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15장 12~20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계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서론>
‘부활의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봄은 자연 속에서 보는 부활의 계절입니다. 얼어붙어 생명의 흔적이 사라졌던 산천에 얼음과 눈이 사라지고 이를 헤집고 파란 생명의 화사한 꽃들이 활짝 웃는 얼굴을 내어놓는 계절입니다. 그 때문에 봄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희망과 기쁨의 노래를 선물합니다. 암울한 죽음을 이긴 생명의 찬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다가온 사망은 죄와 세속과 질병과 저주와 영육의 죽음으로 인간을 절망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성육신 하셔서 아담의 타락의 죄와 그 값을 걸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사망을 다 청산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에게 생명의 환희로 채워놓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에게 벅찬 믿음, 소망, 사랑, 의,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믿음의 부활
첫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 40주 40야 금식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나와서 복음을 증거 하실 때 하나님의 능력이 넘쳐났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복음을 증거 할 때 귀신이 쫓겨 나가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가 낫고 벙어리가 귀머리가 듣고 말하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입고 심지어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야말로 그리스도다. 메시아다. 이분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할 것이요, 우리들에게 소망을 줄자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3년 반 동안 더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기의 모든 직장과 동리와 가족들과 친구들까지 떠나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증거에 동참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아 인 것을 흔들리지 않고 믿었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3년 반 지난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다가 사로잡히고 안나스와 가야바의 뜰에 가서 수염이 뽑이고 온갖 모욕을 다 당하고 빌라도의 뜰에 가서 심판을 받고 가혹한 채찍에 맞아 등이 다 찢어지고 벌거벗고 머리에 가시관 쓰고 십자가 걸머지고 갈보리 산에 올라가서 아무 힘없이 매달려 죽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절망하고 만 것입니다. 철저히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렇게 권세와 능력과 위엄이 계시던 분이 이처럼 무력하고 무능력하고 처참하게 죽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았구나. 우리가 환영을 따라서 홀려서 살아왔구나. 이분이 그리스도 메시아인줄 알았는데 아니구나. 그 권세와 능력은 어디에 가고 이렇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버림받고 죽느냐. 그들의 믿음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충천한 믿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들은 허망하게 되고 만 것입니다. 너무나 무력한 십자가 죽음을 바라보고 그들은 몸서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들 눈앞에 죽고 보는 앞에서 장사지내 버리고 사흘 동안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좌절과 절망과 검은 먹구름만 그들을 덮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난 다음에 죽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한번 나타나시고, 또 나타나시고, 두 번 나타나시고, 세 번 나타나시고, 네 번 나타나시고, 다섯 번 나타나시고, 여섯 번 나타나시고, 일곱 번 나타나시고, 여덟 번 나타나시고, 아홉 번 나타나시고, 열 번 나타나시고.. 아무리 부인하려고 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똑똑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고 그와 함께 앉아 음식을 나누고 그의 체취를 맡고 그 영광을 바라보고 하는 통에 절대절망이 절대 믿음으로 다시 부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제자들의 믿음이란 여러분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 때 믿음이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님을 보고 완전히 사라졌는데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거듭 만남으로 말미암아 죽어서 사라진 믿음이 부활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순교란 의미가 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다 버리고 철저히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그리스도 부활하심을 보고 그 믿음이 도로 살아나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살아나시며 우리의 메시아가 되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 없이 순교로써 피를 뿌린 것입니다. 보통 오늘날도 예수 믿다가 순교 당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의 순교는 의미가 더 심장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눈앞에 죽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요. 너무나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아예 믿음이란 뿌리 채 흔들려서 뽑혀 버리고 만 그들인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나고 난 다음에 흔들릴 수 없는 증거 앞에 죽은 믿음이 도로 살아나고 그리고 그 믿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목숨을 내놓고 피를 뿌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확실하다나는 것을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버렸던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죽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완전히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부활인 것입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도로 찾고 죽은 믿음을 도로 부활시킨 위대한 사건인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면 그 부활은 우리의 마음속에 믿음을 부활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의심도 다 소멸시키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 되시며 우리의 구세주 되심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믿음의 부활을 마음속에 불태워 주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도 창설자가 죽었다가 부활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기초한 믿음이므로 이 믿음은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2. 소망의 부활
둘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소망의 부활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 그리스도를 바라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소망의 불길은 다 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캄캄한 밤이 마음속에 다가온 것입니다.
고전15:19~20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어서 이 땅에만 살다가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가 죽어 버리고 만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아름다운 종교라도 아무리 우리에게 아름다운 윤리와 도덕을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바람이 이 세상뿐이면 믿을 이유가 어디 있는 것입니까? 왜 예수를 믿고, 우리는 절제하고 금욕하고 경건하게 이 세상에 살 필요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삶을 주시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 영원한 삶의 희망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주신 것입니까? 부활하시므로 영원한 희망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교훈만 하셨더라면 우리에게 끝까지 희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세가 있다고 우리에게 구구이 설명만 했더라도 그것으로써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약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당합니다.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공포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를 끌어안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사망의 세력을 멸하고 부활하시므로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그 말씀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속에 소망이 불타게 된 것입니다. 소망은 인간이 내일을 바라보는 불빛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천국이 임하실 강력한 소망을 3년 반 동안 가졌었으나 그 소망이 그리스도께서 체포당하고 사형언도를 받고 십자가를 걸머지고 갈보리에 가서 죽으시므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소망의 밝은 빛이 캄캄한 밤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3일 만에 예수님이 부활하사 뿔뿔히 헤어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제자 들이 죽은 시체에 기름을 바르러 갔다가 이른 아침에 천사가 내려와서 무덤 문을 옮겨놓고 그 무덤에 올라 앉아 있습니다. 무덤을 지키던 로마 군인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쳤습니다. 천사들이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간다고 가서 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여제자 들은 너무나 기쁘고 놀라서 뛰어서 제자들에게 가는데 그중에 발이 빠른 막달라 마리아는 가까이 있는 베드로와 요한의 집에 뛰어 가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천사의 말을 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함께 막달라 마리아는 또 무덤에 뛰어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과연 예수님은 없고 수의만 남아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떠나가고 막달라 마리아만 무덤 앞에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마리아여,” 예수님이 “선생님이여.” 만지려고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아직 나는 아버지께로 가지 아니했다. 빨리 가서 내가 부활했다는 것을 전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부활한 모습을 나타내시고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뛰어가는 여제자들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에 엎드려 경배하고 기뻐서 제자들에게 말을 했으나 제자들이 믿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이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두 제자는 너무나 낙심해서 예루살렘을 떠나 낙향하여 엠마오로 가다가 한 사람이 같이 나그네로써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분이 성경을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웠습니다. 날이 저물어 여관에 같이 들어가서 식탁을 준비하고 빵을 들고 축사를 하는데 두 제자가 눈이 번쩍 뜨이고 보니 예수님이었습니다. 주님 인 것을 깨닫자마자 주님은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뛰어 와서 열 제자들이 모인 곳에 와서 “우리가 엠마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 하니까 열 제자들이 “우리들도 예수님을 만났다. 안식 후 첫날인 주일날 예수님이 우리 모인 곳에 오셔서 평안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셨다. 예수님을 보았다.” 그 다음에는 베드로도 뛰어와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내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늦게 돌아온 도마는 그 말을 듣고 앙천대소를 했습니다. “무식해도 유분수가 있고, 여자들의 말에 속아 넘어갔다. 나는 예수님이 정말 살아났으면 그 손에 못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야 믿지 당신들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믿지 않는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드레 만에 안식일이 지나고 주일날이 오자 도마와 함께 열한 제자가 한방에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를 보고 “도마야, 내 손에 네 손을 넣어 보아라. 내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 보아라.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는 기절초풍을 하고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하나님이시여.” “네가 본고를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에 제자들을 디베랴 바다에서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되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이 나오라고 해서 보니까 이미 불을 피워놓고 빵과 물고기를 구워놓고 그들을 먹이고 베드로의 처참한 낙심한 마음을 다시 위로해서 제기시켜 준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갈릴리 산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서 교훈하시고 그 다음에는 감람산에서 부활승천하실 때 제자들을 만나 보시고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그 다음에는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을 뚜렷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무리 죽음이 절망이요, 캄캄하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영광으로 거듭거듭 나타나므로 그 사람들이 변화되지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두번 나타났다면 모르고 한두 사람 나타났다면 히스테리에 걸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수많은 사라들에게 주님께서 거듭거듭 나타나서 당신이 부활하신 것을 증명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믿지 아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그 은혜를 체험한 제자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변화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 영생 천국 소망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들 마음속에 부활의 영광이 넘쳐나게 된 것입니다.
국민일보 '겨자씨'에 이런 이야기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한 마을에 꽃 파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굉장히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얼굴에는 깊이 주름이 파였지만 그러나 웃음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파는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할머니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생활도 곤궁하고 외로운데 꽃을 팔면서도 항상 웃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할머님이 웃음을 얼굴에 만연에 피우면서 말했었습니다. “난들 괴로움이 없겠소? 나는 나이 늙어서 자식들도 없고 외롭게 혼자서 살고 꽃을 팔고 사는데 잘 팔릴 때도 있고, 안 팔릴 때도 있고 또 나이 먹었으니 몸이 아플 때도 있고, 안 아플 때도 있는데 그래도 내가 늘 웃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금요일 날 십자가에 못 박혀 처절한 절망으로 죽으셨으나 주일날 아침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내 인생에 고통과 괴로움이 다가오면 3일만 기다리자! 오늘, 내일 고통이 다가와도 3일이 되면 주님께서 부활한 것처럼 내게 즐거움이 다가올 것이니 절망하지 말고 3일만 기다리자.” 그렇게 늘 말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할머니가 삶을 살아가면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3일만 기다리면 고통이 사라지고 어려움이 사라지고 언제나 희망이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할머니는 절대절망의 고통 중에서도 죽으신지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절대 믿음으로 행복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도 절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3일만 더 기다리면 절망이 소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주님은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늘날 소망으로 부활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은 여러분 죽음을 이기고 일어난 것이 부활입니다. 산천이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을 때도 그를 헤집고 새 생명이 돋아나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애가 어둡고 캄캄하고 얼어붙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를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소망이 넘쳐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1955년에 흑인으로서 뉴욕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하우스에서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바로 마리아 앤더슨입니다. 마리아 앤더슨의 노래는 정말 감동을 주고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흑인으로써 미국에 출세해서 백인들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엄청난 시련과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너무나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많기 때문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문기자들이 물었습니다. "흑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이렇게 많은데 희망을 잃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말하기를 견디기 어려운 일에 부닥칠 때마다 언제나 내 시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바라봅니다. 백인들이 나를 멸시하고 청중들이 나에게 야유를 하고 계란을 던지고 할 때 도 나는 언제나 십자가를 바라봤습니다. 날 위하여 십자가에 고통을 참으시고 무덤에 들어간 예수님은 결국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으니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그 부활의 소망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멸시와 천대와 차별과 고통을 이기고 나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오늘 영광의 부활의 은혜를 누릴 수가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부활이요, 영원한 승리의 부활인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절망도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오면 부활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소망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동굴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터널로 변화되는 것처럼 어떻게 캄캄한 절망도 예수님이 들어오면 부활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실제의 삶속에 체험할 수 있는 능력과 영광인 것입니다.

3. 사랑의 부활
셋째로,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부활인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인 이후 인류 역사는 미움과 분노와 살상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인류를 볼 때 어느 곳에 가나 미움이 있고 분노가 있고 질투가 있고 시기가 있고 살상이 있고 피 흘림이 있습니다. 이것을 치유할 능력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로써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마귀는 엄청나게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예수님의 33년간의 생활은 풍찬노숙을 하면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율법에 의해서 정죄를 받고 로마의 법에 의해서 죄인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원수들은 십자가 밑에서 침을 뱉고 고개를 흔들고 말았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 도다.” 그 모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대꾸하지 아니하시고 협박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원하시면 십자가의 그 너무나 고통스러움 가운데 ‘이놈들 두고 보자. 내가 3족을 멸하리라.’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타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협박하지 아니하시고 공갈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를 향해서 모진 욕을 하고 모욕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이여, 저들이 알지 못해서 저러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사랑으로 기도하고 끝까지 참아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사랑의 위대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들에게 값없이 용서와 의롭게 되는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값없이 세상과 마귀를 이기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되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값없이 치료하고 건강하는 선물을 주었습니다. 값없이 저주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아브라함의 복과 형통을 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값없이 부활, 영생, 천국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를 저주하고 욕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하게 얻는 사랑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영원한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도 오늘날 남북이 서로 대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독일과 다릅니다. 독일은 동서가 갈려 있어도 싸우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3년 동안 살상을 했습니다. 죽이고, 죽고 온갖 만행을 다해서 원한이 마음속에 쌓여져 있는 참으로 어려운 관계에 있습니다. 북한과 우리가 서로 미움, 분노, 원망, 질투 속에 이대로 내버려 둔다면 언제고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언제고 서로 함께 멸망하고 말 것인 것입니다. 싸우는 동리마다 망하고 싸우는 나라마다 망한다고 예수님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고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미움이 예수님께 쏟아져서 엄청난 종교적인 미움과 정치적인 미움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주님은 사랑으로써 보답해 준 것입니다. 축복을 해주고 오히려 주님은 용서와 의로움, 거룩함과 성결함, 치료, 아브라함의 축복, 부활, 영생, 천국이라는 사랑의 선물을 안겨 주므로 영원히 미움을 극복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을 이기려면 북한을 사랑해야 되는 것입니다. 같이 미워하면 싸움과 전쟁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이 활활 타는데 물을 부어야지 같이 맞불을 놓으면 불천지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을 불바다로 만들겠다면 우리는 북한을 사랑바다로 만들겠다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어 주어야 돼요. 사랑은 영원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을 부어주고 은혜를 베풀면 사랑과 은혜는 위대한 부활의 능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겨울이 춥고 산천이 얼어붙고 눈보라가 쳐도 봄이 오면 녹습니다. 천지가 얼어붙어도 봄이 오면 녹습니다. 봄은 부활의 능력으로 녹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미움이 짙을지라도 원한이 깊을지라도 적의가 꽉 들어찼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면 사랑은 원한을 녹여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보다도 위대한 힘이 없습니다. 사랑으로써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권세와 능력과 주먹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천지를 지은 하나님이 무엇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까? 하늘에서 원수들을 일괄로 다 멸해 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길은 주먹이 아니요, 완력이 아니요, 힘이 아니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을 대신하여 죄악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늘어져 있는 것을 보십시오. 저렇게 하나님 무력할 수가 있습니까? 무능력 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대책 없이 저렇게 매달렸냐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사랑의 원자탄인 것입니다. 사랑의 표시인 것입니다.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죄와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사랑의 원자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말했습니다. “나는 무력으로 유럽을 정복했으나 지금은 세인트 헬레나섬에서 쓸쓸히 죽어가고 있다. 예수여 당신은 칼 한 자루 쓰지 아니했으나 사랑으로 지금도 당신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수천만 사람들이 이 지구상에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부활은 바로 사랑의 부활인 것입니다. 부활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했다는 것을 우리가 노래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미움을 이기고 부활한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예수님은 사랑으로써 영원한 승리의 부활을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셔서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오늘 이 자리에 와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 안에 지금 들어와서 부활의 역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캄캄해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셨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푸른 생명, 화사한 꽃같이 우리 가슴속에 피어오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믿음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이 부활합니다. 그리스도는 종교 이상입니다. 교훈 이상입니다. 윤리와 도덕 이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에서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세상 종교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올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는 종교를 주실 뿐 아니라 윤리와 도덕적인 교훈을 주실 뿐 아니라 죽음에서 부활을 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믿음이 부활하고 소망이 부활하고 사랑이 부활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생 전체가 캄캄한 밤에서 밝은 광명으로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운동선수인 조니 에릭슨은 17살이 되었을 때 다이빙을 하다가 머리를 바위에 부딪쳐서 목 아래가 부러져서 하체 마비가 되었습니다. 조니 에릭슨은 목 아래부터 전신이 마비되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만 부모님과 친구의 격려로써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새로운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는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배워 가지고서 유명한 화가가 된 것입니다. 절망으로 고통스러울 때 조니 에릭슨은 성경을 보다가 자기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무력하며 마비된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환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렇게 예수님도 나처럼 수족을 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절망에 처했어도 그리스도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을 바라보고 조니 에릭슨은 꿈을 가졌습니다. ‘내가 비록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오늘날 목외에 모든 수족은 다 마비되고 움직일 수 없지만 장차 부활할 것이다. 내 말라빠진 손가락은 다시 살아날 것이고 힘없는 다리는 다시 힘을 얻게 될 것이고 메마른 가슴에는 소망이 넘쳐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해서 영원한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는 그것이 마음속에 넘치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존 에릭슨은 말하기를 “다른 어떤 종교나 철학도 새로운 몸과 정신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 부활의 복음 안에서만 놀라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소망, 믿음, 사랑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얻을 수가 있는 축복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예수님은 여러분 앞에 손을 활짝 내밀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을 내어 맡기십시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시고 부활의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것입니다. 그를 모셔 들이고 그 부활의 능력에 의지하면 우리는 변화 받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와 절망에서 소신을 가지고 믿음 가진 사람으로 변화 받고 소망이 없어 좌절하고 절망한 가운데 소망이 넘치는 사람으로 변화 받고 미움을 극복하고 좌절을 극복하고 사랑으로 넘칠 수 있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더불어 새것이 되어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조용기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