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1,742
잃은 자를 찾으신 하나님의 기쁨 (요나서4:5-11 눅 15: 1-7)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의 비유는 우리가 잘 아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한 마리를 잃어버리자 목자는 그 잃은 양을 찾으러 나가서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기쁨의 잔치를 벌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해 타산에 밝은 현대인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그 한 마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일이 되지 못합니다. 성지에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거친 황야가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양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는다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옛날 이스라엘 땅에서 양을 치는 것은 뉴질랜드처럼 초원이 펼쳐진 곳에서 울타리를 쳐놓고 방목하는 것이 아니라 비탈진 언덕길로 이끌고 다니면서 마른풀을 뜯어먹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그 언덕길에 보면 양의 길이 나 있습니다. 양들이 지나다닌 길입니다. 풀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한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동을 해야하므로 그 과정에서 양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한 번 잃어버리면 찾기가 대단히 어렵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잃은 양을 찾는 일은 목자에게 큰 부담이며 괴로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즈음처럼 인건비로 계산을 한다면 차라리 양 한 마리를 포기하는 것이 낫지 그것을 찾으러 하루 종일 뜨거운 황야의 산길을 헤매는 것은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목자는 그런 고통과 수고를 마다 않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고, 얼마가 걸렸는지 모르지만 결국은 찾아내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이웃과 친구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간단한 잔치라도 베풀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사람 같았으면 잃어버린 양을 혹시 찾아 나섰다가 찾으면 무겁게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 않고 그냥 몰아서 끌고 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하는 대신에 재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양떼들을 몰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세리들과 죄인들을 가까이 한다고 불평하고 비난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들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그들과 완전히 생각이 다름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금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 같은 것은 찾을 가치가 없다고 본데 반해, 예수님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마침내 잃어버린 양을 찾고야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세리장 삭개오가 회개하였을 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눅 19:10)고 하셨습니다. 유대교가 죄인이라고 내친 자들을 오히려 구원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비유입니다.
잃은 생명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 잃은 자를 찾은 기쁨 역시 없게 마련입니다. 율법을 칼 같이 지킨다고 자부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는 칼 같은 비정함은 있을지언정 부드럽게 감싸안는 사랑과 기쁨은 모두 증발되어 찾아보려야 볼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가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잃은 것들에 대한 사랑과 그것을 찾은 큰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를 앞세운 유대교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대조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율법과 은혜로 대조시켰습니다. 율법이냐? 은혜냐? 유대교는 끝까지 은혜를 거부하고 율법을 고집하였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넘어선 은혜를 중심으로 세계 속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
율법주의를 내세운 유대교는 철저하게 율법 문자주의에 집착을 하였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을 규정하기 위하여 30여 가지 세부 규례를 정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가 진정한 신앙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를 죽일만한 크기의 돌을 드는 것도 일하는 것이며, 오리(五里) 이상 가는 것은 금하며, 현대 정통주의자들은 안식일에 전등 스위치를 켜는 것조차 행하지 않으며, 감기가 걸려 콧물이 날 때 수건을 바지주머니에서 꺼내기보다는 가슴에 핀으로 꽂아 닦아내곤 합니다. 이런 율법주의자들의 삶은 사랑이 매말러 찬바람이 돌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런 율법조항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고 얽어매어 자유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 얽매이는 의인이 되기보다는 자유롭게 사는 죄인이 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잃은 양 한 마리나 둘째 아들 탕자는 이런 율법주의에 질식한 나머지 뛰쳐나간 죄인들을 비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그렇게 벗어난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규정하면서 저들과 상종하지 않으며 저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의 죄는 단순히 율법조항을 문자대로 지키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것임을 지적하시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의인이나 그것을 벗어난 죄인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의 위선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면서 그들이 겉으로는 율법을 문자대로 잘 지키지만 실상은 더 큰 죄악을 그 안에 품고 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마 23:27
인간의 근원적인 죄는 율법을 통해서 깨끗하게 될 수 없음에도 마치 율법을 문자대로 지키면 깨끗해지고 의로워질 수 있다고 믿은 데서 위선이 나오고 불법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런 원죄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없어지지 않고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만 속죄될 수 있고, 그 속죄를 바탕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은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하게 하시므로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죽음에 의한 속죄가 바로 은혜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법이 규정하는 죄악을 모두 담당하셨기에 용서되지 못할 죄인이 없으며, 용납되지 못할 탕자가 없습니다.
현대 율법주의자들
구약성경의 율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요나인데, 그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한 것과 상관없이 그 성이 심판을 받아 파멸되어야 한다고 믿는 냉전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는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 같은 것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요나나 바리새파 사람들 같은 율법주의자, 냉전주의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처럼 남북이 분단되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율법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북한은 잃은 양 같은 존재요, 둘째 아들처럼 집을 나가 비뚤어진 탕자이기에 이들에 대하여 연민이나 동정을 갖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거나 그들이 어려울 때 지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잃은 양을 찾기 위하여 온갖 고초와 손실을 마다 않고 나간 목자처럼 행동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범죄로 간주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잃은 양을 찾고자 하는 정책과 노력들이 계속 이어지면서 수많은 변화들을 이끌어 내고 있음은 큰 기쁨이며 희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부산 아시아게임에 참가한 북쪽 미녀응원단이 단연코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말들이 많지만 부드러운 여성의 이미지가 북에 대한 경직된 시선을 완화하는 데 기여했음은 분명합니다. 북쪽이 이렇게 전에 없이 국제사회를 향하여 열린 자세를 보인 것은 분명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죄인과 세리들과 어울려 지내느냐는 율법주의자들의 질책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을 불러 치료하고 구원하고자 오셨다고 대답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켜보시면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냉전적인 사고를 가진 언론과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주님은 한반도에 불기 시작한 사랑의 바람이 점점 더 확산되면서 율법주의적 사고는 사라지고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끌어안는 통일의 그 날이 오도록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정죄하여 잘라내고 쫓아내고 분열하던 교회에서 거듭나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서로를 포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잃은 양을 뜨거운 심장으로 찾는 교회가 되어야지 품안에 있었던 양들도 쫓아내어 잃은 양이 되게 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냉전적 사고의 한 부분을 크게 담당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변화되어 좀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하며 목자의 심정으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수구적인 율법주의 사고를 벗어나서 복음 안에서 좀더 자유롭고 열린 자세로 남북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통일을 이끌어내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잃은 생명을 찾은 기쁨
잃은 양의 비유에서 우리가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잃은 양을 찾았을 때의 기쁨에 대해서입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돈으로 계산하지 않고 같은 생명공동체의 일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목자는 단순히 그가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아니라 백 마리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생명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라고 봅니다. 백 마리라는 완전수와 거기서 한 마리가 빠져버린 99의 불완전수는 단순한 하나의 차이가 아닙니다. 한 마리가 빠지므로 전체 공동체가 불완전하게 된다면 그 한 마리는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느 자녀가 많은 가정이 있는데, 그 많은 자녀 중 하나쯤 잃어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많은 자녀 중 하나가 빠지면 그 가정 전체가 불완전한 가정, 근심의 구름이 항상 깃들인 가정이 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개미나 벌처럼 집단생활을 하는 곤충을 관찰해 보면, 그 중에 20% 정도는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20%를 제거하면 나머지는 모두 열심히 일할 것 같은데 또 다시 그 중에 20% 정도가 빈둥거린다고 합니다. 사람의 집단도 비슷하여 대체로 그 집단의 20% 정도는 적당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면 그 기업이 잘 될 것 같은데, 얼마 지나다 보면 비슷한 현상이 생겨난다고 합니다. 하느님이 처음 창조하신 세계는 모두가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로만 구성하신 것이 아니라 개중에는 모자란 사람도 장애를 가진 사람도 있고 약한 자도 있도록 만드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사람과 다양한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로 창조된 세계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서로를 적대시하고 혹은 파괴하므로 하느님의 세계 질서 깨뜨리고 있습니다. 모자라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없으면 안되도록 만들어진 세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인간은 자연을 생명공동체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깨닫지 못하고 개발하고 이용하고 파괴하므로 하느님의 세계를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파괴된 생태계는 바로 잃은 양입니다. 반드시 찾아서 그 상처를 고치고 싸매서 회복시켜야 할 중요한 생명입니다. 결국 하느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없어도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없어질 경우 하느님은 그것을 반드시 찾으시며, 그것을 찾았을 때 큰 기쁨을 맛보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잃은 양을 찾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생명공동체가 회복되므로 이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썽꾸러기인 인간이지만 그 인간이 없으면 생명공동체가 완전해질 수 없기에 결국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하여 그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길 잃어버린 말썽꾸러기 양과 같은 존재인 인간을 하느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까닭은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하느님이 완전해지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아직 잃은 양을 찾은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아직 세계와 자연의 모든 구원이 완성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완전한 생명 공동체가 회복될 것이고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큰 기쁨을 갖고 그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섭리하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함께 잃은 양을 찾아 나서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며, 서로 원수가 되었던 적들에게도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어 막혔던 담을 헐고 하나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갈등과 분쟁으로 높이 쌓아올렸던 모든 담들을 헐어내고 한 형제자매, 한 민족이 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라크를 침략하려고 전쟁을 서두르는 미국이야말로 이 시대의 잃은 양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의를 저버리고 전쟁에 광분하는 나라가 바로 하느님이 애타게 찾으시는 잃은 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도 함께 미국이 돌이켜 그 오만한 자리에서 내려와 겸손히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회개할 수 있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잃은 양이었던 여러분을 친히 찾아오셔서 구원하여 주신 그리스도의 그 뜨거운 사랑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뜨거운 사랑을 이어 받아 아직도 길을 잃고 헤매는 많은 생명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야 하겠습니다. 사랑도 없고 긍휼도 없는 냉랭한 율법주의자가 되어 자연을 망가뜨리고 형제자매를 정죄하면서 혼자 의로운 체 하는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긍휼을 입을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받들며 그 사랑을 배워 이 세계를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로 변화시켜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회복된 세계를 보시면서 활짝 웃으실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선한 목자처럼 봉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의 날이 올 때 우리가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뻐 춤출 때 하느님도 기뻐하시며 우리에게 더욱 큰 은총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잃은 양을 안타까움으로 찾아 크게 기뻐할 때 하느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은 곧 하느님의 기쁨이 될 것임을 확신하면서 열심히 잃은 양을 뜨거운 사랑의 마음으로 찾아 나서야 하겠습니다.
이제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버리고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뜨거운 마음으로 잃어버린 모든 생명을 되찾아 하느님이 기뻐하실 생명공동체를 이루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한국교회 부흥설교 설교 정보수집 편집위원 협조와 추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