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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 (마 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9:13~15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외교관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늘 일에 쫓겨서 외국에 출장도 잦고 모든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가정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못 했다 한다. 어느 날 모처럼의 휴일이 되어서 그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좀 낮잠이나 실컷 자고 미루었던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쉬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아이들과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닥달을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집에 있었다가는 아내 등살에 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득이 아이들과 같이 낚시질을 나갔더라 한다. 아이들은 좋아서 마구 뛰면서 한껏 즐거워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왔는데 이 외교관, 이 남자는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한다. '오늘은 아이들과 낚시를 다녀왔다. 소중한 하루를 낭비해 버렸다.' 그러나 그 아들 중에 하나는 커서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될 때 옛 날 일기장을 보았다. 그 옛날 일기장에 이 아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자녀 양육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주일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던,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오늘 흘린 땀방울이 10년 후 나의 명함이 된다"는 어느 광고 카피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으로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C는 여자를 발견했으며, 20C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1C에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구약의 시대에도 사람을 셀 때에 어린 아이를 제외한다.
주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시대, 바로 그 때에 주님은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기를 바라신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고 어린이를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국가와 민족은 번영하지 못할 것이다.
1.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의 입맛은 4살 때 결정이 난다 한다. 그 입맛대로 일생을 사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된다. 특별히 문화인류학에서 사람은 40이 넘으면 4살 때 먹던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간다 한다. Original Point로 확 돌아간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음식을 접하게 되지만, 나이가 4, 50 되면 다시 옛날 자기가 자랄 때에 먹던 그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가 버린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부인들이 남편에게 잘 하고 싶거든 '이 사람이 4살 때 무얼 먹었나?' 이걸 연구해야 된다. "지금 좋은 음식을 내놓고 내가 정성껏 만들었는데 네가 왜 이걸 못 알아보느냐?" 그건 무지한 것이다. 오늘 이후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문제는 어렸을 때 무얼 먹었느냐는 것이다. 그 때의 입맛이 이제 내 한평생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4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던 사람이 있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
그래 입맛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치관이요, 세계관이요, 행복관이다. 내가 어떻게 행복한가? 내가 가진 근본적인 이 가치관의 기준해서 행복한 것이다. 거기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술만 먹으면 주사가 심하여서, 온 동네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가 그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역시 그러했다. 어려서부터 그런 부모의 시끄러움 속에 마음의 분노를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생 복수의 칼을 갈면서, 그 자녀에게 복수의 씨앗을 심어 놓고 산다.
어떤 이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출세와 성공의 한을 자녀게에 어려서부터 주입한다. 권세만 있으면, 부만 있으면 행복한 것으로 교육받았던 그 사람은, 그것을 위해 일평생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이루려는 꿈을 향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긍심을 팔아 버린 채, 출세와 성공의 길로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이렇게 격려한다.
딤후 1:4~5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어려서부터 믿음을 보았던 이 사람, 믿음을 가르침 받으며 살았던 이 사람, 일 평생 동안 믿음 안에서 믿음의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며, 믿음의 역사를 주도하고, 믿음의 격려를 받는 복된 삶의 자리를 얻는다.
여러분 잘 아는 한때에, 1994년 초, 채 얼었던 냇가가 풀리기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라고 있다. 그 지존파의 대부인 김기환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때에 되어졌던 이야기이다. 그는 옛날을 회고했다. 범행 당시 26살이었던 그가 17년 전에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의 선생님께서 호되게 그를 꾸지람했다 한다.
"왜 너는 그림 그리는 걸 알면서도 크레용을 가져오지 않았느냐? 왜 번번이 가져오지 않았느냐? 무슨 정신이냐?"
아무리 나무래도 그는 말이 없다. "너무 가난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가져왔다."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가 생각이 모자란 줄 알고, 혹은 반항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아주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마구 때렸다.
때리던 끝에 이렇게까지 말했다.
"이 녀석아! 훔쳐서라도 가져와야 될 것 아니야. 준비물을 왜 안 가져오느냐?"
그때에 이 아이는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사형장에서 최후 진술을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내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때부터 훔쳤다. 도둑질하는 것을 배웠다. 도둑질하는 것을 즐겼다. 오늘의 내 운명은 이렇게 되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한 말 한마디..내가 불쑥 내뱉은 말 한마디, 잠깐 보여준 사건 하나가 그 어린 아이의 일생 을 이렇게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에게, 현존하는 미래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 가르치는가?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알게 하자.
특별히 자녀를 낳거든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축복기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 또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교회에 출44석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강제성을 띠더라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녀들이 교회 생활에 소홀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부모들이 그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예민한 그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잊은 그 자녀들이 훗날 훌륭한 신앙인으로 사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학창 시절에 학업이 신앙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던 그 자녀들은, 매번 신앙 생활이 두 번째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한창 청춘 사업을 할 만한 나이에,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 보다, 청춘 사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신앙보다 앞선다.
각종 경조사 일이 바쁜 시절엔 역시 그 일이 먼저 앞설 뿐이다.
학업 성적 떨어지는 것은 걱정하면서, 자녀의 신앙이 떨어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들이 잘 풀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면서, 신앙의 삶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예배 출석하는 일과 십일조와 감사 헌금 드리는 습관을 길러 주 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을 밥과 옷으로만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키워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미리미리 말씀으로 양육하고 기도를 많이 해 주어야 한다.
2. 겸손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 어린아가 천국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실 때 전제한 것이 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그 이, 바로 그 사람이 천국에 합당한 자요, 귀한 자인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주님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사울이 겸손했을 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겸손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신도 저를 떠났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했던 다윗, 그러나 힘의 상징으로 모든 장수 위에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던 골리앗은 작은 물맷돌에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에 다윗이 태평성대의 안일 속에 겸손함을 잃게 되고 결국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며 밧세바를 취하여 결국 그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겸손함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는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만함으로 이웃의 흠을 찾는 자는 자신을 실패의 골짜기로 내 몰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을 기억하라.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섬기셨다. 그 이름을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셨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제 바울은 그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빌립보 교인들도 그 영광을 입은 자 되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권면한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이 결국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에 우리의 어린이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어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우리가 겸손함으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에 동참하는 발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어떤 사람처럼,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의 자녀들과 어린이들을 내 모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삶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어른들이 되고,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그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김철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3)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마 19:13~15 때에 사람들이 예수의 안수하고 기도하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15)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거기서 떠나시니라
외교관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늘 일에 쫓겨서 외국에 출장도 잦고 모든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서 가정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별로 쓰지 못 했다 한다. 어느 날 모처럼의 휴일이 되어서 그는 생각하기를 '오늘은 좀 낮잠이나 실컷 자고 미루었던 책이나 보면서 하루를 쉬겠다.' 생각을 했는데 그의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아이들과 바람이나 쐬고 오라."고 닥달을 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집에 있었다가는 아내 등살에 뭐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부득이 아이들과 같이 낚시질을 나갔더라 한다. 아이들은 좋아서 마구 뛰면서 한껏 즐거워했다. 그들은 집에 돌아왔는데 이 외교관, 이 남자는 그 날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한다. '오늘은 아이들과 낚시를 다녀왔다. 소중한 하루를 낭비해 버렸다.' 그러나 그 아들 중에 하나는 커서 역사가가 되었다. 그의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될 때 옛 날 일기장을 보았다. 그 옛날 일기장에 이 아들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나의 일생에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이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리고 오늘은 어린이 주일이다.
자녀 양육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주일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던, 미래를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오늘 흘린 땀방울이 10년 후 나의 명함이 된다"는 어느 광고 카피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으로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요, 19C는 여자를 발견했으며, 20C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1C에 사람 수에도 들지 못하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구약의 시대에도 사람을 셀 때에 어린 아이를 제외한다.
주님께서 활동하던 시기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시대, 바로 그 때에 주님은 어린 아이를 귀하게 여기기를 바라신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신은 어린이를 귀중히 여기고 어린이를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를 무시하거나 학대하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국가와 민족은 번영하지 못할 것이다.
1.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한다.
사람의 입맛은 4살 때 결정이 난다 한다. 그 입맛대로 일생을 사는 것이다. 그걸 알아야 된다. 특별히 문화인류학에서 사람은 40이 넘으면 4살 때 먹던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간다 한다. Original Point로 확 돌아간다. 살아가면서 다양한 음식을 접하게 되지만, 나이가 4, 50 되면 다시 옛날 자기가 자랄 때에 먹던 그 음식으로 입맛이 돌아가 버린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여러분 부인들이 남편에게 잘 하고 싶거든 '이 사람이 4살 때 무얼 먹었나?' 이걸 연구해야 된다. "지금 좋은 음식을 내놓고 내가 정성껏 만들었는데 네가 왜 이걸 못 알아보느냐?" 그건 무지한 것이다. 오늘 이후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 문제는 어렸을 때 무얼 먹었느냐는 것이다. 그 때의 입맛이 이제 내 한평생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4살 때까지 엄마 젖을 먹던 사람이 있어서 걱정이긴 하지만..... .
그래 입맛이란 무엇인가? 바로 가치관이요, 세계관이요, 행복관이다. 내가 어떻게 행복한가? 내가 가진 근본적인 이 가치관의 기준해서 행복한 것이다. 거기에 따라 결정이 되는 것이다.
술만 먹으면 주사가 심하여서, 온 동네 시끄럽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알고 보니 그 아버지가 그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가 역시 그러했다. 어려서부터 그런 부모의 시끄러움 속에 마음의 분노를 쌓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부모의 원수를 갚아 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생 복수의 칼을 갈면서, 그 자녀에게 복수의 씨앗을 심어 놓고 산다.
어떤 이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출세와 성공의 한을 자녀게에 어려서부터 주입한다. 권세만 있으면, 부만 있으면 행복한 것으로 교육받았던 그 사람은, 그것을 위해 일평생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 과정이 어찌 되었든 이루려는 꿈을 향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긍심을 팔아 버린 채, 출세와 성공의 길로 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바울은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이렇게 격려한다.
딤후 1:4~5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어려서부터 믿음을 보았던 이 사람, 믿음을 가르침 받으며 살았던 이 사람, 일 평생 동안 믿음 안에서 믿음의 위대한 역사를 바라보며, 믿음의 역사를 주도하고, 믿음의 격려를 받는 복된 삶의 자리를 얻는다.
여러분 잘 아는 한때에, 1994년 초, 채 얼었던 냇가가 풀리기 전에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라고 있다. 그 지존파의 대부인 김기환이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때에 되어졌던 이야기이다. 그는 옛날을 회고했다. 범행 당시 26살이었던 그가 17년 전에 초등학교 시절에 학교의 선생님께서 호되게 그를 꾸지람했다 한다.
"왜 너는 그림 그리는 걸 알면서도 크레용을 가져오지 않았느냐? 왜 번번이 가져오지 않았느냐? 무슨 정신이냐?"
아무리 나무래도 그는 말이 없다. "너무 가난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못 가져왔다."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은 그가 생각이 모자란 줄 알고, 혹은 반항하는 것처럼 생각을 해서 아주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면서 마구 때렸다.
때리던 끝에 이렇게까지 말했다.
"이 녀석아! 훔쳐서라도 가져와야 될 것 아니야. 준비물을 왜 안 가져오느냐?"
그때에 이 아이는 빗나갔다. 그래서 그는 사형장에서 최후 진술을 한다.
"초등학교 선생님의 그 한 마디가 내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때부터 훔쳤다. 도둑질하는 것을 배웠다. 도둑질하는 것을 즐겼다. 오늘의 내 운명은 이렇게 되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한 말 한마디..내가 불쑥 내뱉은 말 한마디, 잠깐 보여준 사건 하나가 그 어린 아이의 일생 을 이렇게 바꾸어 놓고 마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에게, 현존하는 미래에게 무엇을 보여 주는가? 가르치는가?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알게 하자.
특별히 자녀를 낳거든 제일 먼저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리며 축복기도를 받도록 해야 한다. 또 유아 세례를 받게 하고 교회에 출44석할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강제성을 띠더라도 예수님께 인도해야 한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자녀들이 교회 생활에 소홀해 지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부모들이 그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예민한 그 시기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을 잊은 그 자녀들이 훗날 훌륭한 신앙인으로 사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학창 시절에 학업이 신앙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겼던 그 자녀들은, 매번 신앙 생활이 두 번째 중요한 것으로 자리 잡는다.
한창 청춘 사업을 할 만한 나이에,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 보다, 청춘 사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직장 생활하면서 신앙보다 앞선다.
각종 경조사 일이 바쁜 시절엔 역시 그 일이 먼저 앞설 뿐이다.
학업 성적 떨어지는 것은 걱정하면서, 자녀의 신앙이 떨어지는 것은 걱정하지 않는다.
세상의 일들이 잘 풀려지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하면서, 신앙의 삶에 빨간 불이 켜져 있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예배 출석하는 일과 십일조와 감사 헌금 드리는 습관을 길러 주 어야 한다. 그리고 자녀들을 밥과 옷으로만 키우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키워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한다. 미리미리 말씀으로 양육하고 기도를 많이 해 주어야 한다.
2. 겸손을 가르쳐야 한다.
주님께서 어린아가 천국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실 때 전제한 것이 있다.
마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자기를 겸손히 낮추는 그 이, 바로 그 사람이 천국에 합당한 자요, 귀한 자인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주님을 주님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사울이 겸손했을 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겸손을 떠났을 때 하나님의 신도 저를 떠났다.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했던 다윗, 그러나 힘의 상징으로 모든 장수 위에 자신의 위대함을 자랑하던 골리앗은 작은 물맷돌에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후에 다윗이 태평성대의 안일 속에 겸손함을 잃게 되고 결국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몰며 밧세바를 취하여 결국 그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된다.
겸손함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자는 내일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오만함으로 이웃의 흠을 찾는 자는 자신을 실패의 골짜기로 내 몰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주님을 기억하라.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렇게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섬기셨다. 그 이름을 하나님은 이렇게 만드셨다.
빌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제 바울은 그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빌립보 교인들도 그 영광을 입은 자 되기를 바라면서 이렇게 권면한다.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이 결국은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어린이 주일에 우리의 어린이를 구원의 자리로 인도하는 어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우리가 겸손함으로 복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에 동참하는 발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어떤 사람처럼,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달라고 우리의 자녀들과 어린이들을 내 모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우리의 삶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어른들이 되고, 우리의 어린이들에게 그 구원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어른들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김철 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