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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한정건, 현유광
오늘날 십일조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있다. 첫째는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 더 이상 불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비록 신약에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드물게 보이지만(마23:23, 눅11:42),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주장은 전혀 없는 만큼 구약의 가르침을 따라 온전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이 없이 십일조 명령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중요시 한다. 셋째는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견해이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성도가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교회가 필요할 때에는 각자의 양심을 따라 최선을 다해 헌금해야 한다는 원리가 앞서는 것으로 생각한다.
본 연구 보고서에서는 먼저 구약과 신약을 통해서 십일조의 유래와 그 실례(實例)들을 살피고(I), 그 실례들을 기초로 하여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practices)를 밝히겠다(II). 그리고 신약시대에 십일조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 것인지를 율법의 유효성 문제와 함께 다루어 본다(III). 마지막으로,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성경적인 헌금관을 제시한다(IV).
I.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유래(由來)
1. 구약에 나타난 십일조
1) 족장들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가 처음 나오는 곳은 창세기 14:18-20이다. 북부지역 네 왕의 연합군을 무찌르고 돌아오던 아브라함은 살렘왕 멜기세덱의 영접과 축복을 받는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에서 십일조를 드린다. 십일조의 관습은 셈족 이외의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권에서도 종종 보이는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C.L. Feinberg, "Tithe," Zondervan Pictorial Encyclopedia of the Bible, 제5권, p.756.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단순히 당시의 습관을 좇아서 드렸다고 보아야 할까? 비록 아브라함 이전에 십일조의 관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500여년 후에 율법이 십일조를 가르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박윤선 박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들이었는데, 그들이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로 주고받은 것을 보면, 이 제도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 분명하다.” 박윤선, “주일성수와 십일조 헌금 문제,” 『신학정론』 제6권 제1호 (1988, 7), 148.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① 어느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자원해서 드린 것이었다. ② 소수의 군사로 다수의 적을 완벽하게 격파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예물이었다. ③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으로 드린 헌물이었다. 김영철, “십일조의 성경적 의미,” 『신학정론』 제4권 제2호 (1986, 11), 335.
이 사건 이후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창세기 28장에 기록된 야곱의 서원에서 십일조가 다시 등장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박윤선 박사는, “그것은 조부 아브라함 때부터 계시에 의해 그 가정에서 지켜오던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박윤선, 앞의 책.
아브라함의 가정이 십일조 헌물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대대로 지켜왔는가에 대해서는 확언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야곱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라고 한 말에서,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의 십일조가 자발적인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여기에서 추가해야 할 십일조의 중요한 원리는, 자신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이에 대한 신앙 고백으로 하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이다.
2)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십일조
족장 시대에는 십일조가 앞에서 본 것처럼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각각 한번씩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이르러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 부과된 의무가 되었다. 모세의 율법에서 보면, 십일조는 크게 3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째는 레위기 27:30-33에 나오는데, 땅의 소산과 소나 양의 십분 일을 여호와께 속한 거룩한 것으로 엄격하게 규정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허락하신 소산 중 십분의 일을 벌칙까지 부과하시면서 요구하신다.
둘째로, 민수기 18:20-32에 나타난 십일조다. 민수기에서는 백성들이 드린 십일조의 용도가 부각된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셨다. 레위지파 사람들 중 제사장들은 제사를 주관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 드릴 때에 보조하는 역할과 성막을 간수하는 일에 전념했다. 따라서 레위지파 사람들의 생계를 나머지 11지파의 사람들이 책임을 졌다. 백성들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렸고, 하나님은 그것을 레위 자손에게 주어 그들의 생활을 도우셨다. 민수기 18:26에서는 레위인들의 십일조가 나온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얻은 것 중에서 다시 십일조를 거제로 드려서 제사장 가족들을 공궤한다.
셋째로, 신명기 14:22-29을 보면, 십일조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곳에 가서 먹고 즐기도록 하신다. 또 매 삼년(안식년 후 제3년과 제6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을 배부르게 하는데 사용하라고 하신다. 모세의 율법에 나타난 십일조에서 볼 수 있는 원리는, 하나님과 사람 간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십일조가 드려지지만, 그후 십일조는 레위 지파를 위해 사용되어지는 수평적인 성격을 또한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에 십일조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담고 있다. ①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으로서 하나님께 바침이 마땅한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드리는 십일조에 상당한 애착을 보이신다. 즉 십일조를 변개할 때에 주어질 벌칙까지도 부과하신다. ② 십일조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드려졌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가 예배하며 경축(celebration)하는 경비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십일조는 생활이 힘든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드려졌다.
3)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십일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그들의 십일조를 드리는 생활도 자연히 소홀하게 되었다. 사사시대에는 레위인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살 길을 찾아 배회하며, 우상까지도 섬기며, 한 가정의 제사장 역할을 하기도 했다(삿17:7-10, 18:18-20).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레위인들의 사명의식이 흐려지고 백성들을 지도하는 일에 소홀하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에 따라, 생활고를 레위지파 사람들 스스로 해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사무엘이 십일조를 삼상8:15이하에서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왕정(王政)이 이루어질 경우 백성들의 소득의 십분의 일이 왕가(王家)를 유지하기 위한 세금으로 징수될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서 헌금과는 무관하다. 그 후 다윗이나 솔로몬 왕 시대에는 십일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윗의 경우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성전 건축을 위해 많은 헌물을 한 사람이다. 역대상 29:14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헌금의 원칙을 천명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고, 그 중에서 일부를 주께 드리는 것뿐임을 밝혔다.
솔로몬보다 약 200년 후 여로보암 2세가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 활동했던 아모스가 십일조에 대해 언급한 것이 아모스 4:4에 나타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제적으로 부요함을 누리고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형식에 치우쳐 있었다.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향한 참 사랑을 상실한 이스라엘을 향해 경고하면서 겉모양만 남은 십일조를 지적한다. 그 후 히스기야 왕 시대에 이르러,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제사를 회복하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위한 십일조를 시행하게 한 사실이 역대하 31장에 나타난다. 히스기야 왕의 십일조와 관련한 조치는, 십일조를 통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히스기야 왕 이후 북왕국과 남왕국이 모두 멸망하기까지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구약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4) 포로시대와 예루살렘 귀환 후의 십일조
이스라엘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잡혀있는 때에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금 십일조가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때는 느헤미야와 말라기가 활동했던 시기이다.
느헤미야는 유대 총독으로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주도하였다. 그 후 그는 예배의식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에 정한대로 십일조 제도를 통해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생활을 보장하도록 한다(느10:38, 12:44 등).
주전 430년경,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있었고, 드린다고 해도 형식적으로 마지못해 하였다. 이때에 말라기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또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저는 것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총독에게 하는 것만큼도 하나님께 하지 않는다고 책망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와 전적 헌신의 표시로서 십일조 특히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라고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깨우치신다(말3장).
여기에서 십일조의 원리를 볼 때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유지하기 위해 십일조는 필수적이었으며, 십일조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못하였을 때에 종교가 타락하게 됨을 볼 수 있다.
2. 신약에서 본 십일조의 원리와 실제
1)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
예수님은 십일조에 관해 직접적으로 가르쳐 주신 바가 없다. 다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면서 십일조에 대해 간접적으로 언급하셨다(마23:23, 눅11:42).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있어서 매우 꼼꼼하게 계산하여 시행했으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자신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있었다(눅18:12). 이런 형편에서 주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의(義)와 인(仁)과 신(信), 곧 사람에 대한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 근거한 것이어야 함을 깨우치신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
헨드릭슨은 이 말씀이,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계속 드려야 한다고 명령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주님의 구속사역이 완성되기까지만 십일조가 유효한 것을 밝힌 것뿐이라는 것이다. 즉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예수께서 아직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음으로 십일조에 관한 율법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W. Hendriksen, Exposition of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Grand Rapids: Baker, 1973), p. 832.
이러한 주장은 헬라어 성경본문에 부정시상(aorist)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마태복음 23:23에서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시상으로,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시상이 사용되었다. 이 말씀의 의미를 풀어 쓴다면 “이것도 행하고(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고) 저것도(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이다. 따라서 이 말씀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 이전에만 국한되어 적용된다는 것은 옳은 주장이 아니다. 마 23:23에서 "부정 시상"이 사용되었다고 했는데, 원문을 보면 "이것도 행하고"에서 "행하다(포이에-사이)"는 부정 시상으로 사용되었으며, "저것도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아피에나이)"는 현재 시상이 사용되었다. 물론 극소수의 사본에서는 부정 시상이 사용되었지만 그 수는 5천여 개의 헬라어 사본 중에서 단 4 개에 지나지 않으며, 네슬레-알란트도 채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것도 행하라"는 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는 것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것인데,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은 부정 시상과는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십일조 헌금의 효력이 상실된 시점으로 보는 것은 도무지 관계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정 시상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가지만 효력이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고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예수님의 죽음까지만 지키고 그 후로는 안 지켜도 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헬라어의 부정 시상은 원래 "점 동작"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용법이 다양하지만, 명령형에서는 그 동작의 "단호성, 결단성"을 나타낼 때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윤리적 명령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부정 시상"이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는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꼭, 딱, 반드시, 결단성을 가지고) 행하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에서 "버리다"가 현재 시상이 사용된 것은 "일반적 원리"를 말한 것이다. 현재 시상은 지속적 동작을 말하는데, 윤리적 명령에서는 행위의 일반적 원리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를 신약에서 수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지만, 한 가지 예를 든다면 마 6:25에서 "염려하지 말라"는 현재 시상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반적 원리를, 즉 윤리적 금지 사항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31절에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 부정 시상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을 하신 후에, 그러므로 이제는 너희가 "(딱, 분명코, 단호히)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실제로, 구체적으로 이제부터는 염려하는 행동을 그치라, 중단하라는 의미이다. 시상에 의한 이러한 차이는 아주 미묘한 것이고, 내용상의 차이라기보다는 뉘앙스의 차이 정도로 이해해야만 한다.
마태복음 10:9-15에서 보면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이 복음에 호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는 것이 당연함을 밝히신다. 복음 전하는 자들은 바울처럼 자비량할 수도 있지만, 또한 복음 사역의 협력자들에 의해 도움을 받는 것도 합당하게 보셨다. 심지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돕는 자들에게는 평안을 약속하시고, 배척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심판을 경고하기까지 하신다.
예수님은 헌금의 원리에 대해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해 가르치신다(눅21:1-4).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은 돈의 액수의 다소보다는 최선을 다해 드리는 마음이다.
2) 초대교회의 헌금 행태
성경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헌금생활에 있어서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십일조보다 더 많은 것을 바쳤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자기의 가진 재산을 자원하여 팔아 어려운 자들과 나누어 사용했다.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 하지 않았다(행 4:32). 이러한 성도들의 행위를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유혹을 받을 만큼 큰 돈을 교회에 바치기로 작심한다(행 5:1). 물론 그들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 되어 벌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고, 성도들이 복음의 사역자들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하였다(고전9:6-14). 그는 교회(지도자들)가 가난한 자를 돌볼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갈2:10).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유대지역 성도들을 위해 헌금하도록 권면한다(고후 9장). 연보는 미리 작정하고 준비하고,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자원하여 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하였다(고후 9:7).
여기서 초대교회가 시행한 연보의 원리를 보게 된다. 교회의 사역자들의 필요를 공급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 교회를 돕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헌금하는 성도는, 심는 자에게 곡식을 수확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헌금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즐거이 바치는 자에게 열매를 더 풍성하게 더하시는 분이시다(고후9:10).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연보는 규칙적으로 준비해서 하는 것이 유익하다. 연보는 자원해서 할 것이나 힘에 지나도록 하는 것은 인정받을 만한 일이다(고후8:3). 하나님은 기쁨으로 헌금하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바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축복해 주신다. 이것은 구약의 원리와 일치한다. 단지 신약에서는 십일조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고, 율법의 규정으로 제한하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II.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에게 바치도록 명령하셨다. 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곡물이나 과실들, 그리고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십의 일은 하나님의 것으로 규정한다(레 27:30-32).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심지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으로도 말한다(말 3:8). 그러면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인가? 땅의 전체, 그리고 소득의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다(시24:1). 그러나 하나님은 전체를 다 바치기를 명령하시지 않고 십분 일만 바치도록 하셨다. 즉 대표의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십일조와 함께 첫 열매도 대표의 원리로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었다.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다”고 하신 것은(롬 11:16) 첫 것이 전체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제물로 바치면 제사장은 한 움큼을 취하여 단에서 화제물로 불사르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린다. 이때에 바쳐진 한 움큼은 전체를 대표한 것이며, 한 움큼이 바쳐진 것은 전체가 바쳐진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자신의 것을 요구하셨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일조를 내게 하셨고, 성전 운영에 필요를 위해 십일조를 요구하셨다. 때로는 가난한 자를 위해서 십분 일의 명목으로 요구하셨다(신 14:28). 전체적으로 볼 때에 이스라엘은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여러 번 낸 결과가 된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신이 필요할 때면 십분 일의 명목으로 받으셨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니까 언제든지 요구하실 권리가 있는 것이다. 실제 십의 일보다 많이 거두신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거두실 때마다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이신 것은 자신의 것을 자신이 받는다는 정당성 때문이었다. 사실 ‘십일조’라는 문자 자체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헌금의 원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언제든지 필요할 때면 하나님에게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십일조의 원리를 규정하였다. 전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자신의 것을 거두셨다. 그때에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거두신 것은(실제 어떤 해에는 3/10 가까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너무 ‘십일조’라는 문자에 얽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말라기서에서 십일조를 하지 않음을 꾸짖은 경우에서도 우리는 너무 경직되게 ‘십일조’ 자체만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말라기 시대에 백성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므로 레위인들이 그들이 생업을 찾아 나섰다. 레위인들이 타락함으로써 이스라엘 종교가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종교를 바로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인 십일조를 등한시하는 그들을 꾸짖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공동체로서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헌금이 필요했고, 하나님은 자신의 것인 십일조를 요구한 것이다.
구약의 원리가 신약에도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하나의 큰 신학적인 문제이다. 혹자는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십일조 포함)을 완성하셨다고 하며, 아직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모독하는 것으로까지 말한다. 사두환, “한국교회의 십일조에 대하여,” 『뉴스앤조이』 2001-07-13.
우리는 성경이해에서 가장 큰 원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다르다고 하면 안 된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율법의 실제 적용에서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즉, 제 칠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 칠 일째(토요일)를 경직되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안식일의 원리는 변하지 않으면서 신약의 안식일을 더 의미 있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신약에서 십일조의 사례는 예수님이 언급하신 것 외에는 없다.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고 하셨다(마 23:23). [헬라원어와 관계된 해석은 미주(尾註) 6번을 참고하라.] 이 부분은 십일조와 관련된 논쟁에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십일조 문제를 율법의 문제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생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십일조 문제를 다루기 위해 율법의 문제를 먼저 풀지 않으면 안 된다.
III. 신약 시대의 율법 문제
율법이 신약시대에 폐하여졌느냐 하는 문제는 큰 신학적 논쟁거리이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율법이 폐하여진 것으로 말한다(롬10:14; 엡 2;15; 히7:12, 18; 10:9 등). 바울은 신약시대에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십자가의 구원을 무효화 시키는 것으로 단정한다. 율법의 기능은 참 구원자에게 인도하는 ‘몽학선생’(가정교사, 혹은 소년감독자)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율법을 완전히 폐지하였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은 율법을 이루려(완성하려) 오셨지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다.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여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마 5:17-20). 예수님은 율법사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하셨고(눅 10:28),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눅 10:37). 이것은 율법을 폐지할 의사가 없음을 밝히신 것이다(눅18:18-22 참조).
사도 바울을 율법을 폐지한 사람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 에베소서 6:1-3에 제5계명을 들어 부모에게 순종할 것을 권면한 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 그가 율법이 폐기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그러면 바울이 모든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바리새인들의 사상을 꾸짖은 것이다. 율법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무효화 시키는 것이다. 로마서 3:19-20에 의하면 율법으로 구원받을 자가 없으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정당화 시킨다. 사람은 율법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3:22). 그러나 바울은 이어서 반문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3:31). 즉,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구원 받은 자는 율법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을 이루는 문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성령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한다는 로마서 8:4 말씀을 제시한다. 고린도후서 3:3은 옛 율법과 달리 이제는 법이 성령에 의해 심비에 쓰였다고 하였다. 율법의 내면화를 말한다.
성령의 역할과 율법의 내면화는 구약의 새언약에서 밝히는 바이다. 예레미야 31:33은 새언약에서 율법을 “그들의 속에 두고 그 마음에 기록하였다”고 말한다. 새언약이 율법을 폐한 것이 결코 아니다. 새언약에서도 율법은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 율법이 성령에 의해 마음에 기록되는 내면화로 변한다. 에스겔서는 새 시대에 성령이 율법을 마음에 둠으로써 율법을 지킬 수 있게 할 것을 거듭 밝힌다(겔 11:19-20; 36:26-27). 새언약 시대의 율법의 문제에 대하여 한정건, “새언약시대의 율법에 대한 고찰"『교수 논문집』제18집 (고신대학교, 1990), pp. 5-30 참조할 것.
율법의 원리는 구약과 신약이 다르지 않다. 구약에서 율법은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구원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신약에서도 율법은 결코 구원을 얻는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순종해야 할 지침이 된다. 신약에서의 율법은 영적이며 내면적이다. 외형적인 그 문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원리가 중요하며,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끌림으로 그것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성화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이다.
IV. 오늘에 있어 십일조의 원리와 적용
신약이(특히 바울서신에서), 외형적으로 율법을 좇아가는 율법주의자에 대하여 크게 꾸짖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의 정신을 이루어나가야 할 것도 밝혔다. 따라서 율법의 문제에서 구약과 신약을 동일시하여 구약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삼가야 하지만, 또한 근본적으로 구약의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신약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약의 성취이며 완성이다. 구약의 원리와 명령은 신약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하고, 그 의미가 내면화되고 더 완성적이어야 한다.
구약의 헌금의 원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나의 토지(기업)가 하나님의 것이며, 거기에서 발생하는 소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지 바쳐야 한다. 그 기준이 바로 십일조였다. 구약에서는 제사제도의 유지와 구제 그리고 공동체적 축제를 위해 최소한의 경비를 하나님의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드리게 하셨다. 구약의 원리에 의하면 만약 십의 일을 내지 않으면 ① 자신의 소득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원리를 망각하는 것이고, ②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지 않는 책임유기이다.
이러한 기본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상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유지하고 복음사역을 활발하게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되 율법적인 의무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따라서 형편이 어렵거나 신앙이 어려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성도에게 헌금의 원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십일조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율법의 잣대를 적용해서 정죄하거나 위협해서는 안 된다.
이와 더불어 주의해야 할 것은 교회가 성도들의 헌금을 관리하고 사용하는 교회 지도자들의 책임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먼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며, 또 하나님은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십일조를 내도록 하였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가지고,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예배당 건축이나(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건축이라면 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행사를 위해 부당하게 헌금을 사용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교회 재정이 남아 특별한 명분 없이 이를 저축하거나 땅에 투자하거나 주식 같은 것에 투자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십일조를 포함한 헌금을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합당하게 사용할 책임이 있다. 헌금이 구약과 신약 시대에 공히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기도 했는데, 오늘날 교회는 성도의 십일조로 얼마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데 사용하고 있는지도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약시대에도 사도바울은 자신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삯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회를 유지하고 이루어나가기 위해 헌금이 필요하며, 그 헌금의 원리는 나의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아까워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칠 때에 십일조를 기준으로 헌금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유전에 얽매여 있는 바리새인들을 준열히 책망하셨다. 그들이 그러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시키고 백성들을 얽어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15절에서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다. 또 3:6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라고 엄히 명한다. 또 사도들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지침으로서 네 가지의 금령을 제시한다(행15장). 그리함으로써 전환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도움을 준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율법주의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함정이다. 그러나 자신과 이웃의 신앙의 증진과 교회의 건덕을 위해 신앙생활에 필요한 지침은 유익이 된다.
신약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어떤 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다는 오해를 물리쳐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규모 없이 행해서는 결코 안 된다. 즉 십일조 이상의 헌금을 하며 이웃을 돕고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십일조의 법에서 자유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곡해하여 십일조는 폐지되었으며, 헌금을 개인의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연구서는 서론에서 제기되었던 세 가지 주장 중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주장은 옳지 않음을 밝힌다. 구약의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켜서는 안 되나, 율법의 원리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되어 십일조를 헌금생활의 지침(指針, guideline)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에, 첫째 주장(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완성으로 말미암아 십일조의 가르침은 완전히 폐지되었다)은 옳지 않다. 둘째 주장(구약의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와 성령의 법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잘못 되었다.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다면, 구약과 신약의 원리에 따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 합당하나, 십일조 문자 그 자체에 구속(拘束)되어서는 안된다.
율법을 외형적으로 좇아가는 율법주의에 근거하여 십일조 헌금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율법에 대한 신약의 원리를 고려함 없이 문자 그대로를 강요하는 것은 옳은 성경관이 아니다. 반대로 신약시대에 율법은 폐지되었으므로 십일조의 원리도 폐지되었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구약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주의 것이요,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기꺼이 십분의 일 이상,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은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관자이시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함과, 신앙생활의 증진과 건덕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 큰 유익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