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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케 하시는 하나님 (사도행전 2:1~13)
한 방에 사는 룸메이트끼리도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아래층에 있는 어머니에게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기 위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이 세대는 대화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미국의 일간지 USA Today는 “기술이 발달하자 젊은이들은 말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대화의 결핍이 심히 걱정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놀랄 정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기기와 기술만 있을 뿐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소통은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손에 쥐지 않으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휴대폰은 날이 갈수록 그 디자인과 기능이 다양해지고 새로워지지만 인간다운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국제 관계에서도 의사 소통의 장애 때문에 야기되는 경제적, 정치적 손실이 미래를 참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등장하는 표현들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곳에서 오순절 날 일어난 이 사건은 분명히 말, 즉 언어의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가(2절), 혀처럼(3절), 말하게 하심(4절), 다른 언어들로(4절), 말하기를(4절), 방언으로(6절), 말하는 것(6절), 말하는 사람들(7절), 방언으로(8절), 언어로(11절), 말함을(11절)...”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신 사건은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단지 말하는 사건이 아니라 듣는 사건이었습니다. “듣고(6절), 듣게 되는 것(8절), 듣는도다(11절)...” 제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듭 언급하고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진 이유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흩어짐이 아니라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인간의 불행한 과거를 회상하게 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목적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범죄한 인간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은 봄의 수확을 거두는 잔칫날임과 동시에 새 계명이 주어진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이 날은 다시금 하나로 거두어들이는 하늘 잔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울러 새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통하는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말하고 또 들음으로써 막힌 것이 뚫리게 되는 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담과 더불어 동산을 거니시며 이야기를 나누실 만큼 인간과의 교통을 즐기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그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함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 감히 하늘에 닿아 보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만큼 극에 달했습니다. 그 오만한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냥 묵과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말로써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판단하셔서 그렇게 악한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없도록 그들의 말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고양이 울음 소리 하나를 놓고도 ‘야옹’이 맞다, ‘미아우(meow)'가 맞다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지나가던 고양이가 웃고 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다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스스로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결과였습니다.
오랫 동안 흩어졌던 말이 이제 다시금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불통하던 곳에 소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말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하나가 되게 하는 최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축도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강조하였던 것 같습니다. 악한 마귀는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여 결국 분열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죄는 모든 것을 통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그와는 정반대로 막힌 것을 뚫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과연 무엇을 말했습니까? 제자들이 말했던 방언은 이상한 기도원 같은 곳에서 부흥 강사의 강압에 못이겨서 터져 나오는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그들이 말하고 또 들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내용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일을 그들은 말하고 또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그 큰 일을 말해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큰 일을 왜곡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큰 일을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월드컵 기간 중 한 스포츠 회사는 이런 TV 광고를 내보냈습니다. “We all speak one language - football!" (우리는 모두 한 언어로 말한다 - 축구!) 그렇습니다! 스포츠가 갖고 있는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특히 축구가 갖고 있는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축구와 같은 스포츠가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죄인을 다시금 화목하게 만들고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되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찢어놓고 갈라놓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그 일은 오직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갈기갈기 찢긴 이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부 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문화도 다를 수 있고 언어도 물론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고난 중에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환난 중에 만나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절망과 낙심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일을 증거할 것을 성령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충만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널리 전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한 방에 사는 룸메이트끼리도 메신저로 대화를 나누고 아래층에 있는 어머니에게 저녁 식사 준비가 되었느냐고 묻기 위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이 세대는 대화를 잃어버린 세대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미국의 일간지 USA Today는 “기술이 발달하자 젊은이들은 말이 없어졌다.”고 하면서 대화의 결핍이 심히 걱정된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놀랄 정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기기와 기술만 있을 뿐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소통은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손에 쥐지 않으면 불안하기 짝이 없는 휴대폰은 날이 갈수록 그 디자인과 기능이 다양해지고 새로워지지만 인간다운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국제 관계에서도 의사 소통의 장애 때문에 야기되는 경제적, 정치적 손실이 미래를 참으로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등장하는 표현들을 보면 마가의 다락방으로 알려진 곳에서 오순절 날 일어난 이 사건은 분명히 말, 즉 언어의 사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가(2절), 혀처럼(3절), 말하게 하심(4절), 다른 언어들로(4절), 말하기를(4절), 방언으로(6절), 말하는 것(6절), 말하는 사람들(7절), 방언으로(8절), 언어로(11절), 말함을(11절)...” 그렇습니다! 성령이 오신 사건은 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단지 말하는 사건이 아니라 듣는 사건이었습니다. “듣고(6절), 듣게 되는 것(8절), 듣는도다(11절)...” 제자들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거듭 언급하고 있는 것은 거기 모인 사람들이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진 이유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흩어짐이 아니라 모여서 하나님을 대적했던 인간의 불행한 과거를 회상하게 합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오신 목적은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범죄한 인간을 다시금 하나로 모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오순절은 봄의 수확을 거두는 잔칫날임과 동시에 새 계명이 주어진 것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탄생한 이 날은 다시금 하나로 거두어들이는 하늘 잔치의 시작이었습니다. 아울러 새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하늘과 땅이 통하는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을 말하고 또 들음으로써 막힌 것이 뚫리게 되는 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래 아담과 더불어 동산을 거니시며 이야기를 나누실 만큼 인간과의 교통을 즐기셨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더 이상 그 특권을 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목함도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벨탑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이 감히 하늘에 닿아 보려고 했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하늘을 찌를 만큼 극에 달했습니다. 그 오만한 인간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그냥 묵과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말로써 하나님을 거역했다고 판단하셔서 그렇게 악한 생각을 서로 나눌 수 없도록 그들의 말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고양이 울음 소리 하나를 놓고도 ‘야옹’이 맞다, ‘미아우(meow)'가 맞다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지나가던 고양이가 웃고 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양한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다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살면서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면서 각지로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각기 다른 말을 하는 사람들이 지금 자신들의 말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알아듣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나라 말을 배운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말은 제자들이 스스로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신 결과였습니다.
오랫 동안 흩어졌던 말이 이제 다시금 하나로 모아졌습니다. 불통하던 곳에 소통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말하고 사람들은 그 말을 들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하나가 되게 하는 최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셨던 것입니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축도에서 성령의 교통하심을 강조하였던 것 같습니다. 악한 마귀는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여 결국 분열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그와는 반대로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죄는 모든 것을 통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그와는 정반대로 막힌 것을 뚫어 하나가 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과연 무엇을 말했습니까? 제자들이 말했던 방언은 이상한 기도원 같은 곳에서 부흥 강사의 강압에 못이겨서 터져 나오는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는 그런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중심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제자들이 무엇을 말하고 천하 각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무슨 말을 들었습니까?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행 2:11) 그들이 말하고 또 들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큰 일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나타난 내용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일을 그들은 말하고 또 들었던 것입니다.
오늘 교회도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서 하나님의 그 큰 일을 말해야 합니다. 잠잠하지 말고 말해야 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 큰 일을 왜곡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교회는 단지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큰 일을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월드컵 기간 중 한 스포츠 회사는 이런 TV 광고를 내보냈습니다. “We all speak one language - football!" (우리는 모두 한 언어로 말한다 - 축구!) 그렇습니다! 스포츠가 갖고 있는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특히 축구가 갖고 있는 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축구와 같은 스포츠가 세상 모든 사람을 하나가 되게 할 수 있습니까? 과연 그런 것들이 하나님과 죄인을 다시금 화목하게 만들고 온 인류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하는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말로는 하나되게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찢어놓고 갈라놓습니다. 하나가 되게 하는 그 일은 오직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충만한 성령의 능력으로만 갈기갈기 찢긴 이 세상을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부 색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문화도 다를 수 있고 언어도 물론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고난 중에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를 환난 중에 만나 주셨습니다. 그 주님이 절망과 낙심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만나 주시지 않았습니까? 성령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하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큰 일을 증거할 것을 성령은 오늘 우리에게 강력히 촉구하십니다. 충만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널리 전하는 충성스러운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강석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