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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합의 믿음 (수2:8-14)
예수님 시대에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발견합니다. 우선,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 표적, 이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적을 보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보다 기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서 좀처럼 그들의 고정된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권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군중의 지지를 받아 유대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이라는 당시 독립운동단체에 속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유다’였습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기대를 못 미치자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얼마나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있었는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곧 예수님이 권력을 갖게 되면 자기들을 총리와 비서실장이 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한심했지만, 이 말로 분쟁이 일어난 것은 더 큰 실망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모르고, 관심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람들을 칭찬하거나 책망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물에 빠지자 그를 건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또한 백부장을 보면서 유대 땅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고 칭찬했고, 향유를 부은 여인의 믿음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알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의 씨와 성장과 믿음의 열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이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오셨고, 고난을 당하시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주님처럼 ‘믿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믿음의 씨가 심겨졌는지, 나의 믿음은 어떤 수준인지, 나는 믿음에 따르는 열매가 맺어지는지 끊임없이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라합’입니다. 라합은 어떤 믿음의 사람이기에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 중에 있었던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은 여리고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을 위해 두 사람의 정탐군을 성에 보냅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들어가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합이 고백한 말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으며,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라합은 먼저 이스라엘에 대하여 누군가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요, 섬기고 믿어야 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라합을 보면서 먼저 배우는 귀한 신앙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알고, 고백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고 믿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잘못되고, 실패하고, 심판 받고, 망하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몇 가지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먼저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비전이 없어도 망한다고 말합니다. 꿈과 비전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가 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법입니다. 전에 성경을 덮어놓고 믿으라고 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되는 길입니다.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후원하는 김문수선교사님이 태국 북부지역의 대학도시 람빵에 선교센터를 건립하여 헌당식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그곳을 통해 태국에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한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국사람들의 무지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이긴 합니다만 태국사람들도 좀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얼마 되지 않는 태국기독교인들도 책을 읽지 않고, 결국 성경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데 큰 장애가 되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경건 서적은 제쳐두고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많이 알고, 깊이 아는 것이 튼튼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도 이제 새봄과 함께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라합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도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임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포함한 2장 전체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제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영접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당시 모르는 외부사람이 집에 들어왔는데 그들을 도둑으로 신고하지 않는 것만도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나라의 사람이 아니어서 도둑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신고하여 처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접합니다.
또한, 라합은 그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놀라운 행동입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자들은 라합 외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고백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믿는다고 고백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에 따라 그는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는 행동을 통해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그의 행동은 정탐군을 숨겨주고 도와준 일입니다. 이 일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정도의 행동이 아닙니다. 이미 여리고의 성은 정탐군이 왔다는 정보를 알고 왕이 이 첩자들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명령에 정탐군을 돕거나, 신고하지 않고, 거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입니다. 라합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뭔가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의 행동하는 믿음이 자기와 가족이 구원을 얻고, 특히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의 의지를 확고히 세워 행동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의 모든 기록은 한결같이 그의 행동하는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라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에 대해서는 이게 전부입니다. 단 한 줄로 기록한 라합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행동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군들을 영접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앙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인데, 여기에 믿음에 따라 행동한 사람의 예로 라합을 소개합니다. 그만큼 라합에게 있어서 행함이 무엇보다도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압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제 행동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는 다르고, 문화와 사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와 한계와 핸디캡과 역점이 많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 모든 약점을 잘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많은 약점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우뚝 선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합입니다. 사실 라합은 성경에, 특히 믿음의 전당에 오를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를 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라합을 언급합니다. 여호수아에 대해서는 여리고 사건을 강조하면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으로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인 믿음의 장에서는 모세에 이어지는 이름이 여호수아가 아니라 라합입니다. 이렇게 소개되는 것은 라합이야말로 부족함과 실수가 많지만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당시 라합이 가지고 있던 약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여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 여자가 약점이라고 말하다간 큰 코 다칠 세상입니다. 하지만 라합의 시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여자이기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을 큰 축복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약점이겠습니까? 그런데 라합은 그 약점 아닌 약점을 누구보다도 극복하여 사라와 함께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의 여권으로 선진국으로 가려면 많은 무시를 당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아무리 후진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선진국의 상식 없는 사람보다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당시에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라합에게는 큰 문제요, 고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자기와 같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이방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약점과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에게 가장 큰 약점은 기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라합의 이름 앞에 늘 꼬리뼈처럼 기생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것이 라합의 시대는 물론이고 라합이 죽은 이후, 시대가 몇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당시 라합에게는 이것이 큰 약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라합의 직업을 ‘기생’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이것은 아주 점잖은 번역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기생보다는 매춘부, 창녀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거룩한 성경과 강단에서 쓰기가 거북하고 말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입니다. 라합이 왜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의 과거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그녀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기생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과거가 있더라도 다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다가 기생이 되었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이 놀라운 믿음입니다.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꼬리표요, 그녀의 생애 무엇보다도 부담되고 힘들고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의 반열에 이름이 올랐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만이 가진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약점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허점과 약점과 핸디캡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에게 공개되고 보여지는 약점으로 노출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약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아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며 사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약점이 있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에게서 배우는 믿음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고,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점 투성이의 나를 부르셔서 강점이 돋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자신감으로, 자존감으로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약점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 부흥사경회를 갖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집회지만, 분명 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특히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갖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믿음의 기회, 아는 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기회, 그리고 약점과 문제와 장벽을 극복되는 믿음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한 주간도, 남은 생애도 라합의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예수님 시대에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가를 발견합니다. 우선, 무리들은 예수님의 기적, 표적, 이적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이적을 보기 위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인 십자가의 죽으심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보다 기적에 더 관심을 갖고 있어서 좀처럼 그들의 고정된 마음을 돌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권력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군중의 지지를 받아 유대나라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열심당이라는 당시 독립운동단체에 속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가룟유다’였습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자기 기대를 못 미치자 예수님을 배반한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얼마나 권력과 명예에 관심이 있었는지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곧 예수님이 권력을 갖게 되면 자기들을 총리와 비서실장이 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이들도 한심했지만, 이 말로 분쟁이 일어난 것은 더 큰 실망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을 모르고, 관심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관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람들을 칭찬하거나 책망한 것은 오직 믿음인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물에 빠지자 그를 건지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또한 백부장을 보면서 유대 땅에 이만한 믿음을 가진 자가 없다고 칭찬했고, 향유를 부은 여인의 믿음을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알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믿음의 씨와 성장과 믿음의 열매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결국 주님은 이런 믿음을 심어주기 위하여 오셨고, 고난을 당하시다가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은 주님처럼 ‘믿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 믿음의 씨가 심겨졌는지, 나의 믿음은 어떤 수준인지, 나는 믿음에 따르는 열매가 맺어지는지 끊임없이 나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오늘은 ‘라합’입니다. 라합은 어떤 믿음의 사람이기에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되었을까요?
첫째, 하나님을 아는 믿음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이후 땅을 정복해 가는 과정 중에 있었던 사건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장벽은 여리고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정복을 위해 두 사람의 정탐군을 성에 보냅니다. 그들은 여리고에 들어가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때 라합이 고백한 말이 본문의 시작입니다. 라합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압니다...당신들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으며, 또 당신들이 요단 강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어떻게 전멸시켜서 희생 제물로 바쳤는가 하는 소식을 우리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 간담이 서늘했고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 위에서, 과연 당신들의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라합은 먼저 이스라엘에 대하여 누군가를 통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요, 섬기고 믿어야 할 분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라합을 보면서 먼저 배우는 귀한 신앙입니다. 그의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알고, 고백한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는 지식’이라는 책에서 ‘신앙인의 삶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기록한 성경을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지 않고 믿음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믿음을 갖지 못하고,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잘못되고, 실패하고, 심판 받고, 망하게 되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몇 가지로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먼저 주님은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회개하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또한 비전이 없어도 망한다고 말합니다. 꿈과 비전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가 본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을 수 없는 법입니다. 전에 성경을 덮어놓고 믿으라고 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되는 길입니다.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에 태국을 다녀왔습니다. 우리교회에서 후원하는 김문수선교사님이 태국 북부지역의 대학도시 람빵에 선교센터를 건립하여 헌당식을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름다운 건물을 세웠습니다. 앞으로 그곳을 통해 태국에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번 방문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한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태국사람들의 무지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적인 추세이긴 합니다만 태국사람들도 좀처럼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다고 치고, 얼마 되지 않는 태국기독교인들도 책을 읽지 않고, 결국 성경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데 큰 장애가 되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경건 서적은 제쳐두고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많이 알고, 깊이 아는 것이 튼튼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가까이 하고, 읽고, 듣고,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도 이제 새봄과 함께 다시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라합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자라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은 라합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무엇보다도 행함이 뒤따르는 믿음임을 강조합니다. 본문을 포함한 2장 전체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쓰여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제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영접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당시 모르는 외부사람이 집에 들어왔는데 그들을 도둑으로 신고하지 않는 것만도 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나라의 사람이 아니어서 도둑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신고하여 처벌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접합니다.
또한, 라합은 그들에게 자기의 믿음을 고백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놀라운 행동입니다. 당시 하나님에 대해 듣고 아는 자들은 라합 외에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고백하기는 힘든 일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만, 믿는다고 고백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합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말씀에 따라 그는 하나님을 알고, 고백하는 행동을 통해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그의 행동은 정탐군을 숨겨주고 도와준 일입니다. 이 일은 단순히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정도의 행동이 아닙니다. 이미 여리고의 성은 정탐군이 왔다는 정보를 알고 왕이 이 첩자들을 잡으라고 명령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누구라도 이런 명령에 정탐군을 돕거나, 신고하지 않고, 거역하면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입니다. 라합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고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야말로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두려움 없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가 뭔가 확신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결국 이런 그의 행동하는 믿음이 자기와 가족이 구원을 얻고, 특히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예를 얻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믿음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아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의 의지를 확고히 세워 행동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그의 모든 기록은 한결같이 그의 행동하는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라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 라합에 대해서는 이게 전부입니다. 단 한 줄로 기록한 라합의 믿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행동입니다.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군들을 영접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의 행동하는 믿음에 대해 야고보서는 이렇게 강조하는 것을 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야고보서는 믿음에 따르는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신앙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성경인데, 여기에 믿음에 따라 행동한 사람의 예로 라합을 소개합니다. 그만큼 라합에게 있어서 행함이 무엇보다도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의 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행동입니다. 우리가 성경과 하나님을 잘 압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행동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행함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이제 행동의 믿음으로 열매를 맺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약점을 극복하는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믿음의 사람들은 결코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는 다르고, 문화와 사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엘리야를 소개하면서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사람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와 한계와 핸디캡과 역점이 많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은 그 모든 약점을 잘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많은 약점을 극복하며 믿음으로 우뚝 선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라합입니다. 사실 라합은 성경에, 특히 믿음의 전당에 오를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놀라운 것은 여기에서 모세에 이어 여호수아를 소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라합을 언급합니다. 여호수아에 대해서는 여리고 사건을 강조하면서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전체의 믿음으로 말합니다. 히브리서 11장인 믿음의 장에서는 모세에 이어지는 이름이 여호수아가 아니라 라합입니다. 이렇게 소개되는 것은 라합이야말로 부족함과 실수가 많지만 그것을 극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당시 라합이 가지고 있던 약점이 무엇이었을까요? 우선, 여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은 물론 다릅니다. 여자가 약점이라고 말하다간 큰 코 다칠 세상입니다. 하지만 라합의 시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여자이기에 힘든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난 것을 큰 축복으로 믿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여자라는 것이 얼마나 큰 약점이겠습니까? 그런데 라합은 그 약점 아닌 약점을 누구보다도 극복하여 사라와 함께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이었다는 것이 큰 약점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이방인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후진국의 여권으로 선진국으로 가려면 많은 무시를 당하는 과정을 통과해야 됩니다. 아무리 후진국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도 선진국의 상식 없는 사람보다도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당시에 이방인이라는 딱지가 라합에게는 큰 문제요, 고민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아도 자기와 같은 이방인에게 구원이 임하고,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복할 때 이방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살려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기가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약점과 핸디캡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라합에게 가장 큰 약점은 기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라합의 이름 앞에 늘 꼬리뼈처럼 기생이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것이 라합의 시대는 물론이고 라합이 죽은 이후, 시대가 몇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봅니다. 그만큼 당시 라합에게는 이것이 큰 약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라합의 직업을 ‘기생’이라고 번역합니다만 이것은 아주 점잖은 번역입니다. 실제로 라합은 기생보다는 매춘부, 창녀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거룩한 성경과 강단에서 쓰기가 거북하고 말하기도 꺼려지는 사람입니다. 라합이 왜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그녀의 과거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그녀가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기생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추하고 더러운 과거가 있더라도 다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 라합은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살다가 기생이 되었고, 사회에서 버림받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고, 나같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것이 놀라운 믿음입니다. 어쩌면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꼬리표요, 그녀의 생애 무엇보다도 부담되고 힘들고 극복하기 힘든 약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의 반열에 이름이 올랐고,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약점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나만이 가진 장점이 많은 사람들이지만, 동시에 약점도 많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허점과 약점과 핸디캡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가진 약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사람에게 공개되고 보여지는 약점으로 노출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약점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모르는 나만이 아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몸부림치고, 눈물 흘리며 사는 것이 나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약점이 있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에게서 배우는 믿음입니다. 나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고,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 이런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약점 투성이의 나를 부르셔서 강점이 돋보이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을 알고 하나님께 나를 맡기고, 자신감으로, 자존감으로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약점은 극복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꼭 가지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 부흥사경회를 갖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집회지만, 분명 내 생애 다시 오지 않을 기회입니다. 특히 라합과 같은 믿음을 갖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믿음의 기회, 아는 대로 행동하는 믿음의 기회, 그리고 약점과 문제와 장벽을 극복되는 믿음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꼭 참여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한 주간도, 남은 생애도 라합의 믿음으로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서해원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