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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신하의 믿음 (요한복음 4:46~54)
지난 주간에 저는 선교사님 한 분을 비롯한 몇 사람들을 접견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결같이 자기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 상담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연속적으로 고통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겪는 문제들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안 당하면 안 되는 불가피한 문제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또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이 시련이요 고통이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문제를 겪지만 그 문제 때문에 우리의 인생살이가 더 풍요해지고 축복이 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에 직면한 아버지
본문에 왕의 신하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의 눈으로 보아도 곧 죽어가는 아들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투병을 했겠지만, 이제 아버지가 볼 때는 이 아이가 가망이 없습니다. 곧 죽어가는 그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그 부모라면 오늘 이 자리에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가정에서 겪는 최고의 절박한 위기가 가족이 병들어 죽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 문제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오면 그 고통에 얽매이게 됩니다. ‘아! 힘들다. 나는 왜 이런 일을 겪는가? 왜 우리 집은 이런 일을 겪는가? 실망스럽다.’ 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문제 자체에 얽매이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에스더 같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본 사람들입니다. 어쩔 수 없는 벼랑의 위기에 서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당할 때 그것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해결방안 중심으로 항상 문제를 보아야 됩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답이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대하여 능히 해결책을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책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해결책을 간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아버지를 봅시다. 아들이 병들어 죽어갑니다. 절망뿐입니다. 위기입니다. 어떻게 할 방안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로 귀족입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아들을 향하여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이 아버지는 예수님이 계시는 가나에 까지 약 15km를 찾아가서 예수님 앞에 간청을 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아버지는 체면을 불구하고 예수님께 가서 강청을 했습니다. 이 문맥의 내용을 보면 그냥 가벼운 자세로 강청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엎드려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저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기 전에 우리 집에 내려 오셔서 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왕의 신하의 자세에 큰 복음적 교훈을 담고 계십니다.
믿음의 시작
믿음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합니까? 문제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싫어하고, 위기를 싫어하고, 실패를 싫어하고, 질병을 싫어하지만 인간에게 질병과 고통이 없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다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생각을 안 합니다. 신앙의 동기부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고통이 없으면 창조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간 동기가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절망에서부터 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동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이 사람은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가나에 오시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을 사람인데, 아들이 죽어가는 위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나에 오신다는 그 소문에 그는 승부를 걸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습니까? 나를 억압하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거기에 믿음의 동기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동기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아주 마음조리는 일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내가 저런 일들을 당해도 얼마나 마음조릴까?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고통당하는 것, 마음조리는 것, 절망하는 것, 위기를 당하는 그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믿게 하려고 일부러 절망을 허용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절망할 수밖에 없고, 좌절을 당하고, 실패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질고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 주의할 것은 절망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절망에 빠져 버리면 안 됩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절망하면 안 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는 출발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37편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고 기뻐하시나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절망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의 출발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아버지는 그 믿음이 보잘 것 없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간 믿음입니다. 소문을 듣고 오는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도를 받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오는 게 아닙니다. 소문을 듣고 옵니다. 우리 교회의 소문을 듣고 옵니다. 우리의 전도를 듣고 오는 것은 소문을 듣고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소문을 듣고 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들려 주십시오. 전도의 동기가 일어나도록 소문을 들려주어야 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예수께로 왔습니다. 이런 믿음은 보잘 것 없는 믿음입니다. 유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을 다시 떠나가기 쉬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믿음을 순수하게 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기어코 자기 집에 오시라고 권유합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셔도 아들이 고쳐지는 것을 믿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 기어코 모시고 가서 주여!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믿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초보 믿음입니다.
믿음의 본질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만일 너희 믿음이 겨자씨 만큼 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답을 주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믿음이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어디나 경험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믿음이 큰 사람이고, 처음 나온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분량을 보면, 믿음이 큰 사람과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구분이 됩니다. 사람은 믿음을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 하나님이 산을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옮긴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산을 옮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하나님이 감동하는 믿음, 그 믿음 가지기를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로 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하는 믿음이라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상당히 순수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강청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파격적입니다. 5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선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우리에게 더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올 때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갈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믿음이 커졌습니다. 믿음의 씨는 말씀입니다. 소문은 믿음의 동기를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씨는 말씀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진단 자체가 치료가 아닙니다. 진단은 진단이고 치료는 치료입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의사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는 환자는 아무리 좋은 진단을 받아도 치료의 길이 없습니다. 문제 해결은 말씀을 받고 순종을 해야 됩니다. 이 아버지는 믿고 갔습니다. 예배당에 올 때는 소문을 듣고 오더라도 갈 때는 말씀을 붙잡고 가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며 사십시오. 거기에 아들이 낫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고 가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다가 하인을 만났습니다. 하인이 보고합니다. 주인의 아들이 살았다고! 언제 살았는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까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던 그 순간에 살아난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는 그 시에 가버나움에 있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간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을 살리는 기적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문을 듣고 온 이 아버지의 신앙의 동기를 살려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절망과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이 신호를 주셨는데도, 아직도 믿음의 스타트가 안 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호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문제를 주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에게로 출발하라는 신호입니다. 그 순수한 출발이 우리 가운데 늘 일어나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 믿음의 씨가 됩니다. 주님께 나아와 부르짖는 기도가 믿음의 씨가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믿음, 그것은 순수합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할 때 “주님! 어찌 그렇게 말씀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씀합니까? 저는 절박합니다. 제발 우리 집에 한번 걸음하셔서 아들 한번 살려주십시오.” 이게 보통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고 가야 되는데 거기에 변명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설명이 붙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 불신앙의 거품을 거두어 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거품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는 스타벅스 커피가 있습니다. 카페라떼 라는 커피는 작은 잔인데 가격이 3,800원이었습니다. 커피 한잔이 3,800원이면 귀족 커피입니다.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3,800원하는 카페라떼가 영국에서는 2,900원, 일본에서는 2,800원, 싱가폴에서는 2,600원, 미국에서는 2,200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3,800원에 팔립니다. 이것이 평균 커피 한잔에 1,000원이 더 비싼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박리다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윤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에 ‘후리소매’라는 게 있습니다. 이윤을 많이 남기면서 적게 파는 전략입니다. 어느 경제학교수에 의하면, 카페라떼를 2,000원대로 가격을 매기니까 매상이 더 안 오른다는 것입니다. 이 가격을 높여서 고급화의 이미지를 부여하니까 더 팔린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입니다. 이 한반도가 지금 이상한 나라입니다. 실제로 이건 실험된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서 이 커피값을 3,000원대로 올리니까 매상이 안 오른다는 것입니다. 커피 한잔에 25~30%의 거품이 지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지금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집값이 거품 집값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6개월 사이에 보통 아파트가 다 1억씩 올랐습니다. 이 지구촌에 그런 나라가 한 나라도 없습니다. 여러분, 광고를 어느 선까지 믿어야 됩니까? ‘25%가 거품’이라는 이 개념, 우리 음식에 불순물이 25%가 들어 있으면 못 먹는 것입니다. 건축 자재에 불량품이 25%가 섞여 있으면 이 건축자재는 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이 말속에 25%가 거짓말이 섞이면, 그 말은 못 믿는 것입니다. 광고의 25%가 거짓말이라면, 그 광고는 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상한 거품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카메라를 하나 사왔는데, 제일 좋은 카메라입니다. 소형 디지털 카메라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니까 한국으로 사는 것보다 한 20여만원 헐합니다. 물론 세금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세금을 물고 팝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도 해도 지금 너무 합니다. 고급화 전략을 안 하면, 이 백성들은 설득을 안 당합니다. 2,000원 짜리라 해도 그것을 믿고 사야 하는데 ‘3000원 짜리도 있던데…’라는 이런 의식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습니다. 경제학자의 고민은 저의 고민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저도 조금 고민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목사의 눈으로 볼 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인의 눈에도 거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주어야 되는가? 신앙고백을 어디까지 믿어 주어야 되는가? 기도를 어디까지 믿어 주어야 되는가? 믿음이 좋은 사람 같아서 같이 일 좀 하자고 하면, 믿음이 안 보입니다. 거품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거품을 거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만 필요합니다. 그런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해도 가능합니다. 태산 같은 믿음이라도 거품이 끼여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왕의 신하의 믿음은 아들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믿음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말씀을 믿고 순종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있는 환경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의식화되고 물이 들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마저 말 거품이 끼고 행동에 거품이 끼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가 이 사회에 거품을 거두어 내는 역할을 하겠습니까? 정치가들이, 교육가들이, 군인들이, 기업가들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공동체 속에 심각한 거품이 이미 고착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 무슨 기대를 건다는 말입니까? 오직 기대를 걸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거품을 거두고 하나님이 붙잡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 때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설 때만이, 이 왕의 신하의 믿음처럼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 때만이 교회도, 사회도 희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2007년에 한국교회 부흥은 외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품을 거두어 내면 부흥의 역사는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지난 주간에 저는 선교사님 한 분을 비롯한 몇 사람들을 접견하고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결같이 자기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서로 상담을 했습니다. 사람마다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연속적으로 고통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겪는 문제들은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피할 수도 없습니다. 안 당하면 안 되는 불가피한 문제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고, 또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것이 시련이요 고통이요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다 문제를 겪지만 그 문제 때문에 우리의 인생살이가 더 풍요해지고 축복이 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문제에 직면한 아버지
본문에 왕의 신하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로서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없습니다. 지금 이 아들은 아버지의 눈으로 보아도 곧 죽어가는 아들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투병을 했겠지만, 이제 아버지가 볼 때는 이 아이가 가망이 없습니다. 곧 죽어가는 그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그 부모라면 오늘 이 자리에 예배를 드릴 수가 있을까? 가정에서 겪는 최고의 절박한 위기가 가족이 병들어 죽어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를 만날 때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 문제만 너무 집착하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이 오면 그 고통에 얽매이게 됩니다. ‘아! 힘들다. 나는 왜 이런 일을 겪는가? 왜 우리 집은 이런 일을 겪는가? 실망스럽다.’ 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그렇게 문제 자체에 얽매이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요셉이나 에스더 같은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도 다 인생의 벼랑 끝에 서 본 사람들입니다. 어쩔 수 없는 벼랑의 위기에 서서 이 사람들이 어떻게 그 위기를 극복했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를 당할 때 그것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머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해결방안 중심으로 항상 문제를 보아야 됩니다. 인간의 편에서는 답이 없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해결책이 없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이 당하는 모든 고통에 대하여 능히 해결책을 갖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책을 갖고 계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해결책을 간구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 아버지를 봅시다. 아들이 병들어 죽어갑니다. 절망뿐입니다. 위기입니다. 어떻게 할 방안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왕의 신하로 귀족입니다. 권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아들을 향하여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이 아버지는 예수님이 계시는 가나에 까지 약 15km를 찾아가서 예수님 앞에 간청을 하게 됩니다. 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아버지는 체면을 불구하고 예수님께 가서 강청을 했습니다. 이 문맥의 내용을 보면 그냥 가벼운 자세로 강청한 것이 아닙니다. 이건 엎드려 무릎을 꿇고 “주여!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저가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기 전에 우리 집에 내려 오셔서 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옵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왕의 신하의 자세에 큰 복음적 교훈을 담고 계십니다.
믿음의 시작
믿음은 어디서부터 시작을 합니까? 문제로부터 믿음이 시작됩니다. 인간들이 고통을 싫어하고, 위기를 싫어하고, 실패를 싫어하고, 질병을 싫어하지만 인간에게 질병과 고통이 없고, 모든 일이 만사형통하다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생각을 안 합니다. 신앙의 동기부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죄성은 고통이 없으면 창조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간 동기가 무엇입니까? 절망입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절망에서부터 이 아버지가 예수님을 찾아가는 동기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달려갔습니다. 이 사람은 아들이 병들어 죽어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가나에 오시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을 사람인데, 아들이 죽어가는 위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나에 오신다는 그 소문에 그는 승부를 걸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고통스러운 문제가 있습니까? 나를 억압하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까? 거기에 믿음의 동기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동기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는 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아주 마음조리는 일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내가 저런 일들을 당해도 얼마나 마음조릴까? 무겁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고통당하는 것, 마음조리는 것, 절망하는 것, 위기를 당하는 그것을 즐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즐기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믿게 하려고 일부러 절망을 허용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도 절망할 수밖에 없고, 좌절을 당하고, 실패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질고를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거기서 주의할 것은 절망을 선택하면 안 됩니다. 절망에 빠져 버리면 안 됩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절망하면 안 됩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는 출발이 일어나야 합니다.
시편 37편 2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고 기뻐하시나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절망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의지할 줄 아는 믿음의 출발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아버지는 그 믿음이 보잘 것 없습니다. 이 사람의 믿음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로 간 믿음입니다. 소문을 듣고 오는 믿음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전도를 받아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오는 게 아닙니다. 소문을 듣고 옵니다. 우리 교회의 소문을 듣고 옵니다. 우리의 전도를 듣고 오는 것은 소문을 듣고 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소문을 듣고 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들려 주십시오. 전도의 동기가 일어나도록 소문을 들려주어야 됩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은 예수께로 왔습니다. 이런 믿음은 보잘 것 없는 믿음입니다. 유치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예수님을 다시 떠나가기 쉬운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믿음을 순수하게 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기어코 자기 집에 오시라고 권유합니다. 이 자리에서 말씀만 하셔도 아들이 고쳐지는 것을 믿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에 기어코 모시고 가서 주여!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람의 믿음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는 초보 믿음입니다.
믿음의 본질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만일 너희 믿음이 겨자씨 만큼 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리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답을 주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믿음이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어디나 경험적인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믿음이 큰 사람이고, 처음 나온 사람은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분량을 보면, 믿음이 큰 사람과 믿음이 적은 사람으로 구분이 됩니다. 사람은 믿음을 그렇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믿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 하나님이 산을 옮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을 옮긴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산을 옮기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하나님이 감동하는 믿음, 그 믿음 가지기를 예수님이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평가로 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감동하는 믿음이라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본질의 문제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상당히 순수합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강청하고 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파격적입니다. 5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시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에게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선언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이 우리에게 더 중요합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의 신앙을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올 때 소문을 듣고 왔습니다. 갈 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믿음이 커졌습니다. 믿음의 씨는 말씀입니다. 소문은 믿음의 동기를 일으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씨는 말씀을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거기에 문제의 해결이 있는 것입니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진단 자체가 치료가 아닙니다. 진단은 진단이고 치료는 치료입니다. 의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해야 됩니다. 의사의 말대로 순종하지 않는 환자는 아무리 좋은 진단을 받아도 치료의 길이 없습니다. 문제 해결은 말씀을 받고 순종을 해야 됩니다. 이 아버지는 믿고 갔습니다. 예배당에 올 때는 소문을 듣고 오더라도 갈 때는 말씀을 붙잡고 가십시오, 그리고 순종하며 사십시오. 거기에 아들이 낫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고 가야 기적이 일어납니다. 가다가 하인을 만났습니다. 하인이 보고합니다. 주인의 아들이 살았다고! 언제 살았는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까 주님께서 “가라!”고 말씀하시던 그 순간에 살아난 것입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는 그 시에 가버나움에 있던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것을 믿고 간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을 살리는 기적으로 역사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소문을 듣고 온 이 아버지의 신앙의 동기를 살려가야 합니다. 우리에게 절망과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을 하나님께로 가는 출발점으로 삼아야 됩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이 신호를 주셨는데도, 아직도 믿음의 스타트가 안 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호를 주십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문제를 주십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에게로 출발하라는 신호입니다. 그 순수한 출발이 우리 가운데 늘 일어나야 합니다. 문제를 가지고 주 앞에 나아오는 것이 믿음의 씨가 됩니다. 주님께 나아와 부르짖는 기도가 믿음의 씨가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고 순종하는 믿음, 그것은 순수합니다.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주님이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고 할 때 “주님! 어찌 그렇게 말씀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씀합니까? 저는 절박합니다. 제발 우리 집에 한번 걸음하셔서 아들 한번 살려주십시오.” 이게 보통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고 가야 되는데 거기에 변명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설명이 붙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 불신앙의 거품을 거두어 내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거품
우리나라에서 잘 팔리는 스타벅스 커피가 있습니다. 카페라떼 라는 커피는 작은 잔인데 가격이 3,800원이었습니다. 커피 한잔이 3,800원이면 귀족 커피입니다. 엄청나게 비싼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3,800원하는 카페라떼가 영국에서는 2,900원, 일본에서는 2,800원, 싱가폴에서는 2,600원, 미국에서는 2,200원인데, 우리나라에서는 3,800원에 팔립니다. 이것이 평균 커피 한잔에 1,000원이 더 비싼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박리다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윤을 적게 남기고 많이 파는 것입니다. 그 반대말에 ‘후리소매’라는 게 있습니다. 이윤을 많이 남기면서 적게 파는 전략입니다. 어느 경제학교수에 의하면, 카페라떼를 2,000원대로 가격을 매기니까 매상이 더 안 오른다는 것입니다. 이 가격을 높여서 고급화의 이미지를 부여하니까 더 팔린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입니다. 이 한반도가 지금 이상한 나라입니다. 실제로 이건 실험된 것이라고 합니다. 선진국에서 이 커피값을 3,000원대로 올리니까 매상이 안 오른다는 것입니다. 커피 한잔에 25~30%의 거품이 지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의 고민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회 전체가 지금 거품이 끼어 있다는 것입니다. 집값이 거품 집값이라고 많이 말합니다. 6개월 사이에 보통 아파트가 다 1억씩 올랐습니다. 이 지구촌에 그런 나라가 한 나라도 없습니다. 여러분, 광고를 어느 선까지 믿어야 됩니까? ‘25%가 거품’이라는 이 개념, 우리 음식에 불순물이 25%가 들어 있으면 못 먹는 것입니다. 건축 자재에 불량품이 25%가 섞여 있으면 이 건축자재는 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이 말속에 25%가 거짓말이 섞이면, 그 말은 못 믿는 것입니다. 광고의 25%가 거짓말이라면, 그 광고는 못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상한 거품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일본에서 카메라를 하나 사왔는데, 제일 좋은 카메라입니다. 소형 디지털 카메라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계산하니까 한국으로 사는 것보다 한 20여만원 헐합니다. 물론 세금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들도 세금을 물고 팝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해도 해도 지금 너무 합니다. 고급화 전략을 안 하면, 이 백성들은 설득을 안 당합니다. 2,000원 짜리라 해도 그것을 믿고 사야 하는데 ‘3000원 짜리도 있던데…’라는 이런 의식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습니다. 경제학자의 고민은 저의 고민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저도 조금 고민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목사의 눈으로 볼 때에도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인의 눈에도 거품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주어야 되는가? 신앙고백을 어디까지 믿어 주어야 되는가? 기도를 어디까지 믿어 주어야 되는가? 믿음이 좋은 사람 같아서 같이 일 좀 하자고 하면, 믿음이 안 보입니다. 거품이 너무 많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거품을 거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믿음만 필요합니다. 그런 믿음은 겨자씨 한 알만 해도 가능합니다. 태산 같은 믿음이라도 거품이 끼여 있으면, 하나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맺는 말
왕의 신하의 믿음은 아들을 살려내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난 믿음입니다. 이 사람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말씀을 믿고 순종한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있는 환경을 교회 안에 끌어들이면 안 됩니다. 교회 안에 의식화되고 물이 들면 안 됩니다. 우리 성도들마저 말 거품이 끼고 행동에 거품이 끼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누가 이 사회에 거품을 거두어 내는 역할을 하겠습니까? 정치가들이, 교육가들이, 군인들이, 기업가들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공동체 속에 심각한 거품이 이미 고착이 되어 있는 그들에게 무슨 기대를 건다는 말입니까? 오직 기대를 걸 곳은 교회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거품을 거두고 하나님이 붙잡아 역사하는 믿음으로 살 때만이, 우리가 믿음으로 설 때만이, 이 왕의 신하의 믿음처럼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 때만이 교회도, 사회도 희망이 있을 줄 믿습니다. 2007년에 한국교회 부흥은 외형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거품을 거두어 내면 부흥의 역사는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