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8:1 ~ 10
  
안식일이 다하여가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수직하던 자들이 저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 쌔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10

   무신론자인 영국의 어느 작가가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 그 느낌을 이렇게 썼습니다. “무덤 앞에서 한마디 기도도 없었다. 사람들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가벼운 관에 넣은 시신을 아무런 예식도 없이 가져다가 구덩이 속에 넣었다. 그것은 마치 상한 고기를 눈에 보이지 않게 서둘러서 치워버리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슴이 얼어붙은 심정으로 그곳을 떠나왔다.” 무신론자가 무슨 기도를 하겠습니까? 무슨 말로 위로를 하고 무슨 소망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면 그 시체에게 무슨 의미와 위로와 미래와 평화가 있겠습니까? ‘상한 고기’라는 표현이 좀 심하지만 사실 하나님 없이는 시체는 그저 썩은 고기와 다름없습니다.

   목회자들은 종종 장례식을 인도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소망 없이 떠날 때 그 유족들의 비통한 울음소리는 가슴을 찢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다시 만날 기약도 없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한국의 토속신앙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어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배회하다가 후손들이 제사상을 차려주면 와서 술 한 잔, 음식 한 조각 드시고 다음 제사 때까지 또 우주 어딘가를 떠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제사를 드리지 않는 후손에게는 재앙을 일으킨다나요.

   그러나 2천 년 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래로 죽음에 대한 인간의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죽음, 부활로 세계의 역사가 달라졌고, 인간의 종말 개념이 달라졌고, 죽음 속에서도 희망과 위로와 평화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생명을 통해서 인류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을 갖고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믿어도 물론 슬픔과 아픔과 외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희망을 발견하고, 어두움 속에서 한줄기 빛을 봅니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하늘나라에서 만난다!’ 이 약속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립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2천 년 전 어느 날, 예수님께서 유대광야에 나타나 믿기 어려운 주장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와 모함을 받아 로마군에 체포당했습니다. 그분은 처형당하기 전에 입고 있던 한 벌 옷마저도 로마 군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다 도망갔습니다. 강하다는 남자 제자들은 어딜 갔는지 하나도 없고, 예수를 따르던 여자들 몇 명만 십자가 밑을 지키며 예수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무덤까지 쫒아가 예수님이 장사되고 그 무덤입구가 큰 돌로 봉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시의 장례법은 언덕에 굴을 파서 시체를 안치하고 큰 돌로 막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여섯 번이나 예언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제자들은 이 말을 그냥 흘려버렸지만 예수의 적들은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자 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예수가 살았을 때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자기가 죽은 지 사흘 만에 살아난다고 했는데, 만약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예수가 부활했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합니까? 보초를 세워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빌라도는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보내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돌로 막고 인봉하여 아무도 손 못 대도록 하였습니다.

   드디어 부활주일 새벽, 먼동이 틀 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에 왔습니다. ‘다른 마리아’는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이 사흘 만에 살아나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가 보자!’하고 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땅을 흔드는 지진 이 났습니다. 무덤의 입구를 막았던 큰 돌이 옆으로 굴러 빈 구멍이 생겼고 굴러간 돌 위에 흰옷을 입은 천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두 여자는 깜짝 놀라고 두려워 떨었습니다. 무덤을 찾아갔던 이 두 여자는 예수님의 부활 현장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들은 체험적 믿음을 가졌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부활의 현장을 실제로 목격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체험이 필요합니다. 물론 아무 체험도 없는데도 믿을 수 있다면 최고지요. 예수님도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차원적인 신앙이고 보통사람에게는 체험이 신앙에 도움이 됩니다. 누가 체험을 했습니까?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여자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믿어. 주님의 부활의 현장을 보고 싶어!” 이랬던 여인들이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였습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왔더니”(1절).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하기를 열망하더니 눈앞에서 빈 무덤을 목격하고 체험적 신앙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모해야 영적인 체험이 일어납니다.

   무덤을 지키던 군인들은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습니다”(4절).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이 살아난다는 소문 때문에 겁을 먹고 있었는데,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자기들을 죽이고 시체를 훔쳐 가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고 땅이 흔들리더니 돌이 굴러가고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그들은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자들은 겁만 먹었지만, 억세고 강한 군인들은 기절을 해버린 거예요. 똑같은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과 생명과 용기를 얻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죽을 지경이 됩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체험하셔서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기절하지 않길 바랍니다.

   두 여자는 천사들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첫마디가 무서워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했을 때는 무서워서 기절하든지, 두려움이 없어지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살기 때문에 기절하지 않고, 오히려 있던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어려움을 당해서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외로워도 주님께로 나아가면 “그 두려움이 변하여~” 무엇이 된다고 했나요? “내 기도되었고, 전날에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찬송455장). 인생의 어려움과 도전 중에도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을 붙잡아 체험적 신앙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은 또 말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 내가 아노라.” 여인들은 예수님이 혹시나 살았으면 하고 갔지만 정작 죽은 예수를 찾고 있었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막 지방에 두 여행자가 있었는데, 안내자가 두 명이 있는데 한명은 죽어 있고 다른 한 명은 살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죽은 안내자를 따라가려고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산 안내자를 따라다닙니다. 여러분! 모든 위대한 종교 창설자들은 다 죽었습니다. 우리는 죽은 안내자에게 영혼을 맡기고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여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야 됩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다 무덤이 있어서 관광지가 되어 있어요. 거기에 죽어서 묻혀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만 빈 무덤입니다. 여러분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죽음보다는 생명을 누리며 살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고 싶다”(빌 3:10)고 했습니다. 그의 평생소원은 예수님을 더 알고 더 사랑하고 더 가까이 하고, 특별히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인데, 죽은 사람을 살려내는 부활의 능력을 안다면 이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시련, 염려, 근심, 걱정, 고통에서 우리를 구해줄 부활의 능력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여러분도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그 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부활의 예수님, 제 문제를 부활의 능력으로 해결해주시고 저를 다시 살려주옵소서.” 이런 기도가 우리의 입술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부활하신 주님의 역사를 날마다 체험하며 살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이어서 말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6절).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여섯 번에 걸쳐 예언하셨습니다. 이 말이 적들의 귀에도 들어가 빌라도도, 대제사장들도 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덤을 지키러 보초를 보냈던 것입니다. 이미 구약성경에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인간의 죄를 위해 죽었다가 부활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예언된 바 있었습니다. 욥은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위에 서실 것이라” 하였습니다(욥기19:25). 다니엘은 생명의 부활과 저주의 부활을 예언했습니다. 인간은 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한 그룹은 영원한 저주의 부활이요, 하나님을 믿고 사는 그룹은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나타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도 부활의 예언과 역사가 있었습니다.

   천사들이 여자들을 재촉합니다.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이르라”(7절).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 고난주간 특별 새벽기도회에 많은 분들이 앞에 나와 무릎을 꿇고 기도했지요. 어느 날인가, 고등학교 1,2학년정도 되는 학생이 다가왔어요.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무슨 기도를 해 줄까?” “제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계속 핸드벨을 연주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두 번째는요, 제가 금년 내에 친구 일곱 명을 꼭 전도하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제가 일주일 동안 여기서 여러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어른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어요. “목사님, 제 가족 네 명을 전도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한 사람도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고등학생이 친구 일곱 명에게 증인이 되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핸드벨 연주를 계속 하고 싶고 친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싶다는 그 믿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입니까! 제가 그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넌 앞으로 평생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축복이 되겠구나!” 여러분, 이 부활주일 아침에 여러분의 가슴 속에도 빨리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있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또 말합니다.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6절). 굴속에 들어가니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과 몸을 말았던 천만 남아있고 예수님은 온데간데없었습니다. 눈으로 보았습니다. 체험적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체험이 쌓일수록 우리의 신앙은 더 강해지고, 손에 만지듯이 현실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약에는 천사가 종종 나타나지만 신약에는 별로 나온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잉태되실 때 잠깐 나타났지요. 그리고 3년 후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천사를 목격하였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고 원하고, 주님을 통한 영적 체험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께서 특별한 영적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으리라”(계1:18). 예수님은 죽었었지만 부활하셔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금 이 자리에도 임재해계십니다.

    어느 목사님이 신자의 장례식에 가서 예수님만이 위로의 원천이 되신다는 설교를 하셨는데, 설교 후에 어느 여자 분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들은 항상 똑같은 얘기만 해요. 그저 예수, 예수, 예수, 그 말밖에 없습니까?” “사실입니다. 할 이야기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당신은 어떤 위로를 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생명이 있기 때문에 유가족에게 위로할 말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고 평화가 있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무슨 위로의 말이 있겠습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목사님의 대답을 듣자 그 여자는 “그래요. 적어도 목사님에게는 예수라도 있군요. 난 아무것도 없는데...”라고 했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희망이요 힘이요 용기요 능력입니다.

    부활의 현장을 체험하자 몇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첫째로 무서움과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습니다. 밤중에 여자들만 무덤에 왔으니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부활의 현장을 목격하고 천사의 말을 다 듣고 체험의 신앙을 얻으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큰 기쁨이 일어났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처음에는 겁이 나지요.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낙심도 됩니다. 그러나 고개 들어 부활의 예수님을 바라보면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체험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평안하냐?”(9절) 인사하셨습니다. “평안하냐”의 원 뜻은 “기뻐하라”(Rejoice)입니다. 두려움과 염려와 고민 속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소망 가운데 기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면 기쁨이 일어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부활하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 와서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기쁨과 소망으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璲?절을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발을 직접 손으로 잡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몸이 없는 귀신이 아니었습니다. 뼈와 살이 있는 부활체였기 때문에 마리아는 손으로 만질 수 있었고, 그 앞에 절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 체험적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워 말라.” 역시 예수님은 무서움이 인생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인 것을 아셨습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10절). 여러분의 신앙이 떨어지고 낙심이 되면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곳으로 가십시오. 그곳이 갈릴리입니다. 여러분이 처음 예수를 만나 감격했던 그 장소, 그 시간으로 돌아가 보십시오. 처음 예수님을 만나 품었던 첫사랑을 새롭게 하면 우리 인생이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때때로 힘들면 옛날 처음 만났던 그 다방에 가 보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처음 만나 출발을 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새로 시작하자!” 다짐할 수 있습니다. 낙심이 되고 힘이 없고 방황이 되면 언제나 갈릴리로 가세요. 처음 만났던 그곳에서 주님은 여러분을 다시 만나주실 것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사랑과 기쁨과 만족과 행복이 새롭게 차오를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이 두 여자의 놀라운 체험이 여러분과 저의 체험이 되기를 원합니다. 남은 평생 예수님의 십자가뿐 아니라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출처/김상복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