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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23:34-43, 마27:45-54
지난 수요일 새벽 제 자리에 앉아서 잠시 기도하는 가운데 다음 주일 무슨 설교를 하면 좋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고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와 “죽음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부활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나 “천국의 기쁨과 축복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가상 칠언”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고난 주간을 앞두고 “가상 칠언”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주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상 칠언”이라는 제목으로 2년 전 종려 주일에도 설교를 했고, 5년 전 종려 주일에도 설교를 했는데, 또 그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교인들이 싫어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저에게 이런 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상 칠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백 번 해도 좋다.”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마지막으로 간절하고 처절하게 하신 일곱 마디 말씀은 백 번 들어도 좋고 천 번 들어도 좋다” 라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가상 칠언”에 대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2002년 3월 24일 주일에는 "나를 위한 가상 칠언"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고, 2005년 3월 20일 주일에는 "가상 칠언에 나타난 예수님의 사랑" 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도 있지만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도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님의 사랑에는 로맨틱한 감미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 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데 그 사랑이 나타났을 때 하나님께서도 우셨고 예수님께서도 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아파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슬퍼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슬퍼하셨습니다. 아니 온 우주가 얼굴을 가리고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태양이 얼굴을 가렸습니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졌다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을 바라볼 때 우리들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과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제가 여기까지 원고를 썼을 때 저의 가슴과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비극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십자가를 대하면서도 가슴에 탄식이나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신자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음악가 파블로 카잘르는 파리에서 처음 “마태 수난곡”을 듣고 십자가의 죽음을 느끼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아 두 달 동안 아팠다고 합니다. 너무 슬퍼서 당장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독일의 진젤돌프 백작은 박물관에 걸려있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무릎을 꿇고 울었는데 박물관 문이 닫힐 때까지 울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상태에 따라서 "가상 칠언"에 대한 반응이 각각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곱 마디를 들으면서 통곡을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감정도 지니지 못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도 진한 사랑에는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이 나타나곤 합니다. 제가 가슴에 지니고 있는 진한 사랑은 아마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어린 아들 철원이에 대한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에는 비극적인 아픔과 슬픔이 가득가득 나타났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도 저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이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철원이의 가슴에도 저의 가슴에도 아픔과 슬픔이 진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십자가의 사랑을 생각할 때 그리고 어머니와 철원이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 가슴에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일곱 마디를 한 마디 한 마디씩 들으며 가슴에 새겨보겠습니다. 그 일곱 마디들은 우리들을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우리들은 그 말씀들 때문에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았고 지금 이곳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과 저를 위해서 하시는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을 바로 듣고 바로 마음 속에 받아 드릴 때 강도에게 임했던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가 임할 것이고 사도 요한과 막달라 마리아에게 임했던 뜨거운 사랑의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일곱 마디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씩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마음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23:34).
"Father, forgive them."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을 향해서 하신 기도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은 도저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대역 죄인입니다. 지옥에 가도 지옥의 밑 바닥에 갈 대역 죄인입니다. 그런 대역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우주의 질서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아마 천사들도 모두 합세해서 “그것만은 안됩니다” 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독생자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었지만 독생자를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느니라”(요3:16-18). 그런데 독생자를 믿지 않을 뿐 아니라 독생자를 잡아서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한 말을 번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신의 뜻에 위배되는 호소의 기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기도를 들으시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로마 군인들이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런 주님의 기도 때문에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사울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마펫 선교사의 턱을 돌로 쳐서 쓰러뜨린 이기풍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고, 한 평생 주님을 무시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여러분들과 저도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주님의 기도 때문에 지금 여러분들과 제가 죄 사함과 구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Father, forgive them." 이 기도는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해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용서의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에게 해를 끼친 아무 아무개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Today, you will be with me in paradise."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 곁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는 강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도 하나님의 공의에 위배되는 말씀이었고 주님 자신이 하신 말씀에도 위배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이 임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예수님은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1,24). 예수님은 또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했습니다(마25:46). 그런데 이 강도는 회개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신앙 고백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선행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자기가 한 모든 말씀을 어기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를 간절하게 소원하시면서, 강도의 신음 소리 한 마디를 듣고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의 신음 소리는 ‘예수여 나를 생각하소서’ 라는 한 마디뿐이었습니다. 자기의 말과 자기의 체면에 위배되는 말을 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고 안타까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의 가슴에는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 때문에 강도를 비롯한 수 많은 범죄자들이 용서함을 받고 낙원에 이르는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수 많은 살인 강도들이 이 말씀 때문에 지옥에서 옮겨 낙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말씀 속에는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19:26-27).
"Woman, behold, your son."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아래서 슬피 우는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자기 때문에 한 평생을 가슴에 칼이 찌르는듯한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당하신 인간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하신 슬픔과 아픔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들로써 어머니를 제대로 효도하지도 못했습니다. 어머니 한 분을 위해서 살지 못했고 수많은 죄인들을 위해서 사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예수님으로써 인간 어머니 앞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참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 때부터 요한은 성모 마리아를 자기의 어머니로써 모셨습니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요19:27). 이 말씀은 요한 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성모 마리아에게 하신 슬픔과 아픔과 위로의 말씀이었지만 동시에 이 세상에서 이별의 슬픔과 죽음의 아픔 가운데서 슬피 울면서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신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슬픔과 아픔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셨습니다. 나인성 과부를 위로하셨고 나사로의 누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인정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때문에 슬픔 가운데서 위로를 주고 받으며 외로움 가운데서도 효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슬픔과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아무개여 보소서 그대는 나의 형제요 자매입니다. 그대는 나의 부모요 나의 자녀입니다."
4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마27:46).
이 말씀의 뜻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인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경험하신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극치를 나타내 보여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시고 버림 받게 되신 비극을 절규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의 극치였고 모순의 극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을 뒤집어 엎는 비극의 절규였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말씀 속에 비극적인 사랑의 극치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 절규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대신 부르짖은 절규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해야 하고 버림을 당해야 하는데 주님이 나대신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화란의 유명한 신학자 스킬더 박사는 이 비극의 극치는 지구상에서 사는 인간은 아무도 헤아릴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비극의 극치였다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지구 상에 살던 모든 인간들이 모두 함께 지옥에 내려가서 지옥의 고통을 당한 후 그 모든 고통을 한 곳에 쌓아 놓아야 알 수 있는 극치의 고통이요 총화의 고통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고 부르짖었을 때 예수님은 극치의 고통과 총화의 고통을 당하셨고 극치의 슬픔과 총화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그 극치의 고통과 극치의 아픔과 극치의 슬픔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죄 사함과 구원의 축복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버림을 받는 비극을 감수하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아무 아무개 때문에 나를 버리셨나이까."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I thirst."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며 목마름을 토로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 인간의 모든 목마름을 대신 감수하신 우주적인 목마름이었습니다. 내가 목 말라서 소리 지르는 나의 목마름의 소리를 대신 지르신 것이었습니다. 내가 목말라야 하는데 주님께서 나 대신 목마르신 것이었습니다. 수가성 여인 대신, 십자가에 달린 강도 대신, 간음한 여인 대신, 그리고 우리 모두 대신 목마른 목마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지옥에서 목 말라야 할 목마름을 대신 당하시면서 "내가 목 마르다" 라고 부르짖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목마름은 목마름과 애탐의 극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 상에서 목 마르셨으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천국에서 목 마름을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를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I thirst." 이 말씀은 또한 우리들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대신해서 목마른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가 목 마릅니다. 여기 아프카니스탄의 형제들과 함께 내가 목 마릅니다."
6 "다 이루었다"(요19:30).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므로 자기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만족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엄청난 해산의 고통과 아픔을 지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인이 아기 하나를 출산하는데도 피와 땀을 쏟으면서 심한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데 하늘의 별과 같이 수 많은 자녀들을 출산하시면서 물과 피와 생명을 다 쏟으신 주님의 고통과 아픔은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극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제물이 되시므로 우리들이 이루어야 할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죽음의 일들을 다 이루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 대신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사역을 극치의 수고를 하시므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순종도 우리의 헌신도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봉사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죽음도 다 이루어주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It is finished." 이 말씀은 만족과 기쁨의 이루심이었던 것과 함께 수고와 고통과 아픔의 이루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하면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목적과 뜻을 이루며 살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아가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나는 부족하지만 저들이 이루어야 할 일들을 대신 이루며 살게 하시옵소서."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예수님은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지녔을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지금 엄청난 고통과 아픔과 슬픔을 당하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나 십자가에 달린 강도처럼 즉시 낙원으로 들려 올라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 순간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시는 고통의 순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사53:12).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운명하신 다음 옥에 가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셨다고 했습니다.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벧전3:19).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교회에서는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께서 지옥에 가셨던 일이 있었다"고 해석합니다. 영어로 된 사도 신경은 “He descended into hell”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죽음이 평안한 죽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당하고 버림을 당하는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옥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형벌의 죽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끊어짐의 고통과 슬픔과 저주의 죽음을 머리에 그려보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2,3). 예수님은 지금 자기의 영혼을 사망에 버리는 저주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렇게 호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그러므로 이 호소의 말씀 속에도 비극적인 사랑이 나타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상에서 하신 주님의 일곱 마디 말씀들 속에는 모두 사랑의 고통과 사랑의 아픔과 사랑의 슬픔이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비극적인 사랑이고 예수님의 비극적인 사랑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하신 “가상 칠언”의 말씀들을 한 마디 한 마디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비극을 감히 헤아려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논리를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저 ‘비극적인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엎드려서 겸손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됩니다. 겸손이 엎드려서 그 말씀들을 조용히 들으면 됩니다. 파블로 카잘르처럼 진젠돌프 백작처럼 무릎을 꿇고 그저 바라보며 들으면 됩니다. 십자가와 가상 칠언에 나타난 비극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에 깊이 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김명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