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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에게 넘치는 기쁨 (요 16:20-33)
오직 예수!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성도는 슬픔과 고통 가운데 살고 있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인생살이에는 기쁨보다는 슬픔이나 괴로움이 훨씬 더 지배적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겨운 것이라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을 펼 때마다 거기 인생의 고통과 비참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에 자녀의 손가락을 자른 이야기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너무도 가난한 나머지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이런 짓을 했다고 합니다.
또 한번은 단돈 50만원에 단칸 사글세방에 살던 일가족이 보증금을 올려달라는 집주인의 성화에 못이겨, 이사 가겠다 하고 보증금을 받아서 그 돈으로 평소 먹고 싶어도 먹지 못했던 고기를 사다 먹고 나란히 누워서 자살을 했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는 ‘인간은 던져진 생을 산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어떤 특정한 상황 가운데 던져져서 그 상황으로 인하여 고통받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경 역시 인생은 헛된 것이요 허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편 기자는 인생을 ‘마르는 풀’과 같다고 했고(시 90:5,6), 야고보 선생은 인생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비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뻐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 슬퍼하며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살전 5:18), 영감받은 사도의 권면입니다(빌 4:4).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성도라면 당연히 누리게 되는 기쁨이고, 주님의 제자라면 그 삶 속에서 날마다 체험하게 되는 기쁨입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 위대한 기쁨이 무엇인지 알아보고, 여러분 자신에게 이 기쁨이 넘치고 있는지 점검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1. 구원의 기쁨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21절,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한 비유입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고나면 그때까지 걱정 근심했던 것은 물론이고 아이 낳을 때의 극심한 고통까지도 모두 잊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당국자들에게 잡히셔서 모진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의 두려움과 고통이 심하겠지만, 그 대속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되면, 그 구원받은 기쁨으로 인해 모든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단락은 예수께서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20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관용어를 사용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영적 각성이 필요함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에 대하여 세상과 제자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 제자들은 곡하고 애통하며 근심에 잠겼지만, 세상은 기뻐했습니다. 어둠의 영역에 머물러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성공했기 때문에 크게 즐거워 했지만, 주님의 제자들은 내면적인 고통과 비탄, 극심한 두려움과 슬픔에 싸여 있었으나(요20:19), 이것이 곧 큰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습니다(요 20:20; 행 2:46).
주체할 수 없는 극심한 슬픔과 불안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제자들의 내면에 기쁨과 환희로의 일대 국면 전환을 가져다 준 사건은 그리스도의 부활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잠시 동안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초상집처럼 우울하던 제자들의 분위기를 즐거운 잔치집으로 바꾸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과 성령강림이 제자들에게 이토록 큰 기쁨이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로 인하여 지금까지 역사상 모든 인류를 억눌러왔던 죄와 사망이 정복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의 대속적 죽음의 공로를 의지하게 될 때 완전한 죄사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다가 실패한 것처럼 보였던 예수님이 사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진정한 메시야라는 사실을 성령께서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이 원리는 초대교회의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성령 강림을 체험한 후에 남은 생애를 구원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을 만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게 될 때 구원의 기쁨으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기쁨은 그리스도의 임재에서 비롯되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지금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를 돌보시며,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기쁨은 그 근원이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세상의 기쁨과는 달리, 영원한 것입니다. 이 기쁨은 과거의 모든 두려움과 근심, 고통을 깨끗이 잊어버리게 할만큼 큰 것입니다.
양수정씨가 쓴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란 책에 사형수와 사형장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 책에 의하면 교도소 안에서는 사형장을 ‘넥타이 공장’이라고 부른답니다. 교수형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그리고 사형장으로 통하는 출입문을 ‘고만통’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문으로 들어가면 만사가 ‘고만’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이 확정된 죄수들은 공휴일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공휴일에는 사형집행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처지가 되면 단 하루만이라도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휴일을 기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삶에 대하여 얼마나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사형이 집행되는 당일입니다.
사형수에게는 절대로 ‘사형 집행하러 갈 시간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알면 백이면 백 모두 사형장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수들은 ‘00번 면회요’ 하고 사형수를 불러내어 면회소로 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형장으로 방향을 돌리게 합니다.
이럴 때 어떤 사형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기도 하고 다리가 저린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 놓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출입문, 그러니까 ‘고만통’에 다다르면 대부분의 사형수들은 일단 한 번 서서 하능르 향하여 고개를 들고 무악재 고개 넘어 흰구름을 쳐다보고 다시 고개를 떨구어 땅을 한 번 내려다보고 형장으로 간다고 합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형수가 되어 ‘고만통’ 앞에서 ‘아 이제 죽었구나’ 하고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갑자기 간수가 묶였던 줄을 풀어주며 밖으로 향한 문을 열어주고 ‘이제 당신은 대통령 특사로 자유이니 나가서 잘 사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 때 그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와같은 감격의 생생한 체험자입니다.
우리 모두 죄값으로 인해 죽기로 작정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는 작은 고통에 인상 찌푸리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고만통’을 벗어나 ‘자유의 문’으로 들어간 성도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구원의 기쁨이 지금 넘치고 있습니까? 그 기쁨은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계속하여 여러분에게 솟아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복된 분입니다.
2. 기도 응답의 기쁨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또 다른 이유는 기도 응답에 있습니다.
24절,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주님의 제자는 원하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여 응답받게 되는데, 이 기도의 응답이 충만한 기쁨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응답받습니까? 그 이유를 주님은 본문 27절에서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나를 하나님께로서 온 줄 믿은 고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니라”
즉,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자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에서 주님은 기도 응답의 원리를 명확히 가르쳐 주십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은 후부터 제자들은 성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함을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도 응답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신앙 생활에 있어서 너무도 중요한 기도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셔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심으로 제자들의 삶에 나타난 획기적인 변화는 예수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중보자이신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성도들은 무엇이든지 직접 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성도인 우리가 구할 때에 하나님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얼마든지 계속하여 주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본 절은 성부 하나님과 제자들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 것과 더불어 이와 같은 새로운 관계가 중보자 되신 성자 예수로 말미암아 실현됨을 나타냅니다.
우리가 은혜를 얻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된 것은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히 4:16).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모두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마 7:7,8).
예수의 이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멸망 받을 죄인으로 머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롬 3:23,24).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직접 구할 수 있게 되었고, 구하는 이마다 응답 받음으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것이 확실하게 보장되었습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하나님 아버지께 구하는 자는 직접 응답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응답의 확신과 더불어 기쁨이 충만해질 것입니다.
여기 ‘충만하리라’는 ‘플레로오’의 완료 분사 수동태입니다. 수동태는 기도의 결과로 오는 충만한 기쁨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신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구할 때마다 아버지께서 응답해주시며 충만한 기쁨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염려만 하며 걱정만 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안에서 구할 때에 언제든지 응답하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확신을 가지고 구하는 것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성도들이 이 특권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거나 적기 때문입니다. 기도응답의 약속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없어서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위대한 약속을 받았음에도 그로 인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빌 4:6, 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기도응답의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항상 들으시고, 무엇이든지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으로 가득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이 어느 정도 입니까?
날마다 응답의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충만하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세상을 이기는 기쁨
주님의 제자 된 성도에게 기쁨이 넘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33절,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비록 제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수많은 환난을 당하게 되겠지만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세상에 대하여 승리자가 될 것이고, 따라서 환난을 두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구별된 무리였기 때문입니다.(요 15:19; 17:14).
비단 이들 뿐이었습니까? 말씀대로 살아갔던 수많은 인물들도 역시 숱한 환난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그들이 전혀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님도 이 사실을 잘 아시고,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마음을 다시 먹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어두움의 권세에 대해 명백한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임금인 사탄에게 완전히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치명상을 당한 사탄은(창 3:15) 백보좌 심판 직전에 불못에 던져져서 세세토록 괴로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계 20:10).
따라서 주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결코 절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미 승리를 거두신 예수님을 의지하기 때문이요, 그로 인해 진정한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로 추앙되는 베토벤은 본래 슬픔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슬픔과 울분은 32세 때 쓴 유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는 지난 6년 동안 ‘나아진다’라는 희망에 속아서 살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절망이다. 나는 귀머거리이다. 음악가인 나에게 있어서 더 예민해야 할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리다니··· 이 불행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잠시 후면 나는 나의 삶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아, 불운한 존재여!”
그러나 베토벤은 그때 목숨을 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다음과 같은 간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유서의 말미에 씌어진 말입니다.
“오! 하나님이여, 나에게 마지막으로 순수한 기쁨의 날을 허락하소서! 너무도 오랫동안 진정한 기쁨이 나의 마음 속에서 우러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그 유서를 쓴 때로부터 24년이 지나 그는 비엔나의 카른터 극장에 설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불후의 명작 ‘합창’이 포함된 제9번 교향곡을 연주하였습니다. 극장은 온통 환호의 도가니였습니다.
그의 9번 교향곡은 인생을 기쁨의 눈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작곡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토벤에게 있어 삶은 더 이상 암울한 것이 아니라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환경이 바뀐 게 아니었습니다. 그의 귀는 여전히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다만 삶을 보는 그의 눈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는 실로 웃을 일보다는 울어야 할 일이 더 많습니다. 기쁜 일 보다는 슬픈 일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삶을 보는 눈인 바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기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성도를 절망에 빠뜨리는 슬픔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자이며, 그의 속에서 구원받은 기쁨이 샘솟듯 넘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기도응답의 특권이 주어졌고,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경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되는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참으로 놀라운 기쁨입니다.
또한 성도에게는 주님께서 승리하심으로 인하여 승리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언제나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의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까닭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사도는 오히려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자신 있게 외치고 있습니다.
서현의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항상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