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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불을 기다리라! (말 3:1-3 마 3:5-12)
우리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제가 지난 주 중 저녁 시간에 시청 앞을 지나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울시청 앞에 갑자기 불빛 궁전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서울시청 앞에서 연말 연시를 밝히는 이 루미나리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 루미나리에 옆에 있는 대형 성탄 트리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크리스마스 트리의 꼭대기를 보면 별이 아니라, 빨간 십자가 장식이 달려있습니다. 보통 교회의 종탑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 모양입니다.
이 십자가 장식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모든 시민이 어우러지는 시청광장에 특정 종교를 홍보하는 장식물을 달 수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십자가를 옹호하면서 타종교를 비유했습니다. “석가탄신일에 연등을 달고 석등 조형물을 설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십자가 역시 별로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 홈페이지의 자유게시판에는 트리가 점등된 지난 9일 전후로 "시청광장 트리의 십자가를 철거해달라"는 내용의 글이 수십건 올라온 상태입니다.
이들은 한 마디로 예수님 없는 성탄을 맞겠다는 주장입니다.
“크리스마스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중고등학생 377명에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산타클로스’ 라는 대답이 29.9%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는 ‘크리스마스트리’ 라는 답이 13.4%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떠올린 응답자는 7.2%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점점 크리스마스의 본질이 희석되는 현상을 봅니다.
크리스마스(Christ-mas)를 엑스마스(X-mas)로 간편하게 쓰곤 합니다. 엑스마스의 X는 영어의 ‘엑스’가 아니라, 그리스어의 크리스트의 첫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리스어를 모르니까 크리스마스가 왜 엑스마스인지 모르고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마스(Christ-mas)가 뭔지도 모르는 엑스마스(X-mas)가 되어 버렸습니다. 방정식의 미지수를 엑스라고 말하듯 말입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9-11).
예수님은 자기 땅에서 영접을 받지 못하는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축하받지 못하는 생일 잔치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잘 차려진 음식을 열심히 먹지만 생일 잔치의 주인공에게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남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면서도 단 한 푼의 세금도 내려고 하지 않는 악한 농부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다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2000년 전 세례 요한이 목소리를 높였던 이유 역시 예수님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성탄의 계절은 기다림을 배우는 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탄생은 하루 아침에 된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주어진 약속입니다. 수백 년, 수천 년을 기다려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세례 요한의 출현 역시 어느 날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랜 기다림 끝에 맞은 은혜입니다. 이미 700년 전에 선지자의 입을 통해 주어진 약속입니다. 700년이라는 기간은 때를 채워 가는 숙성의 시간들입니다. 무르익은 때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들입니다.
역사가 기다렸던 세례 요한은 자신보다 더 중요한 예수님을 이 세상에 소개하며 예수님을 기다리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또한 오랜 기다림 끝에 갖는 은혜입니다. 성탄의 선물은 믿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한 분입니다. 하나님의 시계는 틀림이 없습니다. 빠른 법도 없고, 늦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대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성탄의 은혜가 반드시 임합니다.
세례의 준비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무슨 준비를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기다리는 방법은 세례로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에 대하여는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습니다. 우리 죄는 예수님의 피로 깨끗하게 다 씻어지고, 예수님의 새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왔습니다. 우리의 썩을 몸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에 접목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피는 우리 혈관 안으로 수혈되었습니다.
우리는 성령과 불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의 삶은 여전히 옛 죄가 남긴 상처의 흔적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불신자들과 겉으로 보기에 확연하게 구별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은 원하지만 우리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들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세례를 기다립니다. 또 다른 세례는 곧 성령과 불의 세례입니다.
물 세례를 통해서 우리 안에 새 생명이 들어왔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 생명의 씨앗이 심겨진 것과 같습니다. 이 씨앗은 장차 싹이 나고 자라나서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은 열매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기다리라고 하면서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라고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없습니다.
요한이 ‘성령과 불’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성령과 불이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령은 ‘불 같은 성령’이고, 불은 ‘성령의 불’을 말합니다.
그러면 왜 세례 요한은 ‘불 같은 성령’, ‘성령의 불’을 말했습니까?
첫째, 성령은 ‘조명의 영’입니다.
불은 빛을 냅니다. 불빛은 밝게 비추어줍니다. 불은 어둠 속에서 못 보았던 것을 보게 합니다. 불 같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어두운 곳에 꼭꼭 숨어있던 죄악이 드러납니다.
둘째, 성령은 태우는 영입니다.
성령은 태우는 영으로서 우리의 더럽고 부패한 모든 찌꺼기들을 태워 버립니다.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이사야 4:4).
죄악을 불심판
그리스도께서는 불로 태우는 성령으로 최후 심판을 하러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불로 태워서 깨끗하게 하시는 분으로 오실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타작 마당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타작하시는 타작 마당입니다.
이 마당에는 알곡과 겨가 섞여 있습니다. 참된 신자는 알곡과 같고 위선자들은 겨와 같습니다. 지금은 이 두 종류의 사람둘이, 선한 자와 악한 자가 구별없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그 타작 마당이 깨끗하게 되어 알곡과 겨가 분리될 날이 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과 온 우주를 타작하시는 농부로 오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키질을 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키를 들고 알곡만 남기고 쭉정이는 날려버립니다. 그때 알곡은 하늘나라 곡간에 저장되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로 태워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눅 12:49).
이것이 마지막 심판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성령님과 불을 기다리는 것은 낭만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말이고 심판입니다. 마지막이고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불 같은 성령의 세례는 회개의 물 세례 이상의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새로운 생명을 얻음으로써 죄를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의 격렬함은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입니다. 이것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방법입니다.
미술 시간에 아이들은 밑그림을 그리고 지우고 또 그리고 지우고를 반복합니다. 그러면 밑그림이 아주 지저분해집니다. 잘 지운다고 박박 문지르면 지우개 자국에 종이가 벗겨집니다. 그러면 물감을 칠해도 예쁘게 칠해지지 않고 자국이 남습니다. 색깔도 덧칠을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덧칠을 하면 할수록 더 지저분해집니다.
그림을 자꾸 수정하면 못쓰게 됩니다. 아예 새로 그리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같은 주제로 완성된 그림을 몇 개씩 그립니다. 우리 교회의 예수님 얼굴을 그린 문순 선생이 전에 교회 가까운 갤러리에서 작품전을 여는 데 ‘가난한 손’이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그 “가난한 손”을 13장을 그리니까 아이가 “엄마는 손만 그려요?” 라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완전히 새롭게 새출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을 완전히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영’이라는 낱말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 에서 ‘폭풍’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폭풍이 오면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립니다. 폭풍과 같은 성령이 우리의 죄를 싹 쓸어가 버려야 합니다. 불과 같이 죄를 싹 태워버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생명으로 새 출발해야 합니다.
불은 심판의 격렬함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급격한 심판 없이는 우리가 구원 받을 길이 없습니다. 내 인생이 내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판단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판단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하라고 말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의 기쁨과 희망을 말씀하십니다. 알곡에게는 마지막 심판 날이 도리어 천국 잔치에 들어가는 기쁨의 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당신의 자녀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천국 잔치에 모든 것이 준비 되었다. 빨리 오라”(눅14:17) 하시는 천국 잔치의 초대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가는 이유는 심판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되는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를 맞아도 내 부모에게 맞을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마땅히 있을 곳에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의지할 분을 의지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하나님의 벌에 대한 소름끼치는 공포 때문에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워지길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는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며 주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죄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우상을 불심판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상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물질적 복을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부자되는 데 집착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물질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명예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의 칭찬에 굶주려 있습니다. 우리에게 직책과 지위를 주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권력지향적입니다.
물질적 복을 말하면서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명예를 말하면서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으로부터 초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권세를 말하면서 높고 낮은 것에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심판의 목적 ? 정결
성령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목적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고,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성령은 우리의 지식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신령한 지식을 주심으로써 우리의 의식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하나님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순결한 백성이 되게 하십니다.
다음으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생명은 우리의 의식과 생각에 젖어 들어와야 하고, 우리 무의식의 어둡고 침침한 곳을 비추어야 하고, 우리 마음의 신비한 영역에까지 침투해서 철저하게 스며들어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님은 우리의 생활 경험을 통해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생활 경험 중에서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고난 중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세상의 빛
성령께서 오셔서 성령의 불로 우리의 묵은 죄와 삶의 쭉정이들을 다 태워서 정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불이 우리를 태워 정화할 때, 우리는 세상을 밝히는 불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불이 우리를 태울 때, 우리는 뜨거움의 고통을 당합니다. 소멸의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한 이 정화의 불은 동시에 세상을 밝히는 빛이기도 합니다.
내 속의 쭉정이를 태우고, 나를 태우는 고통을 이기고, 세상의 빛으로 나가야 합니다. 내 죄를 태우는 불꽃은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서서 사람들에게 정결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거룩한 변화도 바로 나의 깨끗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죄를 태우고, 우상을 태우고, 나의 비본질적인 삶, 껍데기 삶을 태웁니다. 인간이 스스로 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태워주셔야 모든 것이 성결하게 됩니다.
인간적인 회개가 아닌 성령님 안에서 머무는 것, 성령님의 은혜 안에 머무는 것, 성령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 대림절에 회개와 속죄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대림절이 여러분 모두에게 위선과 거짓, 우상을 깨뜨리는 계절이 되며,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온 몸과 마음을 무장하는 때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출처/박병욱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