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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실제성
A. 성령충만의 정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 그리고 이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성 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여 오순절때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체험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체험을 성령충만으로 보는 견해가있고 성령세례를 성령충만과 구별하면서 성령세례는 단회적 작용이지만 성령충만을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학자중에는 토레이(R.A. Torrey)와 디기(D. Gee) 그리고 윌리암스(E.S. Williams)등의 오순절 계통학자와 브루스 (F.F. Bruce)와 옥켄가(H.Ockenga)등이 있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동일한 사역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의 경우와 같이 불같은 세례를 부으면서 충만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엡 5:8) 성령의 세례을 받은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즉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을 성령의 세례로 보았기에(행 1:4-5, 2:1-4)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브루스는 "성령세례의 결과가 성령충만이며, 성령충만은 그후 여러번 계속된 것" 이라고 하였고, 옥켄가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경험이 성령충만이고 성령충만 이후에 비로소 능력을 행사 할수 있었다" 고 하였다. 토레이 역시 "성령의 세례를 성령충만과 동일한 비상한 은혜로 보았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 하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표현은 성령이 믿는 자의 마음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성령이 아닌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실례가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문귀에 나타나 있다. 데어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여기에 사용된 동사를 "전체 마음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이 점유는 그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 동사도 조격을 받고 있는데, 그 조격은 그 수단에 의해서 동사 의 행동이 나타나는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사의 행동은 신자에게 미치는 어떤 지배를 가르키는 것으로 이말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으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구분되어 지는 성령의 인격적 지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와같은 견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성령세례가 오순절에 임한 것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와 다르다" 고 하였다. 스토트(J.S. Stott)는 말하기를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세례의 결과이며, 세례는 독특하게 처음으로 얻는 경험이고 충만함은 영적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은 성령의 비상한 은혜" 라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도 성령의 영향아래 있는 것,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는 것을 성령충만으로 보았다. 빌 브라잎도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 이라고 보았다. 이외에 R.펙손, J.월부어트, A.머레이등이 성령의 충만을 인격적인 성령의 지배로 보고 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은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체험을 말씀보다 중시하 였고 능력과 은사를 성령충만한 삶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원어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성령에 의한 지배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격적인 영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지배되는 상태를 성령충만으로 보는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B. 성령충만의 실제
1. 성령충만과 인간의 의지
성령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지배는 성령에 대하여 믿는 자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순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이말은 믿는자는 성령이 그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구원에 대해 우리가 그를 믿을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아버지 께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도록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고 그가 우리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신뢰하기까지는 우리를 지배하시지 않는다. 성령께 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충분히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성령께서 자기들의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팔마의 말에 귀를 기울어 보면 성령의 더욱 풍성한 내주를 얻는데 있어서 사람의 책임한계는 백 퍼센트이다. 하나님이 주신 방도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성령을 더 소유치 못할 것이지만 반대로 그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한 다면 그는 성령을 더욱 소유할 것이다. 이 성령의 더욱 충만한 내주를 구할 의무는 완전히 사람에게 놓여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을 주시는 일은 순전히 백 퍼센트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인간이 도와야 할 것이 전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전부 이끄신다. 사람이 백 퍼센트 책임지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모든 능력을 주신다. 이것이 은혜 -맨 처음부터 맨 끝까지- 은혜요 절충이 아닌- 의 복음이다.
2. 성령충만의 조건
1) 성령충만을 사모함.
로이드 죤스는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신을 드림과 함께 충만해 지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때 성령충만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38에서 성령의 충만을 위해 두가지 단순한 요구를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의 지배를 갈급해 할것이며 성령의 지배에 의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 자신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시는 분이 되시기를 바라는 신자의 열망을 말한다. 우리가 목마르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바라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해 주기를 원하는 열망을 갖아야 한다.
성령으로 歷맣?되기 위한 소원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있는 죄를 판단하시고 제하시도록 하는 원함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끈과 악한 제도로부터 주님께로 분리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삶속에서 효력을 보기 원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충만은 참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 값을 치룰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받는 것이 필요하여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충만히 채워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 되기를 원하는 소원은 기도와 말씀의 풍성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도와 말씀의 충만이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과 기도가 뒤따르지 않는 원함은 지식적이고 피상적 사모함이다.
2) 죄를 고백함
스탓트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잃어진 때에는 회개와 기도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성령은 죄 때문에 슬퍼하시며(엡 4:30) 죄인에게 채워 주시기를 그치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개는 채우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성령의 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한 비상은혜로 보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7가지 방법을 행 2:38에 의해 열거했는데 첫번째 단계로 회개를 들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는 마음의 내적 변화를 깊이 느끼게 하는 것으로 사용 되었는데 그 내적 변화는 전 인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인격을 의미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 신 사역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말씀의 빛에 따라 드러난 부분들을 버리고 어 둠을 몰아내는 작업들이며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행 2:38을 통해 볼때도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을 받으면 (세례의 목적과 결과는 죄의 용서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것이 약속 되어 있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조차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령의 충만을 막아 버리는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레만 스트라우스는 생활 주위에 있는 모든 시기, 위선, 거짓, 더러운 것을 버리고 진실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무례하고, 불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으며, 용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사람이라고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죄를 회개하며 성결의 옷을 입고 사 는 신자는 성령에 민감한 자이므로 성령충만한 신자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성령 충만 함에 따라 발견되어지는 성품중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도 모두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허 복구 목사도 성령 충만의 8개 조건중의 하나로 회개를 들고 있고 죄는 신자의 성령의 지배를 방해하므로 죄에서 돌아 설 때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말했다.
죄인이 내재하는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그 죄를 스스로 버리지 않는한 성령님은 그를 지배할 수 없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 한다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3) 간구함
우리가 만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그 충만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구하는가 않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간구하고 그래서 그를 충만히 받으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간구하도록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Torrey는 성령 세례를 받는데 마땅히 밟아야 할 여섯째 단계로 눅 11:13을 말했는데 성령충만을 받는데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하겠는냐?" 단지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의 충만을 받게하여 줍시사고 구해야 한다.
박형용 박사도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하여 사람편에서 이행할 의무들로 지적된 것이 여러가지인데 기도에 의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 이라고 하면서 '이 주장의 뒷받침으로 눅 11:13이 인용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위하여 10일동안 기다린것 같이 오늘의 신자들도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간절히 기다려야 된다는 견해도 있는데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로 봄이 옳을 것이다.
덤. 라레이도 '자신을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와 부족한 점을 모두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 눅 11:13을 따라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오순절 이후로는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간구하였다고 하였다.
4) 믿 음
기독교의 모든 축복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죄책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죄의 세력에서 거룩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결의 영의 더욱 충만한 내주는 행위에 의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받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도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들의 생명 가운데 성령께서 더욱 충만히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고 하셨다. 현재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분사인 은 예수를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자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바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었고 예수께서도 여기서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어네 빠쉬(Rene Pache)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첫단계는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믿음을 세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먼저 그를 믿고 모든 일에 그를 바라보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둘째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안에 거하시기 원하는 것을 믿어야 하며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약속은 갈 3:14에서도 발견된다. 본절은 "이는 이는"이라는 두 병행귀로 되어있다. 전절은 그리스도의 속화적 죽음이 가진 이중적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첫째는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이고, 둘째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이다.
두번째 "이는"은 첫째 것에 의거하는 것(그 결과)이 아니라 병행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둘째 목적은 약속의 성령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찌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요 14:16-18, 행 1:4) 이 약속은 오순절 때 성취되었는데(행 2:1-4, 33) 신약에서의 성령의 선물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이 보편화 되었고 또 성도와 더불어 성령께서 같이 계시는 것이다.(요 14:16)
케드린 마샬은 성령충만의 방법 7가지를 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요 3:8)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보 건데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면 성령충만을 받게 될 것이다.
5) 순 종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으로 인하여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거니와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조건으로 보다도 이 조건에 의하여 성령충만의 경험을 맛보게 된다. Torrey는 성령충만 받는 방법 7단계중 4번째 단계에서 순종을 성령충만 받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순종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 순종은 행 2:38에서 우리가 주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모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의 순종 즉 하나님께서 명하시는데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순종의 중심은 의지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라고 했다. 결국 성령 충만이 성령의 지배받음을 의미 하는바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감동하심에 순종할때 성령충만의 실제를 체험케 되며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원하는 마음과 의지의 순종없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 주시도록 기다리는 것은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인격은 상대 인격을 인정하는데서 그 관계가 유지되고 영향을 줄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적 순종만이 성령충만을 가능하게 한다.
레만 스트라우스는 '빈 마음이 성령충만의 첫 조건이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완전히 복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가득채워 주실 것이다'고 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최후 분부하심을 순종한 무리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던 점으로 보아서도 그리스도의 분부하심에 대한 순종이 성령충만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팀리헤이도 어떤 종류의 거절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방해 한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 성령 충만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성령의 모든 지시하심에 극히 유의해야 하며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고 그에게 예민해 지는 것이 그 한 비결이다. 그에게 복종하면 할수록 그의 소원을 더욱더 지시할 것이며 더욱 더 고무하실 것이다.
C. 성령충만의 결과
1. 성 화
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며 성화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가 우리의 심령속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때에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롬 8:12, 고후 3:17) 웨슬레는 성화의 과정을 2단계로 보았다. 즉 초기의 성화와 온전한 성화이다. 초기의 성화는 거듭나서 성화의 단계에 들어는 갔으나 완전성화에 이르기 전의 상태로 불완전하다.
이것은 아직도 죄의 세력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단계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의심과 공포에 쌓여서 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신앙생활를 하게 된다. 반면 완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신의 무능과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으로 이순간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
웨슬레의 성결론을 성령론적으로 설명할 때는 성령으로 거듭 나는 것이 신생함이니 곧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신생한 자는 성령이 그에게 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자는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온전한 성결에 이르게 된다. 성령충만이란 계속적인 유지를 포함한 용어이기에 성화의 목적론적인 면과 점진 성장의 면을 뚜렷이 함축하고 있다.
2.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충만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 있는 것은 바울이 육신과 성령에 의해 산출된 품성을 묘사함에 있어서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육체 일들' '성령 열매'이다. '일들'은 노동을 투입하니 아무 이득을 생산하지 못하고 '열매 맺는 일'은 재배가 요구되나 열매 자체는 직접적 노동의 결과가 아닌 성장과정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위한 조건으로서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않는 수단은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16절), 육체의 소욕의 상세한 목록을 제시하고는(19-21절), 성령의 열매를 그것들과 대조해 놓고 있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사도가 어떤 개인들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성령의 역사 곧 방언을 말하는 일과 같은 특별은사(카리스마)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베풀어진 은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은사들은 한 단위로 '열매' 즉 추수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이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생산되어지는 이 열매들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종종 지적되어 진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각 결과들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산출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갈 5:22-23에 있는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살펴 보고자 한다. 헨드릭슨이나, 스토트, 렌스키 등은 그들의 주석에서 9가지를 각 3가지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 사랑, 희락, 화평은 지극히 근본적 인 영적 성품들을 (스토트 :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오래참음, 자비, 양선은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덕목들을, 충성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로서의 충실, 온유는 인간의 접촉에 관련되어 있고 (스토트 :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품), 절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즉 자신의 욕망과 정욕에 대한 관계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과 기쁨, 화평과 절제 등을 통해서 성령의 지배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좋은 기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시는 초인간적인 성령충만의 열 매들로써 성품과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풍성히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관계의 변화
성령은 인간을 중생시키고 새로운 본질, 새마음 새 사고방식, 새로운 모든 것을 주시며 진정한 소망이 되신다. 사람들이 일단 성령이 충만해져서 그의 지배를 받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악을 알고 자신들을 쳐서 복종 시키며 "은혜와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성장하여" 서로의 관계가 주안에서 성숙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과 감격과 찬송이 있다. 늘 원망이 있고 회의가 있던 우리 인생이 찬송과 감사로 바뀌어 진다.
둘째는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엡 5:22-28), 이는 남편도 성령의 뜻에 굴복하고, 아내도 성령의 뜻에 굴복하는 관계이다. 남편과 아내가 성령의 조종에 이끌리어 사는 삶의 관계가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삶의 관계 가운데 세번째로 중요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한다(엡 6:1-4). 자녀들은 주님께 하듯 자신들의 부모에게 순종하 되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존경의 마음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반면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한다(엡 6:4) 이와같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령이 조종하는 성령충만의 관계인 것이다.
바울이 성령충만의 삶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설명한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엡 6:5-9). 종들은 육체의 상전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여야 한다. 종들은 외형적으로만 순종할 것이 아니요.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반면 주인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의와 공평으로 그들을 대접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 계신 주인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엡 6:9). 주인도 종도 그리스도께 하듯 서로를 대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관계인 것이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삶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상의 세 관계를 설명했다. 이는 성령충만이 성도들의 매일 매일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삶은 성도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형편에서 성령께 철저히 굴복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킨다.
4. 전 도
성령충만의 결과는 다른 방면에도 많이 나타나겠으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뭐니 뭐니해도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의 능력있는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 일 것이다. 이는 행 1:8의 성경 말씀으로 잘 알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여기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에는 두가지 결과가 뒤따르게 될 것을 알 수 있는데 능력(권능)을 받을 것과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 그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는 제자들이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이며,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들은 위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 전파의 능력이 성령충만과 관련되어 있음은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행전의 저자와 동일한 저자인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권능이 차례로 나타 나는 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눅 3:21-22),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돌아 오셔서(눅 4: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는 (눅 4:1-13)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고(눅 4:14)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다(눅 4:15).
바울 사도의 경우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나 이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9-20) 하였는데 이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서 출옥이나 조금 편한 대우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다. 감옥에 있는 죄수로서 더욱 담대히 입을 벌려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하도록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성령충만한 자의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타는 간구요 원함이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때 불쌍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그들의 영혼들의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5. 은사의 체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다(엡 4:7)고 했지만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에게서 은사가 더 많음을 볼수 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역사속에 행2:38에 "베드로가 가로되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한 말씀은 회개하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됨을 시사 하는데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로 받으리나" 한 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 주심을 의미한다.
마가의 다락방의 문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방언을 하는등 각가지 은사가 임했다.(행 2:1-4) 즉 오순절 성령 강림후 제자들이 성령충만함으로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때 성령이 충만한 결과 특수한 은사를 체험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은사 주심은 성령님의 주관적 역사이나 성령으로 충만할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출처/박정인목사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