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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웨슬레와 영적체험 (행 2:3-4)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강림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강림절을 오순절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성령을 보내신 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인간의 무지나 무력감 그리고 인간의 한계와 하나님과의 단절문제 등 이런 문제들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이 오셔서 오늘 우리들을 인도하시고 교제하게 하시고 감화하셔서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기가 보이지 않으나 인간의 삶에 절대적인 것처럼, 희망이나 꿈이나 소망이나 사랑이 보이지는 않으나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절대적인 것처럼 성령도 역시 만져지거나 물리적인 것은 아니라 해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절대적인 생명이고 힘이고 능력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성령으로부터 힘을 입고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 합니다.
오늘은 이 성령을 설명하는데 이론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요한 웨슬레의 경우를 설명하면서 이 성령의 은혜와 체험이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금년은 요한 웨슬레가 탄생한지 30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그리고 웨슬레가 영적으로 체험하고 회심한지 263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합니다. 특히 요한 웨슬레는 오늘의 목회자들에게 그리고 영적 생활하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쳐준 신앙의 대선배입니다. 이 웨슬레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영국에서는 웨슬레에 의해서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영국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나는데 이 부흥운동의 결과로 이 땅에 감리교회가 탄생되고 성결교회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웨슬레의 신학적인 면 보다는 신앙적인 측면에서 몇 가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요한 웨슬레의 “가정적인 배경”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1703년 6월 17일 영국 링컨주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조부와 외조부는 모두 영국 국교의 목사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도 시인이었고 학자였고 목사였습니다. 어머니 수잔나는 자녀들에게 아주 엄격하게 신앙교육을 시킨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웨슬레는 11살 때 1714년 1월 28일 런던의 챠터 하우스 학교에 입학하여 엄격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17살 때인 1720년 6월 24일에는 옥스퍼드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에 입학해서 공부합니다. 그는 158cm의 키에 55kg의 작은 체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웨슬레의 가정 배경이나 조건은 마치 사도바울의 경우와 매우 흡사합니다. 바울이 체구가 작았던 것과도 흡사하고 가정 배경이 아주 엄격했던 것처럼 웨슬레도 경건하고 엄격한 전통 신앙가정에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경건하고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랍니다.
신앙인은 어려서부터 이 같은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부모들이 조성해 주어야 할 부모의 몫입니다. 신앙의 위인들을 보면 대부분 어려서부터 이런 신앙적 엄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란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도 그렇게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자라게 됩니다.
두 번째는 웨슬레의 “청년 시절”입니다.
웨슬레는 전통적인 신앙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는 동안 경건의 힘이 청년시절 웨슬레를 압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청년시절 경건서적들을 많이 읽었고 그 책들을 통해서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청년시절 웨슬레가 즐겨 읽었던 책은 세권으로 나타나는데 그중 하나는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이라는 책과 윌리엄 로우의 “그리스도의 완전” “경건하고 거룩한 삶에의 부름” 등입니다. 웨슬레는 한편 엄격한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경건을 몸에 익히게 되고 또 한편으로 이 책들을 탐독하면서 그의 지성과 영성과 경건에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런 영향을 받고 웨슬레는 장차 자신도 예수의 삶을 모방하여 살기로 작정합니다. 그래서 웨슬레의 삶은 청빈, 겸비, 사랑, 기도, 경건을 삶의 표본으로 삼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에게는 그 주위생활이나 분위기가 주는 영향이 참 크게 나타납니다. 한국의 초기 부흥사 이용도라는 분은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토마스 아켐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서 평생 검은 두루마기와 검은 동정 그리고 검은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예수의 삶을 모방하여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죤 번연은 델트의 “하늘가는 밝은 길이”, 데일리의 “경건의 실천“이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고 루터는 타울러의 “설교집”을 읽고 수도사의 길을 걷기로 작정했다고 했고 성 어거스틴은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오의 생애“라는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아 신앙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웨슬레는 이런 영향을 받아 살아가던 중 1726년 3월 옥스퍼드 링컨 칼리지의 연구원으로 선발됩니다. 웨슬레는 그곳에서 그 유명한 holy club을 만듭니다. 그리고 동생 찰스와 함께 소규모 성경공부 집단을 만들어 열심히 성경공부에 전념합니다. 웨슬레가 너무 철저하게 성경공부를 하니까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함께 받았다고 합니다. 그때 웨슬레는 자신이 상당한 영적자질과 믿음과 소명이 있는 줄 알았다 합니다. 이를테면 영적 교만함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1735년 32세 때 미국 조지아 지방으로 선교하기 위해서 떠납니다. 그 일에 어머니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습니다. 그해 10월 14일 마침내 미국행 여객선에 올랐습니다. 그때 웨슬레의 각오는 참 대단했습니다. 가서 큰일을 할 것이라고 자신을 믿었을 것입니다. 그는 조지아 주에 가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큰일을 할 것을 기대하고 떠납니다. 그때 그는 믿음의 교만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웨슬레는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객관적으로 비교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그 유명한 해상에서 폭풍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웨슬레 일행을 태운 배가 대서양을 건너는 도중 갑자기 거센 폭풍과 파도를 만나서 배는 가랑잎처럼 흔들렸고 모든 사람들은 아우성을 쳤습니다. 그런 환경인데도 흔들리는 배 한가운데서 침착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찬송과 기도로 예배드리는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을 웨슬레는 신비한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거센 폭우 속에서도 전혀 놀라지 않고 초연하게 찬송과 기도하는 모습으로 앉아있는 그 모라비안 교도들의 모습에서 웨슬레는 한편 신비한 감동을 받고 또 한편으로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그들에게 질문했습니다. “당신들은 무섭지 않습니까”, “우리는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런 모습에서 웨슬레는 상당한 충격을 받습니다. 후에 생각하는 일이지만 이들과의 만남은 웨슬레를 위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만남이라고 해석됩니다. 웨슬레에게 이 만남이 없었더라면 후에 웨슬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후 시간이 흐른 후에 웨슬레는 우연히 모라비안 교도인 쉬팡겐베르크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도 웨슬레로 하여금 웨슬레되게 하는 계기가 되는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쉬팡겐베르크는 웨슬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아주 기본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그 말에 웨슬레는 시큰둥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그분이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때 다시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그 분이 ‘당신을’ 구원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웨슬레는 조금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분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죽으신 것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대답입니다. 그러니까 쉬팡겐베르크는 아주 기초적인 질문을 또 합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알고 있습니까”. 그 질문에 웨슬레는 모기소리만한 소리로 대답합니다. “예 압니다”.
여러분은 이 대화 속에서 웨슬레가 지금 너무나 개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앙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너무나 피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이 대화가 있은 이후 웨슬레는 그때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로하기를 “나는 그 대답들이 모두 빈말이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웨슬레가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자신을 깊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 사역에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2년 만에 빈손으로 그냥 돌아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개념 신앙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모든 목회자들이 큰 뜻을 가지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현장에 뛰어들지만 1,2년만 되면 한결같이 영적 한계를 만나게 됩니다. 저 자신도 자신 있게 목회에 뛰어들었지만 1,2년도 안되어 곧 한계에 부딪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사역인 목회에서 얻어지는 목회자들의 한결같은 고백입니다. 우리는 웨슬레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실패를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웨슬레의 확신 없는 신앙을 보면서 나의 신앙모습을 보고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웨슬레의 청년시절의 모습입니다.
세 번째는 웨슬레의 “구체적 회심 신앙”입니다.
웨슬레는 고향으로 돌아와 그동안의 사역을 회상하다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인디언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미국으로 갔었다, 하지만 나를 회심시킬 자가 누구인가, 나는 말을 잘 할 수 있다, 위험이 없는 곳에서는 자신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정면으로 나를 노려보기만 하면 내 영혼은 쩔쩔맨다, 누가 이 같은 나를 이 사망의 두려움에서 건져주라“. 이것이 실패 후 결론 내린 웨슬레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나 각오의 힘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고 지금 내가 가지고 있다는 신앙 즉 개념적인 신앙, 그동안 모태신앙이라고 자신했던 그 신앙이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를 그대로 표현한 고백입니다. 그러니 그때 웨슬레가 얼마나 무력감과 갈증을 느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웨슬레는 견디다 못해서 모라비안 교도들이 모이는 모임에 찾아갔습니다. 그곳에서 웨슬레는 피터 뵐러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 웨슬레가 심각한 영적 갈증에 빠진 것을 알아차린 그는 웨슬레에게 짤막한 조언 한마디를 해 줍니다. “네 머릿속에 있는 그 철학을 깨끗이 씻어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믿음다운 믿음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웨슬레는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모여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 웨슬레는 마침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는 회심을 하게 됩니다. 그 날이 웨슬레가 35세 되던 1738년 5월 24일 밤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집회에서 웨슬레는 생전 처음으로 영적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밤에 그는 강하고 뜨거운 영적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 마음이 뜨거워지고 신비한 영적체험을 한 그날의 그 경험을 요한 웨슬레는 일평생 동안 간증으로 증언하며 돌아다녔습니다.
그때 그 경험은 마침내 웨슬레로 하여금 전 세계를 누비며 돌아다니게 만들었습니다. 그 힘으로 그는 1738년 구체적으로 예수를 만났을 때부터 그가 죽던 1791년까지 52년 동안 전국을 누비고 돌아다니며 전도를 합니다. 마차를 타면 승객에게 전도했고, 여인숙에 머물면 투숙객들에게 전도했고, 아일랜드를 배를 타고 건널 때 만난 폭풍우로 배가 요동칠 때 선객들을 모아놓고 그 옛날 모라비안 교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주도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가 예수를 구체적으로 만난 이후 52년 동안 하루 평균 2차례 설교를 해서 총 4만 번의 설교를 했고 그가 다닌 전도여행 거리만도 매년 6,436km 총 거리 334, 672km를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다 마치고 죽기 1년 전 1790년 1월 1일자 그의 일기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이제 머리에서 발끝까지 노쇠한 늙은이다, 나의 눈은 침침해졌고 오른손은 많이 떨린다, 나의 머리에서는 거의 매일 열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나의 수고를 늦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직 설교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면서 웨슬레는 죽을 때 까지 전도여행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년 뒤 1791년 3월 2일 88세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을 떠납니다.
네 번째는 “결론”입니다.
우선 우리는 요한 웨슬레에게서 “전통 신앙의 한계”를 보게 됩니다. 모태로부터 주어진 신앙은 좋은 점도 많지만 영적파워나 깊이가 약하다는 약점도 있습니다. 이것이 전통신앙의 한계입니다. 이 전통신앙은 지식은 있는데 용기가 없습니다. 뼈대는 있는데 파워가 없습니다. 이론과 형식은 있는데 내적 힘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웨슬레의 신앙을 보면서 뼈대나 역사는 있는데 용기가 없고 담력이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웨슬레는 풍랑을 만났을 때 모라비안 교도들을 신비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웨슬레에게 배우는 교훈입니다.
또 하나는 “경건의 힘이 주는 열심과 사명감은 자기 도그머에 빠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의 열심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얼마나 유대교에 열심이 있었습니까.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열심은 자기만족에서 기인합니다. 바울은 자기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니까 경건주의는 때로 자기사랑, 자기만족, 자기기준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웨슬레의 열심도 인디언에게 전도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사실은 그때 까지만 해도 웨슬레는 자신도 전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세 번째는 “영적 체험은 한번 경험되면 평생 유지하게 되는 확신의 원동력”이라는 점입니다. 역시 신앙생활은 영적인 힘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영적체험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입니다. 힘입니다. 파워입니다. 그래서 전도자에게는 이 영적경험이 필수적입니다. 이 경험이 없으면 평생 목회자의 삶에 한계를 경험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웨슬레는 이 경험을 통해서 비로소 웨슬레가 됩니다. 그리고 그 후 웨슬레는 이론과 경건보다 전도와 선교에 치중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후 웨슬레의 삶은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자신이 만난 그 예수를 전하는데 전부를 할애합니다. 그는 이 체험 후에 모든 의문을 풀고 모든 실패를 만회하고 자신만만하게 살아갔습니다.
오늘 많은 목회자들이 웨슬레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영적체험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유명한 성령강림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그토록 유약하고 두려워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나고 격려를 받았으면서도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이 성령강림을 경험하고 나서 비로소 제자들은 그 초라한 졸렬함의 옷을 벗어던지고 밖으로 나가서 전도자의 삶을 살았던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적 체험, 이것이야 말로 신앙인에게는 필수 과정이요 삶이요 선물입니다. 오늘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