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사랑합시다   (시122:6)

대한민국헌법 전문을 보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하고…”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전문을 보면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시작을 가깝게는 삼일운동에 두고 있습니다.

3.1운동 이후 전국을 휩쓴 시위운동 상황을 보면 집회회수 1,542회, 참가인원수 202만3,089명, 사망자수7,509명, 부상자1만5,961명, 검거자 5만2,770명, 불탄 교회 47개소, 학교2개교, 민가715채나 되었다합니다. (일본측발표).

이 거족적인 독립운동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으로 비록 많은 희생자를 낸 채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대내외적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정신을 선명히 드러낸 바가 되어, 우리 근대민족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 됩니다. 그 결과 대내적으로는 일제의 무단정치가 끝나고 보다 교활한 문화정치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상해의 임시정부탄생,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촉진, 그리고 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민족운동 등에 강한 영향을 끼쳤다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나라 사랑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삼일절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안 상정이 되고 주한 일본대사의 “독도는 일본땅” 발언으로 독도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이라는 보도를 봅니다.

여기에 대해 한국이 과거 소극적이던 대응과 달리 이번에는 강경한 입장이라 합니다. 정부는 23일 일본 시마네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안 상정에 강력한 유감표명과 함께 즉각 폐기를 촉구했고, 24일에는 다카노 도시유키 주한 일본대사의 발언과 관련해 우라베 토시나오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항의하는 등 단호하게 대응했다합니다. 정부 관계자는 “독도 영유권을 훼손할 만한 일본측의 발언이나 조치에 정부는 단호히 대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합니다. 이는 정부의 소극적 대응에 비난여론이 많은데다 최소한 일본 주장에 대한 명확한 우리 정부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고 합니다. 외교부 당국자는 “일본은 예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용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절대 용납할 수 없다”며 “일본 정부와 정치권의 반응을 지켜본 뒤 추가조치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합니다. 그동안 ‘치고 빠지기’식 전략으로 분쟁지역화를 노려온 일본도 갈수록 노골적인 태세라 합니다. 일본 정부가 시마네현 조례제정 추진을 사실상 묵인하고 있는데다 일본정부를 대신해 한국에 와있는 일본대사가 정부의 공식 항의논평이 있은 직후 또다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를 반증한다는 것입니다. 외신기자들과의 질의응답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하지만 한국 내에서 쏟아질 비난여론을 감수하면서까지 이같이 발언한 것은 일본정부가 독도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 것으로까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대사관측은 일단 “외신기자회견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지 적극적인 의사표명은 아니었다”고 해명하면서도 “다카노 대사는 우리(일본)정부의 입장을 말한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문제가)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된다는 게 우리 입장”이라고 대사관측은 덧붙였다합니다. 그러나 양국 모두 독도문제가 외교문제로 비화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런 입장이다합니다. 우라베 공사는 “중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양국관계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평화적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합니다. 우리 정부도 이번 사태가 ‘독도분쟁’으로 번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합니다. 실효적 점유로 분쟁지역화를 차단한다는 방침으로, 과도한 대응은 전략적으로 한국에 유리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다 합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독도 문제는 법적인 문제로 독도의 분쟁지역화를 방지하는 것이 정부 기본 방침”이라며 “일본 반발을 불러일으켜 분쟁지역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 행위는 도움이 안된다”고 말했다합니다. 이 관계자는 또 “독도를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한 사실”이라며 “국제법적으로 다툼이 생길 경우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독도 관련 정책을 추진 중”이라고 덧붙였다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3.1절을 맞으며 나라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시인은(시 122: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합니다.

구습을 따라서나 형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사랑의 원리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원리로부터 예루살렘을 위해 구하고 공공의 복지를 찾으면서 자신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온의 문들을 사랑하시기" (시 87:2) 때문에 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을 사랑하실 줄 믿습니다.


나라 사랑은 충성이기도 합니다.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인이 한국 청년 두 사람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합니다. 애국청년 장인환. 전명운이 친일 미국인외교관 스티븐스를 권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스티븐스는 현장에서 즉사하고 두 사람은 체포되어 미국 법정에서 살인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이 재판에 중형을 선고하도록 주미 일본 총영사를 동원하여 외교 활동까지 폈습니다. 그러나 장인환 의사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당히 거사동기를 이렇게 말하였다합니다. "여러 말할 것 없이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불의의 행동을 한 것은 세상이 아는 바이오. 스티븐스가 한국 외교고문관으로 한국의 녹을 먹으면서도 도리어 일본을 도와주고 한국의 2천만 동포를 은근히 독살하려 하는지라, 내 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적을 없애지 아니하면 우리는 일본의 손에 멸망할 것이니, 나의 마음에 충천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나라의 원수를 없이하고 나와 같은 의사들이 연속하여 내 뒤를 따라오기를 원하는 바이오."

이러한 그의 애국심에 미국인들까지도 감동하여 일제의 극형처리를 바라는 외교공작에도 불구하고 2등 살인죄로 2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합니다. 재판관은 "비록 30년 징역을 언도해야 하나 충의지사를 거기에 적용시킬 수 없이 그 다음 형을 선고한다." 라고 하였다 합니다. 그 후에도 감형을 받아 1919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합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세례 받은 기독교 신자로 이러한 거사를 하였다 합니다.( 애국-인터넷 정보클럽)
    

조선 선조 대 홍순언(洪純彦)이란 중국어를 잘하는 통역관이 있었다.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갔을 때 일이다 합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먹으려고 주막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술집 앞을 지나려니 이상한 글이 문에 씌어 있었습니다. ‘하룻밤 술값이 일천 냥 임.’ 호기심이 일어 그 집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더니, 눈물겨운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서 술을 따르는 아가씨의 아버지 장례를 모시기 위해서 일천 냥이 꼭 필요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꽤 알려진 분이예요. 그런 아버님이 얼마 전 남의 모함을 받아서 그만 처형을 당하셨어요. 그런데 시신을 고향으로 모실 비용이 없어서...” 홍순언은 그 아가씨의 사정이 너무 딱하여 차고 있던 돈 전대를 풀어주고 그 집을 나왔다합니다. 아가씨가 뒤쫓아 나와 성함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애원을 해 조선에서 온 통역관이라고만 일러주었다합니다. 귀국하여 공금을 축낸 죄로 홍순언은 옥살이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또 얼마의 세월이 흘러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홍순언은 명나라의 응원군을 청하러 가는 사신 일행을 따라 다시 북경으로 가게 되었다합니다. 사신 일행이 북경 근처에 이르렀을 때였다 합니다. 성안에서 어떤 사람이 달려오더니 물었습니다. “조선 사신 일행 가운데 통역관이 계시거든 저를 따라 오십시오.” 홍순언은 영문을 모른 채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어느 으리으리한 집 대문으로 들어서니, 한 귀부인이 방으로 안내해 들어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 것입니다.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십여 년 전 한 주막집에서 생긴 일을 잊으셨는지요?” 홍순언도 그제 서야 문득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그 소저께서?” “예, 그렇사옵니다. 저는 그때 대인께서 주신 돈으로 아버님을 고 향 땅에 장사하였고, 그 후 아버님의 죄도 모함임이 밝혀졌사옵니다. 지금은 석상서의 아내입지요.” 홍순언은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라 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조선은 왜적의 침입을 받아 온 백성이 무참하게 죽어 가고 있으며, 임금은 서울을 떠나 의주로 피해 계십니다. 이번 저의 임무는 명나라의 응원군을 얻어 우리 조선을 구하는 일입니다. 부디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석상서는 당시 명나라의 병부상서인 석숭이었다 합니다.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여인이 그 사람의 부인이라니, 이번 일은 잘 풀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합니다. “염려하지 마셔요. 제가 힘은 없으나 대감께서도 항상 홍대인의 의리를 감탄하고 계셨으니, 잘 되리라고 생각되어요.” 이렇게 되어 석숭의 도움으로 명나라에서는 즉시 이여송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원하게 되었다합니다. 홍순언은 북경을 떠나는 날, 그 부인은 손수 수놓아 짠 비단 몇 상자를 실려 보내 왔는데, 거기에는 한 필 한 필마다 ‘보은’이라는 무늬가 수 놓여 있었다합니다. 홍순언은 명나라와의 외교를 잘한 공로로 통역관의 신분으로는 될 수 없는 광국공신이 되고 당릉부원군에 봉해졌으니, 당릉이란 중국의 비단이란 뜻이라 합니다. 자기가 베푼 은혜를 나라를 구하는 일에 활용한 한 예입니다.


   나라 사랑은 협력함에 있습니다.

옛날 한 노인이 삼 형제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삼 형제가 서로 반목하면서 피차에 협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노인의 걱정은 자기가 물려줄 유산인 과수원을 어떻게 삼 형제에게 분쟁이 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가였습니다. 노인은 꾀를 내어 아들들에게 싸리나무 한 가닥씩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세 아들을 불러 놓고 각자에게 가져온 한 가닥의 싸리나무를 꺾어보도록 했습니다. 세 아들들은 별 힘들이지 않고 자기의 나무 가지를 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서 큰 아들부터 가지 세 개를 함께 꺽어 보도록 했습니다. 큰 아들도, 둘째도, 막내도 여의치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아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한 묶음의 가지를 꺾어 보도록 했습니다. 세 아들이 함께 싸리나무 묶음을 별 힘 안들이고 꺾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인은 자신이 평생 가꾸어 온 과수원을 물려줄 터이니 이처럼 함께 협력해서 유산을 나누어 팔지 말고 가꾸도록 부탁했습니다.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복음전도 나라 사랑도 협력해야 합니다.


스위스 은행은 세계적으로 가장 신용이 있는 은행입니다. 스위스 은행이라고 하면 하나를 말하는 줄 아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하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위스에는 563개의 금융기관이 있는데 그 금융기관 모두가 세계적인 신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스위스에 있는 은행이 세계적으로 신용을 얻고 있느냐면,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 그가 반 유대인 정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과 반 나치들은 스위스로 재산을 빼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치 정부가 이것을 알게 되었고, 비밀 스파이를 스위스로 보내서 정보를 얻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안 스위스 정부는 새 은행법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기밀을 누설하는 은행원은 6개월간 징역, 혹은 5만 프랑의 벌금형을 선고하도록 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수만 명의 은행원들이 단 한사람도 예외 없이 신용을 지켰고, 그들은 정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을 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그들이 법이 무서워가 아니고 정말로 우러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때 스위스 은행의 신용이 확립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용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들의 신용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협력하는 일이 요구되어집니다.


아말렉이 쳐들어와 모세가 산에 올라 손을 들고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이 내려오면 이스라엘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잡고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있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이기게 되었습니다.


   나라사랑은 기도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의 현장에서 꿈을 이룬 한 초등학생의 간증 편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초등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뭔지 예수님은 아시지요. 한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벽에 1 2 3 4 5번호가 써있어요. 우리 집은 32번이예요. 화장실은 동네에 공중변소를 쓰는데요.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1번방에 사는 순이 보기가 부끄러워서 못 본척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 식구는요 외할머니와 엄마 내 동생 용숙이랑 네 식구가 살아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네 식구가 다 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로 2동 술집에 나가서 일하시는 엄마가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세요. 할머니는 한 달에 두 번 그것도 운이 좋아야 치로 사업장에 가서 돈을 버시구요, 아빠는 청송감옥소에 계신데 엄만 우리보고 죽었다고 그래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마냥 엉엉 우시기를 잘하고 '이 애물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버리자' 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 부활절 날 제가 엄마생각하고 회개하면서 운 것을 예수님은 아시지요. 저는 예수님이 저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걸 정말 이해 못했거든요. 저는 죄가 통 없는 사람인줄 만 알았단 말이에요. 근데 그날은 제가 죄인인줄 알았어요. 친구들이 우리 엄마보고 술집 작부라고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고 매일 술 먹고 술주정하며 울면서 같이 죽자고 하는 엄마가 미운 적이 많았거든요. 부활절 날 '엄마 미워한 거 용서해주세요' 하고 예수님께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면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 고 말씀하시는 거 같아서 저는 그만 눈물을 와락 흘리고 말았지요.  그날 교회서 찐 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시기에 집에 갖고 와서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요. 몸이 아파서 누워계시던 어머니가 화난 목소리로 '흥 구원만 받아서 사니' 하시면서 '집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올려내라는데 구원만 말고 50만원을 내면 내가 예수를 믿지 말래도 믿겠다' 하셨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너무 신이 나서 기도하기 시작했지요. 제가 기도드린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올 때 몰래 교회 가서 기도했잖아요.  근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주셨어요.  저는 청송에 가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그리워하면서 글을 썼어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때를 분명히 생각 하실 테니 그날만은 엄마도 술 취하지 말고 울지도 않고 그때만을 생각해주신다면 5월 달은 진짜 내 세상이 될 것 같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날 제가 1등 상을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시지요. 5월 5일 엄마는 너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그런데 그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글짓기대회 날 심사위원장을 맡으셨던 노 할아버지 동화작가 선생님께서 물어물어 우리 집을 찾아오신 거예요. 대접할게 없으시다고 할머니 동네 구멍가게에 급히 내려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오셨지요. 동화작가 선생님께서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었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주셨어요. 엄마는 줄줄 눈물만 흘리면서 엄마가 일 나가시는 술집에 내려가시면 약주라도 한잔 대접하겠다고 했습니다. 동화할아버지는 대접은 이다음에 받겠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 5권을 놓고 돌아가셨습니다. 밤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주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던 저는 그만 깜짝 놀랐어요. 동화책 갈피에서 흰 봉투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펴보니 저는 생전처음 보는 수표였습니다. 엄마에게 보여드렸더니 세상에 이럴 수가 하시면서 제 양어깨를 잡으시면서 '고마우신 분이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분이 계시구나'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만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만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 라고 말했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채셨는데 '애 용욱아 예수님이 구원만 주신 게 아니고 50만원을 주셨구나' 큰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할머니도 울고요 저도 왠지 눈물이 났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린 안 쫓겨나고 여기서 다시 사는 거야' 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날에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날 교회를 가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시고 나서신 거예요. 대예배에 가셔서 얼마나 울으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해가지고 집에 오셨어요. 나는 엄마가 우셨을 때 같이 죽자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얼른 편지 써라 엄마가 안 죽고 살아서 전세금은 꼭 갚아드리겠다고……. 난 못 죽어 이젠' 하셨어요. 엄마가 안 죽겠다는 마음을 먹으신게 전 너무나 기뻐서 야호 소리를 지를 뻔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저도 이 담에 커서 꼭 갚아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살아계시도록 예수님께서 꼭 돌봐주세요. 이것만은 약속해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 최고 예수님을 용욱이는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삼일절을 앞둔 시점에 독도의 날을 정하는가 하면 대사의 망언을 들으며 나라 사랑에 대한 각오를 다시한번 하게 됩니다.  

충성을 다짐하며 협력하고 기도 합시다.


출처/강성찬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