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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일 5:1-10)
설교/박조준목사
사도 요한은 그 동안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해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요한일서 5장에서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본체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전에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줍니다. 하나님과 내가 믿음을 통해서 연결될 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수도 파이프와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수도 파이프를 하나님의 생명수 샘에 연결할 때 이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생명수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선과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전선을 하나님의 생명의 빛에 연결할 때 우리의 전등에는 밝은 빛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는데, 그때는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공생애를 결산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가셔야 할 때가 임박해 오는 것을 보시면서 3년 동안 제자들에게 훈련시키셨던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 하는 사실보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멸망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1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고 직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인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옛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본래 그 나라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는 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나라만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라고 해서 신정국가(神政國家)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자기들도 왕을 세워 달라고 해서 처음으로 세운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해서 왕을 세웠지만 사울 왕으로 만족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지평선에 하나님이 부어 주셔서 세우실 진정한 왕, 공평과 정의와 그리고 완전한 질서로 우리를 통치해 줄 수 있는 참된 왕이 그 어느 날 나타나기를 몹시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는 말에는 왕을 기다린다고 하는 고백이 무엇보다 먼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직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리의 전달자,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많은 가짜 선지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가짜에게 속으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역사 속에 언젠가 나타날 진정한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일은 모든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담당하고 해결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의 해결자로 등장한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아 나타날 참된 제사장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은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구세주를 기다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고백은,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잘 복종하고,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잘 배우고,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그에게 모든 짐을 위탁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릴 나의 왕, 공평과 정의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통치하고 다스려 주실 수 있는 나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든 진리로 가르치시고 온전한 진리 가운데 나를 인도하실 수 있는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고백입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응답하지 못한 사람은 교인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할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메시지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1-2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 이하를 보세요. “그가(예수)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아버지를 변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다른 형제들과 형제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형제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읽다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 의심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하기를 속히 하며, 형제를 변호하기를 속히 하며, 공격하기를 더디 하고, 보호하기를 속히 하며, 잘못하기를 더디 하고, 덮어주기를 속히 하고 노출하기를 더디 하고, 감사하기를 속히 하고 불평하기를 더디 하며, 돕기를 속히 하고 요구하기를 더디 하고, 용서를 속히 하며 방해를 더디 하고, 격려하기를 속히 하며 책망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글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참 믿음을 가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같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믿음을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 이것은 하나님과 사이에 영원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만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잘 순종하고 있습니까? 바람, 폭풍우, 눈보라까지도 모든 궤도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며 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편 148편 8절에 “물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제일 불순종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이 제일 말을 안 듣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한탄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6장 5-7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었으면 인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이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어떠했는데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1-24)라고 했습니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를 제외한 파도나 박넝쿨, 심지어 벌레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가 자유의지가 아닙니까? 이 자유의지를 바로 사용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 이상의 축복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여 범죄하면 미물인 곤충이나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지시대로 살면 정말 사람답게 존귀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지시를 무시하게 되면 그 양심이 타락하고 가치판단이 전도되고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종교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되면 나무나 우상을 섬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존귀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때는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1-3절에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4-5절에서는 믿음의 승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5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명령의 짐을 가볍게 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명령을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기꺼이 순종합니다. 사랑의 감격은 모든 명령의 짐을 가볍게 승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던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봉사하면 그 봉사가 재미가 있습니다.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는 봉사가 됩니다. 교회의 봉사도 억지로 하면 율법적인 봉사로, 사랑이 없는 봉사로, 짜증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수고는 하지만 힘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실이 없다면, 거듭난 체험이 없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이 없다면, 신앙의 승리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 중생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기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란 말이 스물세 번이나 나옵니다. 세상이란 말은 물리적인 지구, 인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그런 세상을 우리는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합니다. 자연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뭐랬어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사단에 의해서 잘못된 영향을 받아 악으로 물든 이 지상의 모든 것, 그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세상과 짝하게 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같이 전도하다가 바울 곁을 떠났는데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마귀에게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이깁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과 5절에 보면 “이겼다”라는 말과 “이겨야 한다”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이겼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고서도 패잔병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 어떤 제대군인 한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링컨은 나와 같이 싸우면서 자라난 가장 친한 친구다”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그는 점점 생활과 행동이 불량해졌고 타락해 갔습니다.
그 날도 이 사람이 계속 자기는 아브라함 링컨의 친구라고 소리치자 이 소리를 듣기 싫어했던 한 사람이 “그러면 링컨과 친한 사실을 증명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링컨으로부터 온 편지 한 장을 내보였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연금 증명서로 링컨의 사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문맹자여서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 연금 증명서를 사용해서 한 번도 연금을 받아보지 못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몰라서 생기는 비극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했고, 축복이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신앙의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승리는 했지만 지금도 계속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패잔병에게 받는 공격이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는 패했습니다. 그러나 패잔병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패잔병을 얕보다가 큰 공격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계속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유도하며, 공격해 오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리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요한이 맨 마지막 부분에 항상 “이기는 자에게는”이라고 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깁니까?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줍니다. 그 믿음은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애굽땅 바로의 손아귀에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인에게 마지막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그 피를 볼 때 넘어가리라”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원의 처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피를 발랐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땅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습니다.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나와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끝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애굽땅에서 나오던 때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마다 행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비극이 옛날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 속에서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계속되고,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어려움을 헤치고 일어서야 하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 형편 속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물로 물과 피와 성령이 나옵니다.
첫째가 물입니다. 여기에도 몇 가지 해석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셨을 때 옆구리에서 나온 그 물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피와 성령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물도 문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그 사실을 입증해 주셨던 그 순간이 공적인 사역의 출발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둘째는 피입니다. 메시야의 마지막 사역은 피의 증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골고다에 흘리신 그 피, 이 피로 그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신 구주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이 보혈이 그 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완성적 사건이 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40일만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 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의 최대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설교/박조준목사
사도 요한은 그 동안 빛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우리가 빛 가운데 거해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요한일서 5장에서는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본체십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가 있습니까? 믿음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전에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나를 연결시켜 줍니다. 하나님과 내가 믿음을 통해서 연결될 때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믿음은 수도 파이프와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수도 파이프를 하나님의 생명수 샘에 연결할 때 이 믿음의 파이프를 통해서 생명수가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선과도 같습니다. 이 믿음의 전선을 하나님의 생명의 빛에 연결할 때 우리의 전등에는 밝은 빛이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믿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의 핵심입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는데, 그때는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지상의 공생애를 결산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가셔야 할 때가 임박해 오는 것을 보시면서 3년 동안 제자들에게 훈련시키셨던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제자들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고 합니다.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합니다. 더러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얼른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나 하는 사실보다 “예수님은 누구이신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영생이고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멸망입니다.
요한복음 3장 17-18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이 아니고 직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인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옛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본래 그 나라에는 왕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렸습니다.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는 왕이 있었는데 이스라엘 나라만 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라고 해서 신정국가(神政國家)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자기들도 왕을 세워 달라고 해서 처음으로 세운 왕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해서 왕을 세웠지만 사울 왕으로 만족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의 지평선에 하나님이 부어 주셔서 세우실 진정한 왕, 공평과 정의와 그리고 완전한 질서로 우리를 통치해 줄 수 있는 참된 왕이 그 어느 날 나타나기를 몹시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는 말에는 왕을 기다린다고 하는 고백이 무엇보다 먼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아서 백성들에게 선포하는 직임을 갖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진리의 전달자,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많은 가짜 선지자, 거짓 선지자가 일어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가짜에게 속으면서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역사 속에 언젠가 나타날 진정한 선지자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사장의 일은 모든 백성들의 모든 문제를 도맡아 담당하고 해결해 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문제의 해결자로 등장한 사람이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은 모든 다른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어느 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세움을 받아 나타날 참된 제사장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약 시대에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은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의 직분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있는 구세주를 기다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하는 고백은,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서 잘 복종하고, 선지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잘 배우고, 제사장 되시는 예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그에게 모든 짐을 위탁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스릴 나의 왕, 공평과 정의와 완전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를 통치하고 다스려 주실 수 있는 나의 왕으로서의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메시야로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모든 진리로 가르치시고 온전한 진리 가운데 나를 인도하실 수 있는 선지자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고백입니다.
평생을 교회에 다녀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응답하지 못한 사람은 교인이라고는 말할 수 있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 5장 42절에 보면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전도할 때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고 고백했는데 여기에 기독교의 모든 메시지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1-2절 말씀을 보세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 이하를 보세요. “그가(예수)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아버지를 변호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다른 형제들과 형제 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주 안에서 형제된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13장 34-35절을 읽다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 의심하기를 더디 하고 사랑하기를 속히 하며, 형제를 변호하기를 속히 하며, 공격하기를 더디 하고, 보호하기를 속히 하며, 잘못하기를 더디 하고, 덮어주기를 속히 하고 노출하기를 더디 하고, 감사하기를 속히 하고 불평하기를 더디 하며, 돕기를 속히 하고 요구하기를 더디 하고, 용서를 속히 하며 방해를 더디 하고, 격려하기를 속히 하며 책망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글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참 믿음을 가지면 주님을 사랑하는 같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 자신의 근본적인 믿음을 의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은 아닙니까? 우리 스스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 이것은 하나님과 사이에 영원한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만물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명령 앞에 잘 순종하고 있습니까? 바람, 폭풍우, 눈보라까지도 모든 궤도들이 질서 있게 움직이며 순종하고 있지 않습니까? 시편 148편 8절에 “물과 우박과 눈과 안개와 그 말씀을 좇는 광풍이여”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가운데 제일 불순종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물 가운데 최고의 걸작품인 인간이 제일 말을 안 듣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한탄하신 대목이 나옵니다.
창세기 6장 5-7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에 괴로움을 주었으면 인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실 정도이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이 어떠했는데요?
로마서 1장에 보면 인간의 타락상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롬 1:21-24)라고 했습니다.
요나서에 보면 요나가 하나님의 사람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요나를 제외한 파도나 박넝쿨, 심지어 벌레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 가운데 하나가 자유의지가 아닙니까? 이 자유의지를 바로 사용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 이상의 축복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여 범죄하면 미물인 곤충이나 짐승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양심의 지시대로 살면 정말 사람답게 존귀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지시를 무시하게 되면 그 양심이 타락하고 가치판단이 전도되고 양심이 화인을 맞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종교성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되면 나무나 우상을 섬기는 존재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존귀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될 때는 짐승보다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1-3절에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4-5절에서는 믿음의 승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5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랑은 명령의 짐을 가볍게 합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의 명령을 부담 없이, 자발적으로, 자원해서 기꺼이 순종합니다. 사랑의 감격은 모든 명령의 짐을 가볍게 승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창세기 29장 20절에 보면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고 했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던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므로 봉사하면 그 봉사가 재미가 있습니다.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는 봉사가 됩니다. 교회의 봉사도 억지로 하면 율법적인 봉사로, 사랑이 없는 봉사로, 짜증스럽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의 일을 하게 되면 수고는 하지만 힘든 줄을 모릅니다. 그러므로 계명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을 누가 이깁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실이 없다면, 거듭난 체험이 없다면,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이 없다면, 신앙의 승리는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 중생한 사람만이 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여기 “세상을 이긴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란 말이 스물세 번이나 나옵니다. 세상이란 말은 물리적인 지구, 인류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과 같은 경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 그런 세상을 우리는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해야 합니다. 자연도 사랑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 뭐랬어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사단에 의해서 잘못된 영향을 받아 악으로 물든 이 지상의 모든 것, 그런 세상을 본받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세상과 짝하게 되면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말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같이 전도하다가 바울 곁을 떠났는데 “이 세상을 사랑하여 데마는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처럼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마귀에게 승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 이깁니까?
오늘 주신 말씀 4절과 5절에 보면 “이겼다”라는 말과 “이겨야 한다”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인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그 순간 우리는 이겼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고서도 패잔병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 어떤 제대군인 한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고 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링컨은 나와 같이 싸우면서 자라난 가장 친한 친구다”라고 떠들고 다니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게 되자 그는 점점 생활과 행동이 불량해졌고 타락해 갔습니다.
그 날도 이 사람이 계속 자기는 아브라함 링컨의 친구라고 소리치자 이 소리를 듣기 싫어했던 한 사람이 “그러면 링컨과 친한 사실을 증명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링컨으로부터 온 편지 한 장을 내보였습니다. 그래서 봤더니 연금 증명서로 링컨의 사인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문맹자여서 글을 몰랐기 때문에 그 연금 증명서를 사용해서 한 번도 연금을 받아보지 못하고 지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몰라서 생기는 비극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승리했고, 축복이 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놀라운 신앙의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고 인생의 패배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승리는 했지만 지금도 계속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미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끔 패잔병에게 받는 공격이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마귀는 패했습니다. 그러나 패잔병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패잔병을 얕보다가 큰 공격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계속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를 유혹하고, 믿음에서 떨어지도록 유도하며, 공격해 오는 사단의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그의 제자 베드로에게 경고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승리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해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 요한이 맨 마지막 부분에 항상 “이기는 자에게는”이라고 쓴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기는 자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깁니까?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해 줍니다. 그 믿음은 최초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랜 세월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애굽땅 바로의 손아귀에서 나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인에게 마지막 심판을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면 “그 피를 볼 때 넘어가리라”고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원의 처방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피를 발랐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땅에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했습니다.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끌고 나와 우리를 죽이려 하느냐?”라고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그들의 원망은 끝없이 계속되었습니다. 애굽땅에서 나오던 때 하나님을 믿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마다 행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비극이 옛날 애굽을 떠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백성들의 생애 속에서도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앙인의 불신앙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계속되고, 믿음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항상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어려움을 헤치고 일어서야 하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위기 상황, 형편 속에서 계속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믿음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한 증거물로 물과 피와 성령이 나옵니다.
첫째가 물입니다. 여기에도 몇 가지 해석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창에 찔리셨을 때 옆구리에서 나온 그 물을 의미한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피와 성령이 문자적인 것이라면 물도 문자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요단강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그 사실을 입증해 주셨던 그 순간이 공적인 사역의 출발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세주로서, 메시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받으셨습니다.
둘째는 피입니다. 메시야의 마지막 사역은 피의 증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골고다에 흘리신 그 피, 이 피로 그 속죄의 사역을 완성하신 구주임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이 보혈이 그 분이 메시야라는 사실에 관한 증거를 제시해 주는 완성적 사건이 된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40일만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 때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의 최대의 사역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 증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기고,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