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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12:12-13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천년전 오늘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한 지방사역을 다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수님은 아주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일생가운데 가장 화려한 날이었고 가장 열렬하게 환영을 받은 날입니다. 그날의 환영은 일반적인 차원을 넘어서 국민적인 환호였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열광적으로 환호했다고 했습니다.
오늘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종려나무는 이스라엘민족에게는 거룩함의 상징이고 승리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들을 맞을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개선장군 즉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하고 환호한 것도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 인사드리는 말로 기쁨과 탄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이시여”하고 외친 것은 예수를 왕으로 메시아로 고백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날 메시아로, 왕의 자격으로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2천 년 전 오늘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3년 동안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자들과 함께 당당하게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이번 주간이 고난주간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가랴 9:9에서 예언한 것처럼 “메시야로서의 개선하는 입성”입니다. 그러니까 스가랴서 9:9절의 예수님이 장차 태어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제물로서 죽임당하기 위한 입성”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장차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어린 양처럼 죽임당하고 고난당하리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종려주일부터 시작해서 고난이 시작됩니다. 그것도 성경에서 예언된 내용들이 성취되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날 예수님은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습니다. 이 날을 위하여 사람들은 전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가 하면 그 다음날이 유대인들의 유명한 유월절 명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주석자들은 그날 270만 명이 모여들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조그만 도시에 그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때 드려진 유월절 제물만도 256,500마리의 양이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해 유월절 명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의 학대에 대한 분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희망이 없던 시대였습니다. 로마로부터 억압과 착취와 억눌림을 당해서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의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았던 유대인들의 유일한 낙은 명절 때 모여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 해도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일제 때 우리민족이 농사지으면 착취당하듯이 그들도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들이 일본이 너무 강해서 손을 쓸 수도 없고 그래서 눈뜨고 다 빼앗겼습니다. 농작물만 빼앗긴 것이 아니고 숟가락도 이름도 심지어는 처녀들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그렇다고 대항해 보자니 힘은 없고 그래서 허무를 말하며 비탄하며 부른 노래가 “울밑에선 봉선화야“이었습니다. 거기다 명성황후는 시해당하고 나라는 합병당하고 황제는 끌어내림을 당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일본이 너무 크고 강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심정이 바로 그 심정입니다. 로마를 향해서 분풀이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모두 무자비하게 죽였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에서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서 개발한 형틀입니다. 반란군이 발생하면 잡아다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며칠씩 거리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누구든 보아라, 로마에 반란하면 이렇게 된다 하고 위협하였습니다. 그러니 힘이 약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270만 명이나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은 것입니다. 모여서 동질성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받고 하소연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기대
당시 사람들은 오직 하늘만 쳐다보았습니다. 약소민족으로서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는 너무 컸습니다.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메시야 대망사상이 강해졌을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오리라고 약속된 메시야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나타나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이심전심으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일제 때 우리민족에게도 그런 소망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될 즈음에 “이제는 일본이 망한다”는 느낌의 공감대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심전심으로 형성되었었습니다. 그것이 민심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의 심정이 그랬습니다. “지금쯤 메시야가 타나날 때가 되었는데” 그것이 당시 민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민심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이 민심은 하늘이 주는 마음입니다. 민심은 이심전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이 민심을 사람들은 천심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사람들이 그렇게 전국각지에서 많이 모인 것은 그런 이심전심의 영적 감정 때문입니다.
예수의 출현
그때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람이 예수입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였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고쳤습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하게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소경된 자가 눈을 떴습니다. 38년 동안 고침 받지 못하던 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분명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였습니다. 메시야가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것은 죽었던 나사로를 살려낸 사건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은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습니다. 이 소식이 입에서 입으로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자연히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날 예수님의 입성은 개선장군 맞이하듯 왕의 대관식 하듯 유대인들은 예수를 열광적으로 환영인파에 둘러싸인 채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얼마나 큰 기대를 했겠습니까. 성경의 예언을 보면 장차 메시아가 오시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자유가 주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이제는 거대한 로마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존심도 되찾게 됩니다. 잃어버린 주권도 회복이 되고 이제는 모두 큰소리를 치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대가 컸겠습니까.
저 예수는 분명 할 수 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쳐냈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귀신들도 예수에게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눈먼 자도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나병환자도 깨끗하게 하였고 앉은뱅이도 일으켜 세웠습니다. 틀림없습니다. 볼 것도 없습니다. 예수는 분명 그렇게 기다리던 오리라고 예언된 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고 입성하시는 예수일행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눈물 흘리는 예수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환호할 때 예수님은 마냥 기뻐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제 4-5일 후에는 저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 눌려있는 동포들, 백성들, 저들은 지금 정치적인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당장 나서서 정치적으로 행동해 주기를 바라고 로마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고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한 마리의 양이고 제물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이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고 무력하게 끌려갈 때 저 군중들은 그 입으로 저를 죽이라고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죽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사람들이 침 뱉고 야유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때 보이지 않는 눈물을 마음으로 하염없이 흘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예수께 큰 기대를 하고 아주 큰 선물을 줄줄 알고 목이 터져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하고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는 마침내 무력하게 죽어갔습니다. 너무나 허무하게 십자가를 지고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까 실망한 군중은 이번에는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예수 믿으면 큰 복을 받고 형통하고 수지맞고 건강하게 될 줄로 믿고 열심히 신앙생활 했는데 그런데 결과가 정반대일 때 사람들은 그렇게 돌아섭니다. 그리고 실망의 차원을 넘어서 유대인들처럼 저를 죽이라고 고함을 칩니다.
이 신앙인의 길에는 형통도 있습니다. 건강도 주어집니다. 잘됨도 있습니다. 물론 축복도 주어집니다. 그런데 신앙의 길에서 그것만 생각하면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고난 받고 십자가를 지는 일이 하나님의 뜻이고 축복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에는 형통도 있고 평안도 있지만 때로는 자기를 부정하는 일,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고난의 일도 함께 따라옵니다.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복은 형통이나 잘됨이나 건강만이 복은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이런 것을 가리켜서 값싼 복이고 값싼 은혜라고 말합니다. 어떤 신학자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값싼 은혜를 사모한다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너무 이생의 복을 간구한다는 지적입니다. 신앙의 길에서 주어지는 진정한 복은 내가 예수를 앎으로 스스로 그분이 졌던 십자가를 내가 질 때 내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삶, 그것이 복입니다. 내가 무거운 십자가를 졌는데 오히려 내 마음은 편안한 것, 그것이 복입니다. 또 주님이 그때 지셨던 십자가가 오히려 내가 져야할 십자가임을 알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화려하고 풍부하고 높이 올라가는 것은 분명 복입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또 내가 그렇게 올라가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그런데 깊이 생각해 보면 반드시 그것만이 복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습니다. 때로 죽음도 엄청난 은혜요 축복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은 이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좀 불결한 이야기지만 배설물도 한번쯤 쳐다보아야 합니다. 때로 냄새도 맡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배설물을 통해서 내 몸 안의 상태나 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모두 수세식으로 되어 있어서 배설물을 보기도 전에 그냥 내 보내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야 내 몸 안의 내면의 모습을 배설물을 통해서 알 수 있는데 모르고 살아가다가 어느 날 큰 불행을 당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죽음을 모르고 기피하려 하기 때문에 똑같은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죽음도 이제는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죽음이 가까이에 없고 죽는 모습도 볼 수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중환자실에서 혼자 죽어갑니다. 간혹 병실에서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드문 현상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이제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산교육이 없어진 셈입니다. 전에는 병풍을 사이에 두고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있었습니다. 전에는 문지방 너머에 지척에 죽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엄숙함이 있었고 두려움이 있었고 실존의 모습이 있어서 인생의 가장 깊은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죽음은 영안실에 있기 때문에 가 봐도 죽음을 보고 만나질 못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시대는 죽음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삶이 있으면 그곳에는 죽음도 있습니다. 삶 자체는 죽음입니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반드시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죽음을 말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심오한 죽음이 예수님의 고난이고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탄생할 때부터 동시에 언급되었습니다. 예수께서 태어나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갔을 때 늙은 신앙인 시므온이 말합니다. “시므온이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마리아에게 이아들에게는 장차 가슴을 찌르는 아픔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을 말해왔습니다. 그런 예수의 죽음은 어떤 죽음인가 하면 “너를 위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삶은 “너를 위한 삶”이었고 동시에 예수의 죽음은 “너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삶이었고 예수님의 죽음이었습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인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죽으신 후에 이 죽음을 따라 죽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죽음은 아주 불가능한 죽음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토록 무능하게 보이던 제자들이 성령강림후 모두 성숙해진 믿음의 모습으로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스데반이 또 예수님처럼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서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 저 우매함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며 죽어갔습니다. 사도바울도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초대교회 때의 신앙의 선구자였던 폴리캅도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는 화형에 처해지면서도 의연하게 성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많은 불신자들과 이방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죽어갔습니다. 예수께서 의연하게 죽어가던 그 모습대로 말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순교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도 한결같이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욕을 하고 발악을 하고 죽어간 것이 아니고 모두 의연하게 죽어갔습니다. 모두들 예수님의 모범적인 죽음의 모습을 본받아 그렇게 죽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에는 또 다른 유형의 죽음도 있습니다. 일본에서 지하철에 떨어진 사람을 구해내고 미처 피하지 못해 죽은 김수연씨 같은 죽음입니다. 이 사람의 죽음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하게 해 주는 그?죽음입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들이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이 감동만 받은 것이 아니고 충격도 받았습니다. 왜 일본인들은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저 한국인은 그 위험한 길로 뛰어 들어갔는가 하고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러기에 일본인들은 감동도 받았지만 충격도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은 또 다른 유형의 죽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장기를 떼어주는 장기기증자들의 모습입니다. 며칠 전에 우리교회에서 10여명의 장기를 기증한 분들을 모시고 간담회를 가졌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간을 떼어주고 콩팥을 떼어주고 골수를 이식시켜준 분들입니다. 자기 가족도 아니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두 개의 장기가운데서 하나씩을 떼어 준 것입니다. 그것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순전히 예수의 이름으로 조건 없이 나누어 준 것입니다. 이 행동들은 모두 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너를 위한 수고였고 너를 염려한 마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과 죽음에서 진정한 삶과 진정한 죽음을 보게 됩니다. 그 삶과 죽음은 순전히 너를 위한 삶이었고 너를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범적 삶과 죽음은 마침내 이 땅의 많은 평범한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과 뜻을 이어받은 제자들을 통해서 그대로 구현되고 재생되고 전파되고 있습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