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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능력 (고린도전서 15:12~20)
“한국교회는 교인이 1,000만 명이 되었는데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고, 심지어 교회가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소금은 많은데 맛을 잃었고, 등잔은 많은데 불은 꺼지고 심지만 남았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취임식에서 교계 원로인 정진경 목사가 설교 시간에 한 말을 조선일보 기자가 그대로 옮겨 실은 기사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누가 뭐래도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힘의 종교입니다. 능력이 없는 기독교는 무장 해제된 군인처럼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힘이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 불은 꺼지고 심지만 남은 등잔과 같은 교회는 더 이상 능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혼탁한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옛날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바로 교회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각종 은사가 교회 안에 풍성했습니다. 또한 좋은 가르침도 많이 받았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같이 위대한 교사들이 직접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안에 능력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문제만 많았습니다.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적인 타락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문화에 끌려다니는 아주 무기력한 교회였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첫 번째 편지를 끝내면서 그 유명한 15장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이 무기력한 교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맡겨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 모두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 시간 능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크게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입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힘이 있었던 까닭은 주님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항상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중요성은 사도행전 1장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선출할 때 어떤 조건을 제시했습니까?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2) 그렇습니다! 증언의 핵심 내용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복음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주님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습니까? 그 까닭은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그 능력으로 교회와 항상 함께 역사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결과 교회는 날마다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괜히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우리가 믿는 주님이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 주님의 부활은 또한 소망의 기초이기 때문에 능력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소망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능력있게 산다는 것은 세속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능력있는 삶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진짜 능력있는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바로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 홀가분하게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는 그릇된 생각을 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세상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다만 순례자의 삶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진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영원한 본향, 하늘 나라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는 과연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처럼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자기 자신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을 때 세상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진짜 능력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힘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이 나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그 주님을 믿는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참고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주님은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부활의 즐거움과 영광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할 때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은 단지 2000년 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 주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때 그토록 애써 알리려고 했던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주님이 지금 교회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의 삶에 부활의 능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기력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부활 신앙의 회복이라는 처방을 내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활에 우리 믿음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주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를 위한 첫 열매였습니다. 주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주님처럼 변화하여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 주위에 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부활을 전하고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
“한국교회는 교인이 1,000만 명이 되었는데도 사회에 대한 영향력은 점점 약해지고, 심지어 교회가 사회의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교회는 소금은 많은데 맛을 잃었고, 등잔은 많은데 불은 꺼지고 심지만 남았다.” 지난 5일 오전 서울 여전도회관에서 열린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대표회장 이.취임식에서 교계 원로인 정진경 목사가 설교 시간에 한 말을 조선일보 기자가 그대로 옮겨 실은 기사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누가 뭐래도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힘의 종교입니다. 능력이 없는 기독교는 무장 해제된 군인처럼 무기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힘이 없는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교회, 불은 꺼지고 심지만 남은 등잔과 같은 교회는 더 이상 능력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이토록 어지럽고 혼탁한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그 옛날 초대 교회가 어떻게 그 거대한 로마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 까닭은 바로 교회에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은 과연 어디서 비롯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을 때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각종 은사가 교회 안에 풍성했습니다. 또한 좋은 가르침도 많이 받았습니다. 바울이나 아볼로 같이 위대한 교사들이 직접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안에 능력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문제만 많았습니다. 분쟁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성적인 타락도 있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세상 문화에 끌려다니는 아주 무기력한 교회였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첫 번째 편지를 끝내면서 그 유명한 15장 말씀을 통해서 부활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믿음만이 무기력한 교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맡겨진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능력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지체 모두가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이 시간 능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크게 두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입니다. 그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안에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고전 15:12) 그는 복음을 전할 때 언제나 주님의 부활을 강하게 선포했습니다. 그가 전한 복음이 힘이 있었던 까닭은 주님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을 항상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활의 중요성은 사도행전 1장 말씀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새로운 사도로 선출할 때 어떤 조건을 제시했습니까?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와 더불어 예수께서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행 1:22) 그렇습니다! 증언의 핵심 내용은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초대 교회는 복음의 핵심은 주님의 부활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항상 주님의 부활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째서 주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습니까? 그 까닭은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그 능력으로 교회와 항상 함께 역사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 결과 교회는 날마다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괜히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셨을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우리가 믿는 주님이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 주님의 부활은 또한 소망의 기초이기 때문에 능력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부활을 소망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능력있게 산다는 것은 세속적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이 능력있는 삶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진짜 능력있는 삶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현상이 바로 교회의 세속화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 홀가분하게 세상에서 잘 살아보자는 그릇된 생각을 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부활 신앙이 중요합니다. 부활 신앙은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 세상에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다만 순례자의 삶에 불과합니다. 때문에 진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삶의 궁극적인 목표를 영원한 본향, 하늘 나라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말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는 과연 하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순례자처럼 날마다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고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면 자기 자신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을 때 세상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3~4) 진짜 능력이란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도 오직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힘이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부터 고난을 참고 견디는 힘이 나옵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처럼 그 주님을 믿는 우리도 언젠가 부활하여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참고 견딜 수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이길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주님은 부활에 대한 소망으로 십자가를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승리해야 합니다. 주님처럼 부활의 즐거움과 영광을 소망하면서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을 인내로 극복할 때 진정한 의미의 승리가 주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한다는 것은 단지 2000년 전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만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 주님이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선포할 때 그토록 애써 알리려고 했던 것은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부활하신 그 주님이 지금 교회와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도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활 신앙이 회복될 때 우리의 삶에 부활의 능력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기력한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부활 신앙의 회복이라는 처방을 내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의 부활에 우리 믿음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외쳤습니까?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주님의 부활은 바로 우리를 위한 첫 열매였습니다. 주님이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신 것처럼 우리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세상을 이기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 주님처럼 변화하여 하나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 주위에 절망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부활을 전하고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능력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