시오. 꼬리를 남겨 놓지 말고 다 잊어 버리십시오. 아주 멋진 말이 아닙니까? 그런데 보면 우리는 그러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머리도 묻었습니다. 몸뚱이도 묻었습니다. 그런데 꼬리처럼 한 가지 내 놓고는, 쳐다볼 때마다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5년 전에 잘못한 것, 작년에 잘못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삐딱하게 보고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못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못 잊어 버린다는 것은 용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전부 잊어 버리십니다. 하나님에게 잊어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망각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왜 망각하십니까? 왜 잊어버립니까? 그분에게 잊음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 어떻게 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우리의 죄를 한번 용서하시면 모든 죄를 잊어 버리시는데, 어느 정도 잊어버리느냐 하면 자기의 등뒤로 던지듯이 잊어 버리고 깊은 바다에 던지듯이 잊어 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갈 때마다 당당하게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우리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데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습니까?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마음에 깊이 담고 있어야 됩니다.
끝으로 영혼의 거룩을 중시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고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우리의 영혼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그 문제를 항상 중시하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온통 시험 투성이입니다. 마치 지뢰밭을 걷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입니까?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날마다 시험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가 시험을 당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너무 시험이 많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 두 가지 반응입니다. 하나는 대적하고 이기는 것이고, 하나는 굴복하고 완전히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대적하고 이기면 그 사람은 점점 더 강해집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높은 경지로 올라 갑니다. 그러나 한번 무릎 꿇고 굴복하게 되면 악에 빠집니다.
'악에 빠지지 말게 하옵시고'에서 '악'은 정관사가 붙은 악입니다. 즉 '그 악'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그 악'이 사탄이라고 말했고,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은 '그 악'이 우리가 시험에 빠져 범하는 죄를 말한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이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일단 시험 받았을 때 그 앞에 무릎을 꿇으면 사탄에게 사로 잡히고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영혼이 못쓰게 돼 버립니다. 우리 영혼이 오염되고 더러워집니다. 영혼이 오염되고 더러워진 채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의 영혼의 거룩을 지켜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얼마나 좋지 못한 사이트가 많습니까? 음란물 사이트에 여러분처럼 피가 끓는 젊은이들이 한번 들어가서 '더럽구나. 닫자.' 하고는 끝납니까? 또 보고 싶고, 또 보고 싶고 하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이렇게 끌려들어가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그것만 있습니까? 폭력물 사이트도 있고, 자살 사이트도 있고, 굿 하는 사이트도 있고, 점치는 사이트도 있고, 저주하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이런 몹쓸 시험거리가 될 만한 사이트가 현재 한국에만 20만개라고 합니다. 최근 통계입니다. 얼마나 요지경입니까? 우리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말은 '주여, 세상이 너무나 악합니다. 잘못하면 내 영혼이 더러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이 더러운 시험과 악을 도무지 이길 만한 힘이 나에게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여, 나에게 은혜를 주사 나로 하여금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 말씀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내 영혼에 거룩함을 염려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를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와 같이 영혼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치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영혼을 더럽히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은 도와 주십니다. 할렐루야. 반드시 도와 주십니다.아무리 지뢰밭과 같이 시험이 많은 세상이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악한자가 와서 만지지 못하도록 지켜 주십니다. 인터넷 앞에서도 지켜 주십니다.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이 돌보아 주십니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기도의 원리와 원칙을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자신을 먼저 받들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열정을 쏟아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여, 오늘 하루 직장 생활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쓰임 받는 직장 생활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열정을 가지고 그런 기도를 먼저 하나님 앞에 앞세우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받아 주신다는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욕심을 버리고 일용할 양식을 그날 그날 구하는 기도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았습니까? 그러면 내게 잘못한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 해주고 용서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남을 불쌍히 여기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유창한 기도를 많이 해도 내 영혼에 죄를 품고 있으면, 내 영혼이 더러워져 있으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거룩을 위해서 시험에 들지 말게 해 달라고 하는 기도, 악에서 건져 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정성을 다해서 날마다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 반드시 은혜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중요한 기도의 원리를 마음에 담고 그 기도를 가지고 나의 기도를 계속 보태면서 하나님 앞에 날마다 기도하기를 힘쓰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모든 면에서 축복된 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가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 아버지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모든 것을 가지신 분, 무엇이나 다 하실 수 있는 분,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할렐루야. 이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 날마다 승리하고 날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전진하는 아름다운 주의 자녀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옥한흠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