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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시키는 능력(성령강림절) (행3:1-10)
오순절에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많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초대 교회 때 최초로 일어난 기적으로서 성전 미문 옆에서 구걸하던 거지 앉은뱅이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님은 부활하신 이후에도 우리들이 예배드리는 곳에 찾아 오셔서 기적을 행하신다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예수 님처럼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후 그가 성전에 들어가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뛰는 것을 보고 온 백성이 놀랐습니다. 이러한 기적이 있은 후 베드로가 나가서 그들이 죽인 예수 님이 부활하시고 지금까지도 이러한 기적을 보여주고 계시다고 전했습니다. 전혀 불가능했던 이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걸어간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하면서 주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삼천 명이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게 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벌써 새 천 년을 맞이하여 그 절반에 가까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엄청난 속도로 변화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코페르니쿠스적인 변화와 같습니다. 코페르니쿠스적 변화란,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커다란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에 교회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변화의 능력을 가지고 이 세상의 요구에 응답을 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요구에 응답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변화 없이 새 천년 시대를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새 시대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필수적인 변화의 요청을 받는 시점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시간에 '새롭게 변화시키는 능력'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네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 해 보고자 합니다.
⑴,제자들을 변화시키는 기도
오순절에 120명의 성도가 한 자리에서 부르짖고 간구하여 성령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강력한 기도의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를 하러 올라가다가 일어난 기적에 대한 기록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베드로와 요한을 볼 때 성격상으로 차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주 정열적이고 즉흥적이며 행동적이고 역동적인 실천 주의자입니다. 반면에 요한은 아주 시적이고 정서적이고 꿈이 많은 이상주의자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어 예루살렘 성전에 기도를 하러 갔습니다.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있지만 그들은 기도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골프를 함께 치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함께 술을 마시기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밤을 새워 가면서 도박을 하기 위해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세상 적인 향락을 위한 찾아서 함께 즐긴다면 물론 재미도 있고, 즐거움도 있고, 사는 맛도 나겠지만 그 결국은 인격적인 변화뿐이고 불행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에 보면 좋은 기도의 파트너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 성격이 달라서 도저히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둘이 함께 기도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에는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파트너가 있어야 하고, 성경 공부하는 파트너가 있어야 하고, 전도하는 파트너가 있어야 하며, 남 전도 회나 여 전도 회에 같이 함께 하는 파트너가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형제들이 파트너가 되어서 함께 모여서 기도할 때,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파트너입니다.
마18:19∼20에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세 사람이 모여 기도할 때는 응답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혼자 교회 나오는 것보다 두 부부가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교회에 나와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함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파트너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화목하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파트너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하면 기적이 일어나며,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기도의 파트너가 있습니까? 내 남편과 아내가 기도의 파트너가 되고 있습니까? 기도의 파트너 예배의 파트너가 있을 때에 기적이 일어나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하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의 하신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⑵,앉은뱅이의 변화의 요구
예루살렘 성전에는 아름다운 문이라 불리우는 '미문'이 있습니다. 이 미문은 고린도에서 가져온 동으로 장식을 했기 때문에 멀리서 보아도 찬란하게 빛이 납니다. 그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서 구걸 행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은 선한 마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구걸하는 것이 매우 효율적이라 생각하고 미문 옆에서 구걸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평생 단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앉은뱅이의 소원은 자신의 어려운 문제, 곧 가난의 문제, 장애의 문제 해결은 돈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예배드리러 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여 동전 몇 푼 받은 것으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변화의 요구를 가진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를 볼 때 인간의 문제는 재물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재물이 많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부패되고 거짓되고 잘못 되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IMF의 시련은 곧 인간들이 변화되지 않고 욕심을 부려서 기업을 자꾸 늘려 가다 생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재물이 많다고 하여 결코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많이 가지게 되면 사람의 마음은 부패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롯 유다는 예수 님을 3년 동안 따라 다녔으면서도 3년 동안 돈을 만지게 되다 보니 결국 예수 님을 팔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문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문제가 복잡해지고 인간의 마음을 부패시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육신 적인 앉은뱅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앉은뱅이들은 공통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와서 이것저것을 구하기만 하고 남에게 한번도 베풀어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물질적인 것만을 구하는 마음의 앉은뱅이가 우리 중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가 해결 될 때에 물질적인 문제도 해결되는 것이 신앙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새 천년의 특징은 격동의 시대라는 점입니다. 지금 우리는 정말로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 빠른 변화를 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물질적인 문화가 정신적인 문화로 변하고 있음을 경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돈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질서, 영적인 가치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가졌던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보이는 것을 추구하던 시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세계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땅과 자본으로 가치가 창조되는 시대였지만, 이제부터는 두뇌에서 나오는 창조적인 정신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뉴 밀레니엄의 시대입니다. 과거의 시대는 계산하고 파악하고 통계 내는 좌 뇌의 기능을 중요시하는 시대 였다면, 새 천년의 시대는 꿈을 가져야 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비젼을 가져야 하고, 통찰력을 가져야 하는 우 뇌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사람들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초자연적인 것을 사모하고 신비적인 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합리적인 세계, 과학적인 세계, 수학적인 세계에는 이제 지쳐 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갈망하는 이 세상의 요구에 대해서 교회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야 합니다.
지난 20세기는 참으로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세계대전이 있었습니다. 냉전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서로를 공격하기 위한 원자폭탄 같은 무서운 위력을 가진 무기들이 앞다투어 개발되었습니다. 갈등과 폭력, 전쟁과 동족 상잔의 아픔을 우리는 뼈저리게 느끼며 갈등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시대를 살아 갈 수 없기 때문에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인간의 문명이 물질 문명에서 정신적인 문명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전에 유물론을 주창하면서 하나님을 거부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유물론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사회로 변해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한 민족인 북한은 유독 유물주의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유물론 주장이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서서히 변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빠른 변화를 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일은 남북 정상회담을 하는 날입니다. 두 정상들이 만나서 무슨 결론을 도출해 낼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만난다는 자체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동안 앉은뱅이처럼 세계를 향해 협박과 공갈을 하며 손을 내밀고 있던 북한이 이처럼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연 두 해를 이북에 심한 기근을 주셨습니다. 2년 동안에 기근으로 죽은 사람이 무려 200만 명이 넘는다 합니다. 지금 북한에서 필요한 것은 군사 무기인 미사일이 아니라 당장 죽어 가는 백성을 살리는 경제 원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미국이나 일본에서 경제적 원조를 꾸준히 해 왔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안되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햇빛 정책을 꾸준히 펴면서 도움을 주는 우리 나라의 도움이 앞으로도 더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회담을 하자는 제의를 받아 드리고 내일 만나는 것입니다. 북한이 지금까지 하는 식으로 거짓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식으로는 안됨을 알고 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미문 옆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는 은과 금으로 자신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은과 금으로는 앉은뱅이가 변화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걷게 하였습니다. 그 앉은뱅이에게는 새로운 인생이 열렸습니다. 그의 모든 것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⑶,체험적인 변화의 모습.
앉은뱅이가 구걸하며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모습을 보고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우리를 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하고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 앉은뱅이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비록 베드로와 요한 에게는 은과 금은 없었지만, 그들은 성령의 능력이 가득 차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14:1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 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오늘도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의 말씀을 믿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살아 계신 예수 님은 앉은뱅이를 일으켜 주시는 것과 같은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혹은 나의 주변에 앉은뱅이와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또는 나 자신이 그러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면서 역사 하시는 성령의 기적을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출저/이석권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