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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됩시다 (마 18:1-10)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므로, 어린이와 관련된 예수님의 교훈을 되새겨 보기로 합시다.
1. 예수님은 "소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실족케 하지도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셨건만, 오늘 날에 패역한 세대는 어린이를 너무나 학대하고 실족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와 어린이를 통하여 이 땅에 가까이 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와 어린이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항상 어린이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이는 항상 물질적-정신적으로 오직 가난한 자일 따름입니다. 고로 오직 어린이만이, 어린이와 같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산상수훈의 팔복도 어린이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야말로 정말 가난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온유한 자, 애통하는 자, 핍박을 당하는 자, 화평케 하는 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나간 시절에는 우리는 가난에 대해 관심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배고픔을 뼈저리게 느꼈던 세대들은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외치며 열심히 살았고, 그 결과로 우리 나라도 꽤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빈부의 격차가 생겨나자 상대적으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노동자들도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외쳤습니다. 교회도 한때는 축복을 강조하였고, 축복을 받은 후에는 경제정의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경제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어 가니까 사람들이 이기주의적으로 변하고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하며, 윤리와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어린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해마다 5만 여명의 어린이가 낙태로 죽임을 당한다고 합니다. 20세기 문명인에 의해 은밀하게, 그리고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루어지는 범죄적인 만행입니다. 매년 20만 명 내외의 아이들이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다고 합니다. 고아원에 버려진 아이들 가운데 74.2%가 살아 있는 부모로부터 버려진 '고아 아닌 고아'라는 통계입니다.
가정이나 사회에서 어린이를 폭행하는 사례가 해마다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국 어머니의 72%가 어린이에게 매질을 한다고 합니다. 태국 23%, 미국 26%, 일본 33%, 영국 28%, 프랑스 30%에 비하면 엄청 높은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아버지는 얼마나 자주 자녀들에게 매질, 아니 폭력을 가할까요? 어린이 폭력 중에도 가장 심각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 나라 청소년 100명 가운데 6명이 강간 등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어린이 성폭력은 한 해에 무려 10만 건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유흥접객업소, 숙박업소, 안마시술소 등 41만개 유흥업소에서 80만-120만 명의 여성들이 일하는데, 이 가운데 20-30%가 미성년자, 어린이로 추산된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어린이 유괴, 자살 사건도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우리는 가난한 자들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이의 고난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실족케 하면 맷돌을 목에 매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났다"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이 학대가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경고하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하늘에 어린이 천사가 있어서 늘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어린이는 하나님에게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만, 우리 어른들은 어린이를 업신여기고, 억압하고, 학대하며, 심지어는 자살로 내몰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린이를 실족케 하거나 학대하였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만약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나는 어린이 학대를 남의 일로, 강 건너 불로 보았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악을 방관하는 것,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도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홍종명 씨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 만약 길 잃은 아이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만약 목마른 아이에게 물 한 컵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폭력입니다..."
회개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 학대를 예방하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어린이를 사랑하는 운동, 아니 어린이가 되는 운동을 전개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어린이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어린이를 사랑함으로써만, 아니 어린이가 됨으로써만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어른이 어린이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이것은 성서적으로 보면 대단한 착각입니다. 어린이가 우리를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이의 것이고, 어린이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린이의 손을 잡음으로써만 어린이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의 손을 잡기는커녕 자기 손에 어린이의 피를 묻힌 자들을 예수님이 어찌 천국 문에서 환영하시겠습니까? 성녀 데레사는 말했습니다: "어린이를 죽이지 마십시오. 키우기 어렵거든 나에게 주십시오.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히지 마십시다. 오히려 어린이를 바라 볼 때, 어른의 상처가 낫습니다."
2. 어린이가 왜 하나님 나라의 주인인가? 의아해 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은 바로 "오직 믿음으로만"에 있습니다. 즉 인간의 공적이나 업적, 자랑, 전통 등 그 어떠한 인간의 자랑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위대한 발견과 가르침이고, 우리는 그들의 신앙적 후예들입니다. 어린이가 누구입니까? 어린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어린이는 순수한 믿음으로 부모와 형제,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어린이는 스스로 높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이미 낮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드는 자라야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린이처럼 낮추는 자, 낮은 자라야 그 나라에서 큰 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높이고 자신을 의지하며 자랑하는 교만한 어른,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는 어른, 온갖 전통과 형식과 체면과 제도에 얽매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어른, 심지어 온갖 불순한 마음과 위선적인 행동으로 살아가는 어른에 비해 어린이는 너무나 순수하고 깨끗하며 진실합니다.
교회는, 아니 어른만이 행세하는 교회는 타락하기 십상입니다. 교회는 너무나 타락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이 늘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교회는 늘 개혁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는 복음의 정신을 왜곡시키기 쉽습니다. 교회는 온갖 세상의 영광으로 치장하기 쉽습니다. 교회는 자신과 남을 속이기 쉽습니다. 오죽하면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바울의 말을 "믿음, 소망, 사기 그 중에 제일은 사기다"로 바꾸는 일이 생겨났겠습니까? 이 말을 포스트에다 크게 써 놓은 영화 "할렐루야"는 교회를 이용하여 사기치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이 영화는 교회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어떤 어린이 만화 영화는 악마의 이름을 "할렐루야"로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가 가장 애용하는 "할렐루야"가 세상에서는 이미 사기와 악마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교회보다 더 악한 세상을 통하여서라도 교회를 고발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교회가 스스로 갱신, 개혁할 수 없으니까, 이제 하나님은 세상 사람의 말을 빌려서 교회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복음, 복음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부모를 온전히 신뢰하는 어린이처럼 우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구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이를 먼저 구하고 찾지 않고 세상의 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무슨 직업으로 돈벌까?, 무슨 차를 살까? 어떤 주택에 살까?" 염려하는 것은 다 불신앙들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교회 식으로 말하면, "무슨 식으로 교회를 성장, 부흥시킬까?, 어떤 목사님을 모실까? 어떤 교회당을 지을까?" 염려하는 것도 불신앙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어린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얼굴을 먼저 구하여야 합니다. 이럴 때에만, 교회는 개혁할 필요가 없이 순수하게 보존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만, 이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이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신령한 젖을 사모합시다.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입시다.
끝을 맺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합니다. 어린이를 학대하지 맙시다. 아니 어린이를 사랑합시다. 아니 어린이로 돌아갑시다. 아니 어린이가 됩시다. 이것이 오늘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뜻입니다.
출처/이신건교수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