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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행복한 사람(1)-크리스챤 (전도서 3:11~13)
예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다가 삭개오라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는 여리고 세관을 책임지고 있는 세리장이며 또한 재산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자기 집에 들어오신 예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어쩔 줄 모를 정도로 감격해 하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자기의 재산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세리장의 직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토색한 것을 4배나 갚겠다고 하였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많은 재산을 소유하고 세리장의 권세를 휘두르면서 살았지만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마음의 평안과 행복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습니다(눅19:8-9). 그리스도인으로 회복된 사람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자체가 행복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재물과 권력 같은 세상적인 요소를 다가지고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지만 그리스도인 에게는 그런 것과 상관없는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I.불행의 원인을 아는 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는 신체적인 악조건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말합니다. 더러는 다른 사람에 비교하여 소외되고 비천한 위치에 있다고 하여 스스로를 불행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질병이나 신체적인 장애를 가지고도 건강한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평안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그중에는 「살아 있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산과 상관없이 청빈한 생활을 하면서도 부자가 부럽지 않는 만족을 누리는가 하면, 소외된 곳에서 스스로 비천한 자가 되어 남을 섬기면서도 권력자 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자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이나 재물이나 권력 그 자체가 불행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질병이나 가난이나 낮은 신분의 섬김 자체가 행복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가 없는 그 어떤 것도 행복일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건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예수가 있으면 행복이고 예수가 없으면 불행인 것입니다.
예수가 없는 사람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불행은 고독(孤獨)이라고 말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는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였습니다. 홍수가운데 갈증이 있다고 하듯이 아이러니 하게도 오늘날 첨단문화의 이기(利器)속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독이라는 병을 앓고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안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죄 라고 규정합니다. 죄는 인간을 낙원의 행복으로부터 단절시키고 고독의 울타리 속에 가두어 버렸습니다(창3:22-24).
(1)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가까이 하시고 이름을 부르며 찾아 주셨지만 범죄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며 숨어버렸습니다(창3:10). 이것은 인간이 불행의 원인이 되는 고독의 밀실에 갇혀 버린 행위입니다. 그 이후부터 눈이 밝아져서 벗은 몸을 보고 쾌락을 즐기며, 하나님처럼 높아지는 것 같은 자기 과신에 도취되기도 했으나 그 마음을 억누르는 불안한 상태를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와 같은 현상을 인간의 상실된 모습이라고 하였습니다(롬1:28). 선지자 이사야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고독 속에 허덕이도록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사59:2). 본문말씀 11절에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은 영원을 향한 마음의 욕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2)인간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지어놓고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시며 여자를 만들었습니다(창2:18). 이후부터 사람은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회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후 사람과 사람사이를 갈라놓았습니다. 부부간, 부모 자식간, 형제나 친지 또는 이웃 간에 벽을 쌓고도 그것이 불행인줄 모르는 것입니다.
최초의 사람 가인도 죄가 문에 들어온 후 동생을 죽이는 골육상잔의 불행을 저질렀습니다(창4:7-8). 인류 최초의 동맹으로 시도했던 바벨탑 운동 역시 죄로 인하여 무산되었습니다. 그들이 시날 땅에 도시를 건설하고 거대한 금자탑을 쌓고자 하였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대화의 벽이 생기면서부터 혼란에 빠져버렸습니다(창11:7-8).
(3)자기와의 단절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투절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소외를 느끼게 되면 결국 자신에게도 실망을 하며 회의에 빠지고 맙니다. 곧 자기가 자기를 신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불신 하는 사람은 어느 것에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원망과 불평의 늪에 허덕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죄 문제에 기인합니다. 죄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거기에 포위당한 채 모든 것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의 과거 경험을 말하면서 “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2-24).
II. 행복의 비결을 아는 자입니다.
흔히 네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하고 세잎 클로버는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나폴레옹이 전쟁터에서 우연히 발밑에 있는 네잎 클로버를 발견하고 그것을 따기 위하여 허리를 굽히는 순간 머리위로 총알이 지나 갔다는 것입니다. 이후부터 사람들은 흔치 않는 행운의 네잎 클로버를 찾느라 행복의 세잎 클로버를 짓밟고 다닙니다. 이것은 인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행복의 요소들을 무시한 채 실체도 없는 행운을 찾아 엉뚱한데다 인생을 허비해 버리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행복의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였습니다(마 13:11).
(1)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20에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 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73:28에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백성에게 진노하시고 징벌하기도 하시지만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치료시키는 분입니다(출15:26).
구약의 호세아는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호6:1).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인줄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되 그 방법을 몰라 엉뚱한 길로 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기쁘시게 해 드리는 자를 찾으시고 그와 동행하여주십니다.
옛날 에녹이나 아브라함이나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모든 역경에서 승리한 축복의 인물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드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비결은 믿음입니다(히11:5-6).
(2)사람과 화목 하는 일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셨습니다(눅2:52). 솔로몬왕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16:7).
사람들 중에는 가족들과 불화 하거나 친구에게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있고, 교회 안에서도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 문제를 풀어가려는 노력을 할 때 해답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나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를 비우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게 됩니다. 로마서 12:16에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고 하였습니다. 빌립보서 2:3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24에는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남의 유익을 구하며 모든 일에 덕을 세우도록 힘쓰라”고 하였습니다.
(3)자기와의 화목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잃어버린 자신을 도로 찾으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거라사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8:27에 보면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옷을 벗은 것은 사람의 품위를 잃은 상태요, 집에 거하지 아니한 것은 가정의 평화나 행복을 멀리한 것이며, 무덤사이에 거하는 것은 죽음의 도시에 갇혀 삶의 즐거움을 포기해버린 현대인의 불행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잃어버린 자기를 되찾았습니다.
상실된 인간이 자기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되면 자기의 존재의미나 가치를 알게 되고 삶의 목적을 향해서 자신 있는 걸음을 걸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하였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자기를 회복하고 그의 삶을 행복하고 활력에 넘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가능한일입니다.
III.행복한 사람의 모델이 되는 자입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신 행복을 최대한 누리며 즐길 수 있도록 그 가치를 깨우쳐 줍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 중에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 잘 몰랐으나 교회 다니는 사람의 얼굴에서 너무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범한 삶속에서 배어나오는 행복의 향기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1)영혼의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본문말씀 11절에 보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의 욕구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3:9에는 이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상적인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본문성경을 기록한 솔로몬왕은 자기의 삶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행복의 실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도서 2:24에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 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자기보다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였습니다(25절). 전도서 3:13에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을 또한 알았도다”고 하였습니다. 위대한 신앙가 다윗도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진수성찬으로 풍요로운 음식과 차고 넘치는 잔을 주셔서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시23:5).
(2)행복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우리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장된 축복이 있지만 이를 누리는 행복이 없다면 그것은 축복일수 없습니다. 성도에게는 하늘나라 영원한 집에서의 복락이 보장되어 있고(히11:16), 동시에 세상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참으로 천당의 소망으로 영원한 행복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교회생활이나 가정생활 또는 사회생활 등 어떤 경우에도 주님과 함께 하는 최상의 행복을 즐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어떤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행사되는 전천후(全天候)의 은혜입니다. 옛날 하박국은 이방나라의 횡포가 극심하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수난이 그치지 않았지만 그 자신은 행복에 넘치는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하박국 3:17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3)행복의 공여자(供與者)가 됩니다.
어느 곳에서나 성도는 그 시대 사람들에게 또는 후세 사람들에게 행복을 누리게 하여 줍니다. 축복의 사람 아브라함은 그의 삶을 통하여 오고 오는 후손들과 천하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공여자가 되었습니다(창22:18).
요셉도 그런 인물입니다. 창세기 39:2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자가 되었더라”고 하였습니다. 5절에는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게 미친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자기한사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에게 파급되는 효과 또한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행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며 자라납니다. 행복한 학교, 행복한 선생님 밑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그의 정서 속에 행복의 도리를 익히며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축복받은 사장의 행복한 모습이야말로 모든 사원과 그 가족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출처/손상률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