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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하시는 하나님 (계19:3-8)
두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야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요한계시록 19 : 3-8
사람들은 통치 없는 세계를 요구합니다. '통치'라는 말은 '제재한다''제한한다'는 말입니다. 즉 제재하지 않고 제한하지 않는 세계를 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받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자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섭 없고 통치 없는 가정을 원합니다.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것하라, 저것 하라'고 일일이 간섭하고 제재하고 제한하니까 싫어합니다. 자녀들이 탈선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가정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학생들도 통치없는 학교를 원합니다. 선생님들이 간섭하지도 않고 시험을 잘 보든 못 보든 상관하지 않는 학교를 원합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분명히 잘못한 것을 가지고 야단치고 회초리를 들 것 같으면 그냥 도망간답니다. 그러면 때린 그 선생님이 그 학생을 찾아와야 한다고 합니다. 선생 노릇 하는 것도 못할 짓입니다. 선생님들이 무슨 죄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통치없는 세상은 문란하며 무질서합니다. 더 나아가 불행합니다. 통치를 받지 않는 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그것은 방종으로 흐르게 되고 결국 멸망으로 치닫게 됩니다. 통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게 하나님은 자연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1 : 28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연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를 위임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큰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자연을 통치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1. 인간의 통치
인간의 통치는 세상의 통치를 말합니다. 이 세상의 통치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왕의 제도가 있고, 수상 제도가 있으며, 대통령 제도가 있습니다.
지금도 왕이 통치하는 나라가 있습니다만 과거에는 왕이 통치하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과거에는 왕이 통치했습니다. 아직도 왕의 제도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나라가 있는데 일본과 영국과 모로코가 그런 나라입니다. 또한 수상 제도의 나라가 있습니다. 왕은 상징적으로 있으면서 수상이 통치를 합니다. 일본과 영국이 그런 나라입니다. 그리고 대통령 제도가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이 대통령제도에 의해서 나라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제도는 인간에 의해서 통치되어집니다.
인간의 통치는 법으로 이루어집니다. 법은 제재하고 제한하는 것입니다. 만약 법이 없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일 것입니다. 세상의 법은 가면 갈수록 강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점점 악해지기에 그렇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법을 무시하여 더 악한 짓을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연방 제도로 된 나라입니다. 그래서 각 주에 행정부가 있어서 주를 통치합니다. 주마다 법이 다릅니다. 어떤 주는 사형법이 있는가 하면 어떤 주는 사형법이 없습니다. 사형법이 없는 주는 더 타락하고 문란하기 짝이없습니다. 이 세상은 법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개인뿐만 아니라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법이 있고 통치가 있어야 질서가 유지됩니다.
통치가 있는 곳에서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지도자를 잘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지도자의 부재라고 합니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 위대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국가나 백성보다도 먼저 자기를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나 백성은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는 듯한 지도자도 있습니다. 이는 나라를 망치는 사람입니다. 당연히 지도자라 하면 먼저 국가의 장래를 생각하고 자기의 안락과 번영을 생각하기 이전에 백성들의 번영을 생각해야 되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우리 나라는 유엔(UN)에 가입했습니다. 유엔에 가입하기까지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유엔에 가입했으면 유엔의 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계 질서가 무너지고 맙니다. 북한은 유엔으로부터 핵 사찰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평화가 깨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와 같이 법으로 다스려집니다.
2. 마귀의 통치
인간의 법 곧 세상의 법은 육체를 다스립니다. 몸으로 범죄한 것을 다스립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으로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죄를 저지른 것은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마귀의 법은 인간의 마음을 다스립니다. 인간의 몸은 마음에 의해서 움직여집니다. 도적질할 마음이 없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도적질을 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없으면 살인하지 않습니다. 도적질할 마음이 있으니까 도적질하는 것이요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있으니까 살인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마귀입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사람의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집어 넣어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가룟유다는 자시 스승인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바로 그 팔려는 마음은 마귀가 준 것입니다. 요한복음 13 : 2에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 유다가 본래 예수를 팔려고 한 것이 아니라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마음을 유다의 마음에 넣으므로 팔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선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마음도 선합니다. 그런데 아담이 사탄의 시험에 넘어가 범죄한 이후에 모든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 : 1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2절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공중의 권세 잡은 자"와 "불순종하는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마귀인 것입니다. 이 마귀가 사람의 마음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귀에 의해서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성령에 의해서 지배를 받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다가 죽은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은 자기의 소유를 팔아 하나님께 바치기로 하고 사도들 앞에 가지고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소유의 전부를 바치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밭을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는 전부를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속였습니다. 베드로는 이미 그들이 가지고 온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 5 : 3에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고 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얼마를 감춘 것은 마귀에 의해서 된 일입니다. 가룟유다에게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던 것처럼 마귀가 감출 마음을 아나니아에게 넣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마귀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육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체는 마음에 의해서 움직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는 살인자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요한복음 8 : 44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본래 살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살인하는 것은 살인자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괴로운 것입니다. 거짓말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죄도 내가 짓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악한 일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악을 행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로마서 7 : 19이하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면 그것을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법과 마귀의 법이 싸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로마서 7 : 21 이하에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죄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요한일서 3 : 8에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한 자입니다. 이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양심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 양심도, 신앙 양심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마귀로 틈타지 못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은 영을 지배하시고 통치하십니다. 마귀는 마음을 사로잡아서 육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을 지배하여 마음과 육체를 다스립니다.
오늘날 누구나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할 것입니다''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면 모두 좋아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좋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믿되 하나님의 통치는 싫어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제재하시며 제한하시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책망하고 경고하는 말씀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명령하거나 지시하는 말씀을 싫어합니다. 나를 자유스럽게 그냥 놔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언제나 자기를 편하게 하고 위로하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제멋대로 갈때는 육체를 쳐서라도 돌이키게 하십니다. 하나님보다도 물질을 사랑하고 물질을 더 추구하면 물질을 빼앗아가시기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제멋대로 하면 멸망에 빠지게 됩니다. 물질을 사랑하고 세상을 따라가면 방탕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담도 하나님의 통치를 싫어했습니다. 창세기 2 : 16,17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는가, 왜 하나님께서 다른 것은 마음대로 하도록 하시면서 선악과만은 제한하시고 제재하시는지 아담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창세기 3 : 6에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지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먹은 것입니다. 그 선악과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열매가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따먹은 것은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싫다면 교회는 왜 다니는 것입니까? 말씀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우리는 영적인 통치를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통치가 없는 세계 곧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에 들어가면 제한하고 제재하는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에는 유혹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육을 가진 존재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죄를 짓습니다. 그러므로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이유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 : 23에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시기"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치하심은 우리를 온전케 하시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은 사람은 통치가 없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치를 거절한 사람은 계속해서 통치가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치하시되 세상 법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책망합니다. 또한 우리로 바르게 합니다. 그리고 의로 교육합니다. 디모데후서 3 : 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로 교육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17절에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봅시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합니까?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광도 없고 능력도 없으며 구원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봅시다.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하나님께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본문 5절에 "보좌에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본문 6절에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면 7절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공중 혼인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본문 7절 하반절에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9절에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는 하나님과 영원히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세토록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통치는 우리에게 큰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도 다스림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께 위임받은 지도자들이여, 먼저 다스림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고, 진리로 다스림을 받고, 자기 양심으로 다스림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자기도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나님의 간섭 속에 말과 생각과 마음과 행동 일체가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출처/김충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