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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호와로라 (출5장 1절 - 6장 8절)
'우문현답'(愚問賢答)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그에 대한 대답을 지혜롭게 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로부터 "도대체 왜 그 고생을 하면서 산에 오르는 것입니까? 어차피 도로 내려올 거면서."라는 비꼬는 식의 질문을 받을 때, 등산가는 "당신은 왜 사십니까? 어차피 죽을 텐데."라고 응수해 준다고 합니다.
가족이 함께 만두를 먹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넌 아빠가 더 좋아, 엄마가 더 좋아?"라고 부모들이 흔히 하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자, 그 어린 아들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만두 하나를 둘로 잘라서 아버지에게 주면서 "아빠는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맛있어요?"라는 '똑똑한 대답'으로 아버지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그런 우문현답이 등장합니다.
바로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우문(愚問)과 '나는 여호와로라'라는 현답(賢答)입니다.
이 출애굽기 5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부리면서 압제하고 있던 애굽의 바로와 '내 백성을 보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고 그의 앞에 선 모세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바로 그 제1 라운드에서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인생의 무지와 교만이 총망라된 질문을 던졌고,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로라"고 당신의 존재와 절대주권을 당당하게 선포하심으로써 응수하셨습니다.
사실상 그 질문은 어리석은 정도가 아니라 실로 '악한 질문'(惡問)이었으며, 그 대답은 지혜로운 답의 차원을 훨씬 넘어선 '의로운 대답'(義答)이었습니다.
이 시간 저는 바로와 하나님 사이에서 오가고 있는 이 문답을 통하여, 오늘날도 과연 어떤 사람들이 이런 우문을 던지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이 현답을 듣고 깨닫는 자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말은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예배드릴 줄 모르는 불신자의 악한 질문입니다.
본문 5장 1절부터 3절에 보면 "1그 후에 모세와 아론이 가서 바로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2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3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 여호와께서 온역이나 칼로 우리를 치실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에 서게 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며 희생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광야로 나가야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려 하시는 목적 중에 하나가 바로 자기 백성들로부터 예배를 받고자 하심이었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십년 광야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또한 바로 그것이기도 했습니다.
출애굽 직후에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쳐 주시며 성막을 짓게 하시고 또 레위기와 민수기 등에 기록된 자세한 제사법을 지시하신 것도 바로 꼭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하지만 바로는 그 말을 듣자말자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여기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직역하자면 '여호와가 누구냐?' 즉 '여호와라는 신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신이냐?'라는 뉘앙스가 포함된 경멸의 표현입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는 자기 자신이 바로 신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를 가리켜 '완전한 신' 또는 '위대한 신' 따위로 묘사하고 있는 애굽의 비문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최고 존재인줄 알고 있는데 그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 앞에 예배를 드린다고 하니 바로로서는 이해도 안 되고 허용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대신에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의 그런 요청은 그들의 하는 일이 너무 편해서 나온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4절부터 9절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4애굽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모세와 아론아 너희가 어찌하여 백성으로 역사를 쉬게 하느냐 가서 너희의 역사나 하라 5또 가로되 이제 나라에 이 백성이 많거늘 너희가 그들로 역사를 쉬게 하는도다 하고 6바로가 당일에 백성의 간역자들과 패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7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 소용의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로 가서 스스로 줍게 하라 8또 그들의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로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자 하나니 9그 사람들의 고역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게으르기 때문에'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러 가야겠다고 말한다."라고 했습니다.
15절 이하에 보면, 나중에 자기 앞에 하소연하러 온 "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에게도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제를 자기 인생의 사활처럼 생각하는 이스라엘 백성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이 편하고 시간이 남아도니까 여호와인지 뭔지 하는 신에게 예배드릴 생각이나 하게 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노역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 그런 생각할 여유조차 못 가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짚은 당시 진흙으로 벽돌을 만들 때 없어서는 아니 될 필수적인 재료였는데 그것을 공급해 주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그것을 조달해서 벽돌을 생산해 내도록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짚을 찾다 못해 곡초 그루터기를 모아서 대신 사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당연히 일은 더 힘들게 되고 벽돌 생산 속도는 더 느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애굽 비돔 국고성의 유적을 오늘날 조사해 보면 건물 아래쪽은 짚이 섞인 벽돌로 되어 있고 중간은 곡초 그루터기가 섞인 벽돌로, 그리고 위쪽은 아예 아무 것도 없이 그냥 흙벽돌로 되어 있는 것이 발굴되고 있다고 합니다.
하여튼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더 일을 많이 시키면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어쩌고 하는 생각은 곧 달아날 것이라는 계산에서 그처럼 명령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참된 신자와 불신자는 바로 사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줄 아는가 모르는가 여기에서부터 갈라집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는 것을 불신자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무슨 시간이 남아돌아서 하는 여가활동의 하나인 줄로 아는 사람들로서는, 모세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으면 온역이나 칼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라고 두려워하는 심정을 도무지 공감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세는 어느 쪽입니까?
혹 여러분들 중에서도 예배드리러 나오는 것을 세상만사 순조롭게 잘 돌아가고 집안일도 그리 바쁘지 않고 마음에 여유도 있을 때 그저 소일거리 하나 찾아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문제를 그런 정도로 여기는 교인이라면 사단이 걸고 넘어뜨리기란 지극히 쉽습니다.
뭐 사업을 폭삭 망하게 한다든지, 불치병에 걸리게 한다든지 하는 등의 큰 시험까지 사용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저 '벽돌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 하나'만 쏙 빼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기 상점이나 공장 천장에 빗물 몇 방울 갑자기 새게만 해도 주일 빼먹도록 하기에 충분할 것이고,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 하나만 내어도 예배 참석 거르는 핑계로 만들게 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신자라면 그 정도의 가벼운 잽에 쓰러져 버리는 못난 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예배드린다는 것이 뭐 대수로운 일이냐?'라는 생각은 곧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바로의 불신 사상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하나님이 누구냐?'라고 경멸적인 코웃음을 치는 사람은 바로 자기만 최고인 줄로만 알고 있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하는 사람은 '누가 나보다 더 높다는 말이냐?'라는 최악의 교만에 빠져 있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성경은 그처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 하는' 것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의 소리' 즉 '우문'일 뿐 아니라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고 더럽고 선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의 소리' 즉 사람이 입으로 낼 수 있는 가장 나쁜 '악문'(惡問)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모세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만 예배드리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목적 중에 하나가 되었던 것이며,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해 들이시기에 앞서 광야에서부터 먼저 당신 앞에 바른 예배드릴 줄 아는 백성으로 만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받은 백성이라면, 장차 영원한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는 성도라면, 우선 이 땅에서 영적 광야행진을 하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온전히 예배드리는 생활 정도는 그야말로 완전무결하고 철저하게 훈련이 되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역사상 오늘날의 우리만큼 예배생활의 자유를 누린 세대가 달리 있었겠습니까?
지금 현재에도 지구상에 우리보다 훨씬 더 먹고 살기 힘든 나라, 아니 암혈과 토굴 속에 숨어서 주일을 지켜야 하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적어도 이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은 예배생활에 게으르고 불충하는 죄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의 변명이나 핑계의 여지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세는 곧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불신의 죄악과 직결되는 것임을 한 순간이라도 잊지 말고, 이 불신사회의 온갖 시험과 방해공작을 극복하고 끝까지 온전한 예배생활을 지킴으로써 실로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신자임을 당당히 나타낼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나는 여호와로라'라는 말은 자기 백성을 반드시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대답입니다.
5장 19절 이하 23절까지에 "19이스라엘 자손의 패장들이 너희의 매일 만드는 벽돌을 조금도 감하지 못하리라 함을 듣고 화가 몸에 미친 줄 알고 20그들이 바로를 떠나 나올 때에 모세와 아론이 길에 선 것을 만나 21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22모세가 여호와께 돌아와서 고하되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으로 학대를 당케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내가 바로에게 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함으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처음에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찾아가서 하나님께서 내린 출애굽의 소식을 전달했을 때에는 그들의 반응은 4장 31절에 기록된 대로 그야말로 '아멘'이고 '할렐루야'였습니다.
하지만 일이 조금 꼬여나가기 시작하자 그들은 금세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모세 또한 낙심하여 "그(바로)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라고 원망의 말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명을 수행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의 말을 기쁨과 감사함으로 받고 그것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즉각적인 결과는 실망스러운 것들로 나타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 소식에 따른 흥분된 분위기는 일순간에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지도자 모세부터 시작해서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사기가 저하되어 모조리 주저앉은 꼴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순간에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들에게 그 출애굽의 구원 약속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6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에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에서 쫓아내리라 2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3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4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5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6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7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8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께서는 "나는 여호와로라"는 자기 확증의 선언을 두 번 반복하여 강조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나는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조금 바꾸어 표현하자면 "내가 누구냐? 내가 바로 여호와가 아니냐?"라는 뉘앙스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조금 전에 바로에게서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말 한 마디 듣고 그냥 풀이 죽어 버린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꾸짖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느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이제 내가 그 건방진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손 한번 조금 더 쓰면 바로는 꼼짝 못하고 너희를 어서 나가달라고 쫓아내다시피 하게 될 것이다. 두고 보아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가 낙심하고 맥이 빠져 있을 때,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팔소매를 걷어 부치시고 힘을 떨치시며 '내가 누구냐?' 하고 바로를 직접 상대하면서 나서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 못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에 하나님께서는 왜 그리 열심을 내고 계셨습니까?
그것은 곧 자기 백성을 향하여 스스로 세우신 언약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맹세, 즉 이 믿음의 조상들을 통하여 세워주셨던 그 언약을 결코 잊지 아니하고 기억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편에서 보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만약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들 편의 의지나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면 도무지 가망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낙심하고 마는 모세나 하나님의 약속의 확증을 재삼재사 듣고도 여전히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당신의 뜻을 결정하셨다면 어떻게 그들을 출애굽시켜 주실 마음이 드셨겠습니까?
하지만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 출애굽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언약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언약을 스스로 결코 깨뜨릴 수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자기 백성들이 그렇게 약하여졌을 때에 오히려 더 강한 손을 드심으로써 그 출애굽을 이루지 않으실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는 여호와로라"는 선포 뒤에 있는 내막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의로우신 대답 때문에 우리의 모든 구원의 소망을 붙잡고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약 구원의 여부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이었다면 이 자리에 앉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벌써 끝장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꼴을 보고 그대로 즉결처분을 내리시는 분이시라면 지금까지 그 앞에서 살아날 사람이 도대체 누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약할 때에나 우리가 의심하고 원망할 때에도, 우리의 그런 못난 모습을 보지 않으시고 오로지 당신께서 스스로 세우신 십자가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더 강하게 더 멀리 내밀어 주시는 주님이 분명히 살아 계시기에 저와 여러분은 소망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나는 아무개다'라고 남들 앞에서 자기 이름 석 자를 자신 있게 선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자기 이름에 따르는 명예를 귀중히 여기고, 자기 이름으로 베풀어 줄 수 있는 능력에 대해서 자신 있는 자만이 그처럼 자기 이름을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바로 그런 유일신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사람의 모든 의심을 파하시고 모든 불신을 부끄럽게 만들어 버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선언하심으로써 모든 우상을 헛것으로 단정해 버리시며 당신 앞에 감히 필적할 만한 어떤 다른 신을 아예 허용조차 하지 아니하시는, '유일하게 당신의 유일신 되심을 선포하시는 신'이십니다.
바로 이런 믿음직한 하나님께서 당신께서 구원하시기로 창세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늘도 당신의 강한 손을 사용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불안과 의심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목으로 삼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나는 여호와, 스스로 있는 자이다. 네가 나를 믿든지 안 믿든지 간에 나는 분명히 살아 있으니, 그 불신의 애굽에서 나오라."고 불러 주십니다. 특히 우리가 절망하고 탈진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더 강하게 역사하시며 "내가 누구냐?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내가 어떻게 내 사랑하는 자녀를 버릴 수 있겠느냐?"라고 약속하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어렵게 마음먹고 신앙생활 시작해 보았는데 그 즉각적인 결과가 여러분에게 실망으로 나타날 때가 있습니까?
모처럼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기로 작정하고 주신 직분과 사명을 따라 살기로 서원했는데, 오히려 일이 더 꼬여가는 경우를 당해 보셨습니까?
결코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앞에서 실로 당신께서 참 하나님 되심을 그 오묘한 섭리와 능력의 역사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보여 주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가 가장 약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강하심을 가장 똑똑히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연약과 낙심에 빠져 있는 자기 백성을 일으키시고 특히 당신을 섬기다가 핍박을 당하고 있는 자에게 든든한 위로와 확실한 소망이 되어 주시는 말씀이 바로 "나는 여호와로라"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깊으신 뜻과 지혜로우신 계획을 따라 택자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까닭에 실로 '현답'이며, 더 나아가서 사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죄인까지도 무조건 용서해 주시는 당신의 신기한 의로써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까닭에 실로 '의답'(義答)인 것입니다.
오늘도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 스스로 어길 수 없으신 당신의 이름을 걸고 자기 백성의 구원을 약속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자기선언을 듣고 믿고 의지함으로써 모든 시험과 의심과 핍박을 다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유명한 영화 '대부 제2부'에 보면, 나중에 마피아계의 거물이 되는 비토 꼴레옹(Vito Corleone)이 아직 젊었을 때 이런 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뉴욕의 한 모퉁이에서 서서히 뒷골목의 실력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에, 이웃집에 사는 과부가 자기가 세 들어 사는 집에서 쫓겨날 처지가 되었다고 그에게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꼴레옹은 곧 그 집주인을 찾아가서 그 과부를 쫓아내지 말고 그냥 살도록 해 달라고 짐짓 공손한 말로 부탁하면서 돈까지 줍니다.
그 집주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거절하자 그는 "나는 비토 꼴레옹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동네 이웃들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오."하고 돌아왔는데, 그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던 그 집주인은 "웬 별난 놈도 다 있네."하면서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를 찾아왔던 사람이 바로 자기 동네 뒷골목의 이름난 왕초인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그 집주인은 부랴부랴 꼴레옹을 찾아와서 코가 땅에 닿도록 굽실거리며 자기가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그런 장면입니다.
'나는 비토 꼴레옹이요.'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도대체 비토 꼴레옹이 어떤 녀석이냐?'라고 비웃었다가 뒤에 가서는 큰코다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 한번 잘못 알아보았다가 망한 점에 있어서는 옛날 애굽왕 바로가 단연 으뜸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조폭 두목 앞에서 "웬 별난 놈이냐?"라고 한 정도가 아니라, 살아계신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콧방귀를 뀌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결국 바로는 자기 맏아들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나라를 다 망치게 되는, 진짜 큰코다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하는 불신자의 조소의 소리와, '나는 여호와로라.'하는 하나님의 자기선언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우문은 당사자들은 가볍게 하는,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일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큰일 날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여호와'는 바로 천지만물과 온 인생을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호이기 때문입니다.
뒷골목 깡패 이름 몰라도 낭패를 당한다면 하물며 이런 절대주권자의 이름을 몰라 뵌 인생이 당할 벌은 오죽하겠습니까?
또한 비록 교인의 이름은 가지고 있다 하더라고 예배생활을 등한히 하고 구원의 언약에 진정으로 감사드릴 줄 모르는 사람은 아직도 '여호와가 누구냐?'라고 묻는 무지한 인생과 사실상 오십보백보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조차도 당신을 "전능의 하나님으로는 나타내셨지만"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알리지 아니하셨던" 분이십니다.
그런 귀중한 성호인 '스스로 계신 자'라는 이름을 이처럼 우리에게는 명백히 선포해 주시면서 그 이름 믿고 따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호와로라'는 이 하나님의 자기선언은 그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 눈앞에 나타나셨던 사건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하나님 살아 계심의 증거요 틀림없는 택자 구원의 약속이 아니겠습니까?
실로 '여호와가 누구냐?'라는 이 질문에 인생의 최악의 무지와 교만이 다 담겨 있는 줄 깨닫고, '나는 여호와로라'라는 이 하나님의 자기선언을 통하여 신앙의 지혜와 구원의 확신을 얻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