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의 다리  (약2장14-26)

믿음이 현실과 연결되게 하라

우리는 분명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이기에 성경이 말씀하시는 믿음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감정이 충만하다고 믿음도 충만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말만을 앞세운 믿음은 요란한 빈 수레일 수 있으며 또한 믿음을 하나의 사상이나 정신세계로만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믿음에 대한 많은 지식이나 이해 자체가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성경이 증거하는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훈련되고 성장합니다. 운동선수가 한 팀에 소속되면 그 소속의 의미로 유니폼을 입게 됩니다. 그러나 유니폼을 입은 것이 곧 훌륭한 선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소속이 인정되어 그리스도인이라는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듭되는 훈련과 실전을 통해 선수로서의 실력이 쌓아져야 합니다. 행함 없는 믿음이란 경기에 출전하거나 훈련을 받는 일없이 유니폼만 입고 다니는 운동선수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할 때 개발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고여 있는 물이 썩고, 사용되지 않는 기계에 녹이 슬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쇠퇴하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행함을 통해 쓰여 지고 활용되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값진 보물을 창고에 쌓아두고서도 행함이 없기 때문에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또한 믿음은 이 같은 훈련과 검증의 과정을 통과할 때 참으로 자기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영원한 차이

겉모양이 달걀이라고 해서 모든 달걀이 다 똑같은 것이 아니고 생명이 있는 정란 달걀과 생명이 없는 무정란 달걀이 있습니다. 정란은 어미 암탉이 품고 있으면 때가 되어서 새로운 생명인 병아리가 나오지만 무정란은 아무리 품고 있어도 생명을 결코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란은 생명 인자를 소유한 살아있는 달걀이요, 무정란은 생명 인자가 없는 죽은 달걀입니다. 이것은 생명과 죽음의 영원한 차이입니다.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나는 순간에 울음을 터트리며 몸을 움직이지만 사산된 아이는 똑같이 눈, 코, 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어도 울음이 없고 움직임도 없습니다. 모양은 같으나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행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립니다. 기독교와 불교의 큰 차이는 불교에는 깨달음은 있으나 행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그 말씀대로 순종해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고,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축복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의 신학자인 콕스(H. Cox)는“오늘날 우리는 복음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무효화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되지 않는 삶을 살아 불신자처럼, 때로는 불신자들보다 못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별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강한 인식을 갖게 한다는 것을 지적한 말입니다.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때문에 복음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합당한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과 죽은 믿음

믿음에는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있는데 산 믿음은 행위를 낳지만, 죽은 믿음은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산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아 새 생명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믿음인데, 이 믿음은 사람마다 그 믿음의 수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반드시 행위를 수반하게 됩니다. 참된 믿음은 새 생명과 함께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지식이나 이해로만 끝나는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헌신이나 봉사, 선행과 같은 행위를 수반하는 실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믿음’은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고 승인하는 차원에만 머무는 교리적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은 그 자체에 생명이 없는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행위를 낳지 못합니다.

우리 믿음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행동을 통해서 보여 지고 입증됩니다. 행함은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의 잎과 나뭇가지를 통해서 바람이 부는 것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야 되는데 믿음의 증거는 선한 행실과 충성, 헌신, 봉사를 통해서 아름다운 믿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그 행동을 통해서 존경과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서 증거를 나타내야 합니다. 그 믿음의 증거가 바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을 가지면 그 믿음을 통해서 먼저 삶이 변화를 받고 삶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성숙됩니다.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가치와 이념이 달라지며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말과 행동이 변화되며 새로운 인격자로 변화되어 성장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도 잘 되고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한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축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고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삶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증거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잘못된 신앙입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상이나 자신만이 알고 있는 기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보다는 몸소 실천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하고 정확한 것입니다. 우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카네기는 네 종류의 사람을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네 종류의 사람이란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보통의 사람,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나태한 사람, 마지막으로 아는 것을 행하지 않는 자기 기만적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도 이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입니다. 성경은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21:22)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말씀을 지키고 믿음을 행하는 일에 자주 실패합니다.




신앙의 장애인

앤드류 머레이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실천적인 적용의지는 전혀 없이 그저 말씀을 듣는 것 자체만을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무능력과 한계를 핑계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말합니다. 세째는 말씀을 듣거나 읽는 것을 하나의 의무나 형식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열심히 듣고 읽은 후에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착각하며 스스로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으로서 분명히 장애입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은 믿음을 가진 신자가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 결론이 오늘 본문 말씀 26절인데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했습니다. 믿음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누구나 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신자의 생활은 그 자체가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는 믿음에 대해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참 믿음, 그리고 살아있는 믿음은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신자의 삶은, 믿음을 밖으로 나타내 보여줍니다. 야고보는 그 믿음이 우리 주위에서 헐벗고 굶주린 형제나 자매를 향해서 도움을 주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인생의 가치관과 삶의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물론 이런 변화가 하루아침에 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삶은 날마다 변해가야 하는데 이 변화의 뚜렷한 증거 가운데 하나가 선행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선행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나면 의무가 따르는데 그 의무가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이제는 삶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의 의무입니다. 선행을 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행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은 교회의 의무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하나하나의 의무인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서 2장은 믿음과 행함이라고 하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오해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행함에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믿는 자의 행함이 어떠해야 하는가?“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그렇게 해야만 바른 행함이다” 이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믿음이 있어" 라고 말하는 그 사람의 행함을 볼 때 “그의 행함이 믿음과 일치하는 행함인가 아닌가?” 이것을 말하고 있으며 22절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행함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선함이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서 믿음과 행함이 하나로 나타나지는 곳은 도덕적인 완전함이나 율법이 철저히 준수되는 곳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이 조화를 이루는 곳은 긍휼과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서는 우리 자신이 중요시 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선이 됩니다. 그러한 곳에 자유·평화·공의가 있습니다. 불의한 사회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목적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불의한 힘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행함의 목적이 우리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행함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삶 그 자체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이 어떤 두려움이나 보상을 기대한 복종이 될 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복종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셨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복종이 그것을 하면 복을 받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기울어지기 쉽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은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지 아니하고 자신을 포기해가면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산 믿음은 움직이는 믿음이고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믿음이 뿌리라면, 믿음의 뿌리에서 행함이란 열매가 있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반드시 행함이 있습니다. 행함은 믿음의 열매이며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마 7:20). 한 사람이 가진 진실한 믿음은 행함에 의해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향하는 다리가 있습니다. 그 다리를 확인하시고 믿음과 행함이 일치된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서정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