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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17-27)
여러분, 옆 사람과 인사합시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초대교회는 매 주일마다 이 인사를 나눴습니다. 매주일 만날 때마다 이 인사를 했습니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그들은 매 주일을 부활주일로 지켰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2006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포항의 모든 성도들과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의 심령과 가정위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오후에는 부활절 연합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많이 오셔서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부활신앙이 회복되는 부활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따라합니다. “나의 부활신앙이 살아있는 부활신앙으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이런 마음으로 오늘 말씀을 듣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희미한 마르다의 부활신앙을 확실한 부활신앙으로 부활시켜주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빨리 오셔서 우리 오빠를 고쳐달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이틀이나 더 유하시다가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착하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걸 아시고 일부로 고의적으로 늦게 그곳에 오신 것입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이 도착하자마자 마르다는 한마디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겠나이다.” 이 말속에는 “예수님 왜 일찍 오지 않았습니까?”라는 원망과 아쉬움이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만 일찍 오셨더라면 우리 오빠가 살았을 것인데....” 이런 말을 하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을 지금 여기서 다시 살리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다시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로 내가 아나이다”라고 합니다. 마지막 날 부활에는 우리 오빠가 다시 살 줄을 내가 안다고 대답을 한 것입니다. 이 대답은 좋은 것 같아도 문제가 많은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마르다의 문제있는 부활신앙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지막날 부활에는 내가 다시 살줄 안다는 이 말은 그 당시의 모든 유대인들이 교리적으로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공동체적인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이 고백은 자신의 확고한 부활신앙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내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 줄을 믿습니다가 아니라 장차 먼 훗날에 부활하지 않겠느냐는 매우 막연하고 불확실한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마르다와 같은 희미한 부활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마르다는 지금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다시 살리실 줄을 몰랐습니다. 마르다의 부활신앙은 현재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부활신앙이었습니다. 지금 마르다에게서는 참된 부활신앙이 그에게 주는 소망과 기쁨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죽음의 슬픔과 눈물과 원망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굶어 죽어가는 사람의 금고 속에 들어 있는 10억짜리 채권과 같습니다. 내가 지금 배가 고파서 굶어 죽어가고 있지만 내 금고에 들어있는 10억짜리 채권으로는 라면 한 봉지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없는 종이쪼가리에 불과합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는 마지막에 부활할 것을 내가 안다고 했지만 마르다의 부활신앙은 그의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습니다. 막연한 부활신앙은 지금 암병으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어도 부활신앙이 확실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이 오는 시간 절망에 떨 수 밖에 없습니다.
사업이 실패하고 엄청난 시련이 닥칠 때 살아있는 부활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어떤 위로와 용기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속에서는 사랑하는 오빠가 죽어가는 눈으로 보아야 하듯이 예기치 못한 슬픈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같은 죽은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밀려오는 시련과 고난을 해결해나가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부활신앙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마르다의 막연하고 불확실한 부활신앙을 부활시켜서 마르다의 부활신앙을 부활시켜주시고,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죽어있는 부활신앙을 부활시켜 주시기 위해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기 전에 마르다의 부활신앙을 부활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를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의 무덤 비석에 보면 이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는 무덤 앞에서도 소망이 용솟음쳐 오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부활이시오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산다. 마르다여 너도 이 살아있는 부활신앙을 가지라.”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마르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도 주의 말씀하신대로 내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 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지를 못했습니다. 27절에 보면 마르다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고백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입니까? 이 고백이 얼마나 존귀하게 보입니까? 그러나 이 고백 속에는 부활신앙이 너무나 너무나 없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입으로 시인했지만 실상 그의 마음속에는 부활의 권능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어디서 찾아 볼수 있습니까? 38절과 39절이 마르다의 실체를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자’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자 마르다가 제일 먼저 앞에 나오더니 ‘주님 안됩니다’라고 합니다.
‘이미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벌써 냄새가 납니다. 주님 뭐하려고 저 무덤을 열려고 합니까? 안됩니다.’ 조금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고 했는데 지금은 ‘주님 뭐하려고 무덤을 열려고 하십니까? 죽은 지 오래되어 섞은 냄새가 납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무 소용없습니다. 죽은 냄새밖에 없습니다. 주님 그 문 열려고 하지 마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허울 좋은 부활신앙의 정체입니다. 오늘 우리의 부활신앙은 과연 어떻습니까? 여기에 와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는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마르다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하면서도 지금 나의 삶속에서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줄을 믿습니까?
예수님은 무덤을 열어서는 안된다고 막고 있는 마르다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전에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따라합시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여러분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시면서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섞은 냄새가 푹 나는 그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죽어 섞은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수건에 싸인 채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주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나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나오너라’고 했다면 공동묘지에 있는 모든 시체들이 다 나왔을 거라는 겁니다.
부활이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한마디에 사망권세는 물러가는 생명이 부활되어 나왔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요한복음 5장 29-29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팜의 부활로 나오리라”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대로 생명의 부활로 부활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부활하대 천국가기 위해서 부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임하면 지금 이 자리에서도 죽은 것이, 섞어져 가는 것이 살아날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죄악의 구덩이 속에서, 얼마나 심령 속에 온갖 죄를 가지고 섞어가는 사람들도 교회에 나와서 생명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심령에 꼳힐 때 마른 뼈들이 살아나듯이,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듯이 그 심령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많은 죽어가는 심령이 있다면 나사로처럼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회개가 터져 나오고, 속에서 섞은 것이 터져 나올 때, 바로 그때 주님의 부활의 생명과 은혜가 그 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막연한 죽은 부활신앙으로는 무덤 앞에서 슬피 우는 무기력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부활신앙으로서는 섞어 냄새나는 그 무덤을 열 수 없습니다. 죽은 부활신앙으로는 죄로 섞어 냄새나는 인생을 살릴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오늘 우리는 어떤 부활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마르다처럼 삶의 현장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겉만 번드러 한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시인해 버리는 그런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2006년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부활신앙이 예수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부활되는 역사가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없는 겉 아닌데 너무 희미해진 그 부활신앙을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그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만민에게 보여주신 줄 믿습니다. 그 주님을 믿는 자는 주와 함께 살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활하지 않으면 믿노라하면서도 섞어 냄새나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냄새나는 무덤을 열 수 없고 절망과 낙심과 슬픔을 이겨낼 수 없고 소망없는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교회를 들락거리면서도 부활신앙이 살아있지 않으니까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무서운 병이 오니까 벌벌 떱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을 가진 사람은 다릅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 무디가 임종할 때 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디는 감격에 찬 음성으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영화스럽도다. 땅이 물러가고 하늘이 열리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 그러면서 그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했습니다. “여러분 내일 아침 조간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나도 믿지 마십시오. 이렇게 무디는 하늘로 올라가지 않습니까!”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도 그리스도의 생명의 말씀이 임하면 죽은 것이, 섞은 것이 살아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아나야지요. 예수님은 무덤 속에서 섞어가는 나사로를 말씀으로 다시 살리심으로 마르다의 죽은 부활신앙, 희미해진 부활신앙을 다시 부활시켜 주십니다. 부활신앙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무덤속에서 섞어가는 나사로를 다시 부활시키십니다. 다시 살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사로의 부활사건은 오늘 우리의 부활신앙을 회복시켜주시기 위한 사건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게 믿게하는 영광스러운 사건인줄로 믿습니다.
마르다의 부활신앙만 부활시켜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부활신앙을 부활시켜 주시기 위해서 나사로의 사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배가 고파도 라면 하나 사먹을 수 없는 금고속의 채권 같은 부활신앙이 아니라, 허울 좋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오늘 나의 삶의 현장에서 부활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살아있는 부활신앙으로 부활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활될때 우리의 가정도 부활될 줄 믿습니다. 냄새나는 가정도 내가 부활신앙을 가질 때, 욕하고 매일 싸우던 가정도 감사와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가정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의 부활신앙이 부활될 때 캄캄하고 섞어가는 이 사회와 이 나라와 민족도 아름다운 세례로 변화시켜 나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회복되어야 이게 가능합니다. 우리의 부활신앙이 부활될 때 날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날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전도축제도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입니까? 절망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따라합시다. “부활신앙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것입니다.”
삶과 동떨어진 신앙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우리 모두의 부활신앙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이 시간 부활되어 한숨과 눈물 속에서 살아가는 강도만난 우리의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을 전해주어 그들의 무덤같은 캄캄하고 냄새나는 심령을 열어주고 그 속에 생명을 불어넣고 소망을 불어넣어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채워주는 부활의 산 증인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출처/최낙보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