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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또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 주일들로 지키며 이와 같은 모든 행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 5월 한달 동안 가정에 있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원하시는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희 교회에서 어린이주일로 지내는 주간으로서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세상의 지식이 다 필요하다’라는 책 이름을 본적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교육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고 오랫동안 내려오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르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요즘은 온 국민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소득의 절반 이상이 교육비로 지출이 될 것이고, 거주형태, 삶의 질 즉 모든 것이 교육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희생이 되어지는데 그와 같은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대한 투자들이 정말 그 삶에 매우 중요하다라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저도 목사로서 요즘 점점 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처럼 힘이 있는 것은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여러 가지 많은 것 중에서도 교육에 대한 투자에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이 그런 이유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도 교회에 온 힘을 기울여 교육에 힘을 쓰는 것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 앞에 가장 합당한 일이요, 주의 뜻을 세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교회는 진정한 인생의 교육장소라는 생각들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사사기라고 하는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암흑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이 암흑과 같은 사사시대의 열림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가나안에 정착되어 그들은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때 가나안 정복의 전쟁을 겪었던 여호수아와 그 생존의 장로들이 살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주변의 장로들도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는데 그 아들이 모른다는 것은 무슨 얘기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후세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배교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그들의 욕심과 죄악대로 산 결과 이방민족을 들어서 그들을 침으로 말미암아 압제하게 됩니다. 이방의 압제의 고통 속에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방법은 사사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사를 세우면 그 사사가 민족의 힘을 규합하여 이방민족을 제어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마침내 자유롭고 태평한 성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평안한 세월이 주어지면 그들은 또다시 제대로 받은 교육이 없기에 하나님을 또 버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죄악을 숭배하며 이방 우상을 숭배한 결과 또다시 이방의 침입을 받는 반복의 사이클이 사사기 시대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암흑의 시기요, 하나님 없이 고통을 받는 시기가 사사기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한 민족의 어두움도 결국 교육의 부재와 단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들의 역사가운데 가장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전수되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삶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천국을 선포하는 일이었고 또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또 자연을 정복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천국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주된 사역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 즉 교육이었던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짧은 한절이지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노엽게 만들었을 때 거기에는 아무런 교육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화가 난 다음에 어떤 일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게 가르쳐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과 계획과 세상의 모든 세속적 사고가 아니라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게 될 때 그들이 믿음 안에 바른 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에 또 부모님께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같이 협력하는 은혜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부모님들 중에서 교육에 대해서 모두가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일가견이 있다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실패를 거쳤고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자녀를 키워 본 분이 겸손해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키워볼수록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해본 부모들이 있겠습니까? 자녀들에게 원함이 있고 부모들로서는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들로서는 그것을 최선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에 반감을 가지고 삐뚤어져 나가는 경우를 볼 때 정말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부모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 한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게 자랐고 또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자라고 있으며 그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돌이켜 세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부모의 모습이요, 또 부모의 훈육을 받은 자녀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가르친 대로 자녀를 노엽지 않게 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원칙과 기준을 세워 양육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일관성 없는 교육 지침이 자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부모에 대한 실망과 함께 노여움을 타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금방 신문에서 한 가지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자녀들에게 그냥 적용하려고 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방송에서 한 가지 봤다고 해서 ‘야 이게 옳구나!’라고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금방 적용하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한 가지 쉽게 얻은 지식가지고 그 자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교육이라는 것이 왜 어렵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경우에 대해 제한된 일이고 그것을 일반화시켜 또 자녀에게까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과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접한 지식을 가지고 평가해 버리면 그 평가의 대상에 합격을 받을 수 있는 자녀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노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갈등의 정서입니다. 나는 이것을 원하는데 나에게 다른 것이 강요된다거나, 나는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의 기준에서 틀린 것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보통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 갈등가운데 노여움이 분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할지라고 나름대로 판단의 근거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건 안하건 아니면 어떤 일에 대해서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건 판단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에 있어서 어른들은 살아가면서 축적된 삶의 경험으로 인하여서 비교적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판단의 근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다 더 정서적이고 보다 더 충동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경험적으로 판단하여 기준을 세우는 것과 보다 더 정서적이고 충동적으로 그 판단의 근거로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요.
자녀를 가르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주고 그 기준이 습득된 후에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준이나 아무런 원칙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그저 무조건 배우게 되면 원칙이 없이 기준이 없이 이렇게 저렇게 우왕좌왕 혼란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고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원칙과 기준이 없으면 죄악된 인간의 성품은 선한일 보다는 악한 일에 힘씁니다. 아이들 역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선에 대한 의지보다는 악한 일에 대한 욕망과 충동이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기준이 되고 어떤 것이 원칙이 되느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준과 원칙을 세워주는 것은 무엇보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원칙과 기준은 한 순간 순간이 조합되고 엮어져 이루어지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애씀의 결과입니다. 원칙이나 기준은 아무리 그것이 옳은 것이고 논리적으로 맞다 해도 한순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원칙이고, 이것이 어떤 일을 분별하는 기준이라고 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유사한 상황일 때 그 기준과 원칙이 적용되어 일이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고 또 판단되고 또 결정되어야 결국 그것이 기준과 원칙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준과 원칙은 정해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체험을 통해서 그것이 수많이 사용되어질 때 비로소 기준과 원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가르치기 전에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기준과 원칙을 습득할 수 있도록 반복적인 훈련과 교육과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 같습니다. 어릴수록 기준과 원칙을 세우는데 드는 수고가 적게 들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무는 가꾸는 사람의 의지대로 휘어지고 꺾어지고 모양을 만들어 갈 수 있으나 보다 많이 자란 나무는 부러지고 망가지기가 쉽습니다. 모양을 내기위해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면 나무는 부러지고 망가져서 결국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많은 수고와 마음 씀과 그리고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육도 전략이고 교육도 기술이 필요하고 교육도 참아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원칙과 일관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초기 투자 즉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청년들을 보면서 청년들은 장년에 비해서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삶의 길이 온전히 정해지지 않았고, 또 그들이 무엇이든지 가능성을 품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가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청년을 가르치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청년들보다 중․고등학생들은 훨씬 더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들 때에 좋은 습관을 가르친다면 정말 그것은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닙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결국 우리들에게 반복이 될 때 습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습관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생성하는 것인데 어릴수록 그 습관을 생성하는데 드는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더 적어도 그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 유년부, 초등부 어린이들은 좋은 습관을 형성하는데 더욱더 좋은 시기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의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좋은 습관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좋은 원칙과 기준을 정해주기 위해서 일관성 있는 교육과 지침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상황 속에서 상황에 따라서 변화된다면 결국 그 당시는 편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데 남의 자녀는 다 잘 자라주는 것 같은데 유독 내 자녀만 속을 썩이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진 부모님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면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자녀들이 부모 속을 다 썩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는데 우리 마음속에 마음 상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를 키워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저희 집에도 아이가 셋이 있는데 아이들 셋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한명은 게으르고, 한명은 신경질적이고, 한명은 모범생입니다. 저 아이들이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럴까라고 생각했더니 가만히 보니까 셋 다 저를 닮았더라고요. 제가 게으르잖아요. 그리고 제가 좀 신경질을 내잖아요. 그리고 제가 모범생인 것도 좀 있잖아요. 그 아이가 다 제 모습을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야단을 잘 못 치겠어요. 그게 제 모습인데, 저 아이들이 절보고 자연스럽게 닮아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보니 무조건 야단을 칠 수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아이들에게 저런 모습이 투사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찌 생각하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본대로 배우는 것인데요. 그렇지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 지십니까? 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모들이 뭔가 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한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이들이 보면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보는 대로 배우니까요.
정말 우리의 마음을 아파하며 자책하며 자식을 기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우리의 약점과 우리의 그릇된 점이 재생산되는 것을 보며 우리의 부족을 느끼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다잡아서 자녀들을 믿음 안에 키워가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데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 것인데 그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데 성공한다면 결국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원칙과 기준 속에서 그들의 삶을 분별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교육과 나무를 심는 것은 당대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교육의 효과도 최소한 20년은 지나야 볼 수 있다는 얘기들을 하지 않습니까? 나무도 심어서 수십 년이 지나야 결과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눈앞의 어떤 변화로 말미암아 내가 흡족해 할 것이라는 기대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결국은 이 아이가 일관된 원칙과 소신과 그리고 기준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일정한 역할 모델과 만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꿈은 모방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어떤 꿈을 가진다. 자녀가 어떤 비전을 품는다라는 것은 모방에서 시작됩니다. 꿈이라는 것은 입력된 지식이 채색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력된 지식이 없이는 꿈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세계 안에서만 상상을 합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실은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상상이라는 것은 내가 손끝만한 조그만 작은 경험이라도 해야 그 경험이 부풀려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상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신앙의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인들에 관한 얘기를 읽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 만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계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 합니다. 위인을 만나게 해주고 신앙의 인물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사람의 얼굴을 면대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서도 만날 수도 있고, 모임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집회를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가 무엇인가 마음에 도전받을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그의 길을 제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성도들이 일년에 한 3개월에 한번 정도만 마음에 충격적인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말씀을 들으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매주 매주 마음에 충격을 받고 정말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3개월에 한번이라도 내 마음속에 정말 큰 은혜를 받으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신앙의 인물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 가운데 도전을 받고 새로운 은혜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려져야 합니다.
저는 요즘 우리 중, 고등학생들이나 특별히 유, 초등부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저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원리를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원리를 체득할 수 있는 상황을 그들에게 늘어놓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원리를 추출해 내고 간단하게 그 원리를 추출해서 그것을 주려는 생각을 합니다. 매우 좋은 방법이지요.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그 원리만을 추측해 주었을 때 그 배경을 알지 못하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한 줄 진리를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간증, 강의 등을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들려줌으로 말미암아 그 학생들의 마음에 ‘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살아가는구나’라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가져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도 제가 자라온 과정을 보면 결국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기도회를 하면서 그것을 가끔 느끼는데 제가 금요심야기도회나 기도회를 하면 좀 오래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15분씩, 20분씩 이렇게 오래 기도하고 또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하는데 결국 제가 학생 때 교육을 그렇게 받았으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기도의 습관이 드는 것 같습니다. 3분 기도하고 또 찬송하고 3분 기도 하고 또 찬송하고 늘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면 저도 아마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중 고등학생 때 저를 지도하셨던 목사님은 늘 기도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기도도 오래하셨고 또 이렇게 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또 기도훈련도 시키셨고, 수련회가면 밤 1시 2시까지 늘 기도훈련을 시키시고 하셨는데 그런 것들이 그와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체질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입력된 대로 출력되게 됩니다. 어떻게 교육받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 선택의 순간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루게 되는 결정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가운데 그들이 믿음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들의 근간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떠한 믿음의 사실을 가르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을 세워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또 하나는 가르치는 부모의 권위를 그들이 인정할 수 있게 만들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볼 때 늘 부모의 장점과 더불어 동시에 약점과 같이 생활합니다. 같이 생활하면서 그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도 역시 나이가 들어서 또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될 때 그때를 회상하며 부모의 훌륭한 점을 그들이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우리 부모가 정말 훌륭해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있겠지만 그런 자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켜 얘기해 버리면 우리는 많은 사람이 좌절하게 되죠. 많은 경우에 자녀들은 그 부모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들이 그 위치에 서있어 봤을 때 비로소 부모들이 훌륭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의 훌륭한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또 여러 가지 여건을 받아 자녀들의 마음에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됩니다. 배워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우리 부모로부터 배워야 되겠다’라는 마음의 의욕이 없는데 어찌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동시에 우리들은 내 자녀가 왜 훌륭한가도 파악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왜 훌륭한 부모냐? 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함과 더불어서 내 자녀가 왜 훌륭한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훌륭하지 않은 자녀에게 어떻게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평가하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부모가 생각하기에 ‘야, 쟤는 형편없어. 정말 안 되겠어’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절대 안됩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에 기대를 가지고 소망을 품고 ‘저 아이는 무엇인가 분명히 잘 할거야.’ 기대하고 소망하면 그 자녀가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 그렇게 기대와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신앙의 인물을 만나고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 신앙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부모가 하는 일은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선생의 위치에 설 수 있어야 되고, 또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정말 그 아이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생의 선배를 만나게 될 때 바로 그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을 봅니다.
결국 부모의 교육도 어떤 일을 선택하고 집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가 부모의 역할이죠. 우리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나 한 두 마디 어떤 내용의 글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떤 구조 속에 놓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라’라고 말해서는 절대 배우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여지게 만들어주어서 하라고 말 안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미끄러져 갈 때 그 아이가 교육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지금 그 아이의 범위를 넓혀 줄 것인가? 아니면 지금 좁혀진 상태에서 빛나게 갈고 닦을 것인가? 이것은 부모가 구조를 만들어가는 선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자녀들을 부모가 잘못 인도해서 망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이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아픔과 얼마나 큰 고통을 준다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 깨닫지 않습니까?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서 지금 어떠한 구조 속에 그 자녀를 놓아둘 것인가? 방치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정말 구조를 만들어줘서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후원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늦더라도 용량을 키워줄 것인가? 아니면 이 상태에서 그 그릇을 빛나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도 부모의 중요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 교역자들께 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갈고 닦기 전에 마음의 그릇을 넓히는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그릇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작은 그릇으로밖에 사용이 안됩니다. 나중에 갈고 닦을 여력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그릇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드는데 우선 주력을 해야 합니다. 용량을 크게 키우는데 큰 주력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것을 빛내게 할 시기에 빛낼 수 있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이나 결국 부모가 그 아이의 신앙적인 모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잘못됨과 잘됨도 결국 부모의 약점과 단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부모 노릇이 얼마나 힘든가하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눈물로 부모의 기도로 키운 자녀들은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그 기도의 열매들을 얻게 되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부모들은 슈퍼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모든 어려운 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또 부모들로 인하여 자녀들이 약점들을 재생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다만 파악해서 우리가 부족한 것을 다른 분들을 통해서 채워줄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이 교회를 다니면서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잘하는 분야도 몇 가지 있겠지만 제가 잘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잘 못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냐 하면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성도님들이 각양각색으로 배우고 또 그것을 습득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여럿이 도와서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된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는 안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하는 대로는 한다고 하지요. 바로 모범의 원리입니다. 솔선수범의 원리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이와 같은 노력을 한다면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깨달아 가게 될 때 반드시 그 일을 좀더 빨리 깨닫고 좀더 늦게 깨닫고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좀더 빨리 깨달으면 그가 활용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지고 좀 늦게 깨달으면 그가 사용될 수 있는 범위와 시간이 짧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큰 그릇으로 오랫동안 사용되게 하려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에 바른 기준과 근거를 설정해 주고 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또 그가 인생의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주는데 우리는 주력해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이것은 원칙이 없을 때, 기준이 없을 때, 어떤 일관성이 없을 때 자녀들이 보통 노엽게 됩니다. 분명히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내 생각은 정말 틀렸다라고 생각하면 노여워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것을 강요받을 때 노여움을 타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일관성 있는 원칙을 만들어주고 좋은 인생의 선생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안내해 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을 말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되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의 모든 생각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신앙적인 배경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생활의 사고와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무엘을 주셨을 때 그 한나는 그 사무엘을 성전에서 자라도록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전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의 백성으로 자랐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을 들면서 모세의 지도력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섬기면서 바울의 마음에 있는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뜨거운 심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어떻게 배울 수밖에 없는 사고의 구조 속에 그리고 삶의 구조 속에 자녀들을 위치시켜 주는 것입니다.
자녀는 절대로 말로 하면 안 듣습니다. 말로 해서 어떻게 듣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쉽게 가르치면 자녀들은 어렵게 배워요. 그런데 우리가 어렵게 가르치면 자녀들은 쉽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가르칠 수 있는 주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 듣지 않건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사실 교육처럼 어려운 것이 없죠. 왜냐하면 교육의 가장 기본은 인내입니다. 교육의 가장 기본은 인내에요.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교육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앞에서 어떤 행동과 생각이 즉각적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단시일 내에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무에 물주고 금방 자라지 않나 지켜보고 있으면 나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요. 여러분 가르쳐 놓고 이 아이가 어떻게 바뀌어가나 그것 감시하고 그래서는 부모가 더 먼저 말라 죽죠. 조금씩 조금씩 달라질 것을 기대하며 가장 기본적인 인내를 습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서서히 형성된 삶의 습관과 지식은 강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앞에서 순종하는 것보다 뒤에 돌아가서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그게 옳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앞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그다음에 뒤에 가서는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먼 곳을 바라보며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써야합니다. 작은 결과에 연연하다가는 큰 그림을 망치기 쉽습니다. 계획이 확실하다면 소신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파도가 높을 때도 있고 잔잔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 정말 당장 어떤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아이가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그 말씀이 생각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부모가 결정했던 것들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쳐라.’라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삭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양을 준비하셔서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그는 자식에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무르다가 큰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온 가족이 세겜 족속에게 몰살을 당하게 됐을 때 온 식솔들을 모아놓고 그들은 모든 장신구를 다 풀어놓습니다. 그것은 우상 섬기던 것이었습니다. 다 풀어 놓고 의복을 갈아입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제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믿음의 땅을 향하여 올라가자.’ 어려울 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귀의하는 것을 그의 자손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모습을 보고 요셉도 중한 경우에 그와 같은 일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요셉도 그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요셉도 그의 형들을 만나고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용서해 주고 또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인물로 우뚝 솟은 것은 이와 같은 신앙의 내력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한 순간에 마음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응답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를 봅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이와 같은 사자굴 앞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대로 살면 사자굴에 던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있어요. 그렇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습니까? 아니면 던져지지 않았습니까? 던져졌어요. 믿음의 응답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사자굴에 던져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으면 구원이라고 생각할 텐데 문제는 사자굴에 던져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자에게 찢겨서 죽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의 세 친구도 풀무불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던져졌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풀무불에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응답이, 기도의 응답이 어디서 나타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보다는 한 템포 느릴 때가 있는데 그 한 템포가 늦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확실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원래 나사로는 병들어 있어서 예수님을 초청했는데 예수님께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사로는 죽었어요. 한 템포 늦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도착해서 나가로가 죽었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보면 성경은 언제든지 우리 인간의 소망보다 한 템포 늦은 적이 참 많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착해보니 이미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린 것입니다. 병든 자 고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템포 늦어짐으로 말미암아 더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속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속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자녀들의 양육에 가장 중요한 점임을 생각해 봅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 내 중요한 목표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 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적인 욕심이나 욕구에 따라서 정말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이 자녀들의 목적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목적하고 자녀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근거한 것인가를 우리는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아이들은 비교적 정서적이라 감정의 충동에 좌우되기 쉽습니다. 부모는 삶의 경험이 많기에 비교적 이성적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기 이성적 사고를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 주어야 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가르치려면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그가 깨달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그가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워서 얻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해해서 얻은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그것을 체험함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좀 마음이 답답하고 속이 터진다 할지라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것은 그냥 우리의 육신적인 자녀를 기른다라는 개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귀한 기업을 하나님 앞에 잘 가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태의 유업은 상급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기를 수 있는 분은 다 축복받은 분들입니다.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에요. 그러니 그런 축복을 주셨으니 그것을 잘 가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잘 가꾸어 돌려 드려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생각의 틀과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생각해보고 결정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습관을 들여 주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아나서는 삶의 여행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은 찾아나서는 것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어떻게 그 선생님을 활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삶의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성도님들께 꼭 부탁을 드립니다. 어떤 일을 가르치려면 말로 가르치려고 하지 마시고 그 일을 배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라고 말하지 말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서 그 구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편한 것은 말 한마디로 가르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해’ 그런데 이렇게 해라는 말 한마디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행동과 수고와 애씀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너무 쉽게 가르치려고 해서는 도저히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어려워도 구조를 만들어서 체험을 통해 본인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할 때 우리는 늦어도 결국은 빠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정말 부모로서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것이고 특별히 가장 가까이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의 삶을 움직인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그 위치에 놓아주고 이러저러한 사정이 반복될 때 언젠가는 아이의 마음속에 큰 감동의 기회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저 역시 자녀를 키워가면서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잘 못하는 이런 중에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갈 때 아이들을 위해서 꼭 기도를 한번씩 해주는데 새벽기도 끝나고 여기서 일을 보다가 아이들이 8시쯤 간다고 생각하면 제가 55분되면 빨리 차를 타고 가서 제가 아이들 학교 가는데 인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별것 아니지만 제가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제가 꼭 기도를 해줍니다. 그런데 목사 집 얘들도 기도 받는 것 아주 좋아할 줄 아세요? 아니에요. 그냥 바쁘다고 늦었다고 그냥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안돼,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는 받고 가야 돼.’ 제가 손은 얹고, 안고 기도를 하는데 엘리베이터 눌러놓고 30초 기도를 하든지 10초 동안 기도를 하든지 하여간 기도를 한번 받고 가야 됩니다. 저도 제가 갈 수 있는 날은 꼭 급하더라도 가서 안 되면 문 앞에서라도 만나서 제가 기도를 하고 바로 오는 적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반복되면 투덜거리는 것이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그것이 일관성속에 습관으로 형성되는 것이겠지요.
정말 교육이라는 것은 습관의 형성 같습니다. 어떻게 좋은 습관을 들이는가 결국 그 습관 몇 가지가 이루어져 그의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그의 삶을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는 아빠의 소망이야.’ 그리고 제가 이렇게 또 물어봐요. ‘너는 아빠의 뭐지?’ 하고 괄호 넣기 하면 ‘아, 소망이요.’ 제가 반복해서 주입을 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모를텐데 그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왜 우리 아빠가 우리에게 자꾸 우리가 아빠의 소망이라고 얘기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을 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20년이 지났을 때 그 아이가 그 생각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를 생각해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다시 한번 우리 성도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당대에서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에 교육의 결과를 보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한 20년쯤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하고 투자하신다면 마음 조급해 하지도 않고 또 오히려 여유있게 그 모든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성도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설교/ 최종천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또 교회에서는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스승의 주일들로 지키며 이와 같은 모든 행사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이 5월 한달 동안 가정에 있어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고 또 우리 주변에 가장 가까운 곳에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사실들을 살펴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생활 속에 원하시는 신앙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저희 교회에서 어린이주일로 지내는 주간으로서 자녀를 교육하는 부모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아 우리가 어떻게 그들을 잘 양육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이 하나 키우는데 온 세상의 지식이 다 필요하다’라는 책 이름을 본적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교육으로 인해서 몸살을 앓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고 오랫동안 내려오는 일이라 생각 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단순히 가르치는 문제에서 끝나지 않고 요즘은 온 국민들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가정에서 이루어지는 소득의 절반 이상이 교육비로 지출이 될 것이고, 거주형태, 삶의 질 즉 모든 것이 교육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자녀 교육을 위해서 부부가 따로 떨어져 살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이 희생이 되어지는데 그와 같은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부모님들의 모습을 보며 자녀들에 대한 교육에 대한 투자들이 정말 그 삶에 매우 중요하다라는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저도 목사로서 요즘 점점 더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것처럼 힘이 있는 것은 없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여러 가지 많은 것 중에서도 교육에 대한 투자에 가장 힘을 기울이는 것이 그런 이유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희도 교회에 온 힘을 기울여 교육에 힘을 쓰는 것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 앞에 가장 합당한 일이요, 주의 뜻을 세우는 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또 교회는 진정한 인생의 교육장소라는 생각들도 가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사사기라고 하는 시대는 이스라엘 백성의 암흑과 같은 시대였습니다. 이 암흑과 같은 사사시대의 열림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함으로 말미암아 시작됩니다. 가나안에 정착되어 그들은 가나안의 소산물을 먹고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때 가나안 정복의 전쟁을 겪었던 여호수아와 그 생존의 장로들이 살 때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가 세상을 떠나고 그 주변의 장로들도 세상을 떠날 때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는데 그 아들이 모른다는 것은 무슨 얘기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후세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니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배교하고 이방의 우상을 섬기고 그들의 욕심과 죄악대로 산 결과 이방민족을 들어서 그들을 침으로 말미암아 압제하게 됩니다. 이방의 압제의 고통 속에서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방법은 사사를 세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사를 세우면 그 사사가 민족의 힘을 규합하여 이방민족을 제어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마침내 자유롭고 태평한 성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평안한 세월이 주어지면 그들은 또다시 제대로 받은 교육이 없기에 하나님을 또 버리고 자신의 마음대로 죄악을 숭배하며 이방 우상을 숭배한 결과 또다시 이방의 침입을 받는 반복의 사이클이 사사기 시대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암흑의 시기요, 하나님 없이 고통을 받는 시기가 사사기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한 민족의 어두움도 결국 교육의 부재와 단절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들의 역사가운데 가장 고통의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즉 교육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이 전수되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삶이 결정되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서 하신 일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천국을 선포하는 일이었고 또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고 또 자연을 정복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천국을 선포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가장 주된 사역은 천국에 대한 가르침 즉 교육이었던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바로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들을 해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자녀들의 교육에 관한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짧은 한절이지만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라는 것입니다. 노엽게 만들었을 때 거기에는 아무런 교육도 존재할 수 없다라는 사실입니다. 화가 난 다음에 어떤 일을 가르친다고 해서 그게 가르쳐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각과 계획과 세상의 모든 세속적 사고가 아니라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게 될 때 그들이 믿음 안에 바른 생활을 하며 하나님 앞에 또 부모님께 아름다운 삶을 살아, 같이 협력하는 은혜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여기 계신 부모님들 중에서 교육에 대해서 모두가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 일가견이 있다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실패를 거쳤고 실패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세상에서 자녀를 키워 본 분이 겸손해지리라 생각을 합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키워볼수록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을 안 해본 부모들이 있겠습니까? 자녀들에게 원함이 있고 부모들로서는 최선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자녀들로서는 그것을 최선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에 반감을 가지고 삐뚤어져 나가는 경우를 볼 때 정말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이 부모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 한사람의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도 그렇게 자랐고 또 우리의 자녀들도 그렇게 자라고 있으며 그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돌이켜 세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 바로 부모의 모습이요, 또 부모의 훈육을 받은 자녀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가르친 대로 자녀를 노엽지 않게 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려면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분명하고 일관성 있는 원칙과 기준을 세워 양육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일관성 없는 교육 지침이 자녀를 혼란스럽게 하고 부모에 대한 실망과 함께 노여움을 타게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금방 신문에서 한 가지 읽었다고 해서 그것을 자녀들에게 그냥 적용하려고 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방송에서 한 가지 봤다고 해서 ‘야 이게 옳구나!’라고 생각해서 자녀들에게 금방 적용하려고 하면 그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 한 가지 쉽게 얻은 지식가지고 그 자녀를 움직일 수 있다면 교육이라는 것이 왜 어렵다고 이야기하겠습니까? 그것은 그 경우에 대해 제한된 일이고 그것을 일반화시켜 또 자녀에게까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많은 생각과 이러저러한 과정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한 가지 접한 지식을 가지고 평가해 버리면 그 평가의 대상에 합격을 받을 수 있는 자녀도 별로 없는 것입니다.
노여움이라고 하는 것은 갈등의 정서입니다. 나는 이것을 원하는데 나에게 다른 것이 강요된다거나, 나는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의 기준에서 틀린 것이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보통 갈등을 일으키게 되고 그 갈등가운데 노여움이 분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할지라고 나름대로 판단의 근거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건 안하건 아니면 어떤 일에 대해서 선택하건 선택하지 않건 판단의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의 근거에 있어서 어른들은 살아가면서 축적된 삶의 경험으로 인하여서 비교적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판단의 근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다 더 정서적이고 보다 더 충동적으로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른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과 아이들이 생각하는 올바름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경험적으로 판단하여 기준을 세우는 것과 보다 더 정서적이고 충동적으로 그 판단의 근거로 세우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지요.
자녀를 가르치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되는 것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주고 그 기준이 습득된 후에 가르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기준이나 아무런 원칙도 형성되지 않았는데 그저 무조건 배우게 되면 원칙이 없이 기준이 없이 이렇게 저렇게 우왕좌왕 혼란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주고 교육을 시켜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원칙과 기준이 없으면 죄악된 인간의 성품은 선한일 보다는 악한 일에 힘씁니다. 아이들 역시 인간의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근원적으로 선에 대한 의지보다는 악한 일에 대한 욕망과 충동이 먼저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이 기준이 되고 어떤 것이 원칙이 되느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기준과 원칙을 세워주는 것은 무엇보다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일관성이 필요합니다. 원칙과 기준은 한 순간 순간이 조합되고 엮어져 이루어지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애씀의 결과입니다. 원칙이나 기준은 아무리 그것이 옳은 것이고 논리적으로 맞다 해도 한순간에 세워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떤 일을 결정하는 원칙이고, 이것이 어떤 일을 분별하는 기준이라고 정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유사한 상황일 때 그 기준과 원칙이 적용되어 일이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지고 또 판단되고 또 결정되어야 결국 그것이 기준과 원칙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준과 원칙은 정해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체험을 통해서 그것이 수많이 사용되어질 때 비로소 기준과 원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가르치기 전에 기준과 원칙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또 기준과 원칙을 습득할 수 있도록 반복적인 훈련과 교육과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 같습니다. 어릴수록 기준과 원칙을 세우는데 드는 수고가 적게 들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욱더 어려워지는 것을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 나무는 가꾸는 사람의 의지대로 휘어지고 꺾어지고 모양을 만들어 갈 수 있으나 보다 많이 자란 나무는 부러지고 망가지기가 쉽습니다. 모양을 내기위해서 이리저리 움직이게 되면 나무는 부러지고 망가져서 결국은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많은 수고와 마음 씀과 그리고 기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육도 전략이고 교육도 기술이 필요하고 교육도 참아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원칙과 일관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분량의 초기 투자 즉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청년들을 보면서 청년들은 장년에 비해서 보다 더 가능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의 삶의 길이 온전히 정해지지 않았고, 또 그들이 무엇이든지 가능성을 품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가 많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청년을 가르치면서 생각이 드는 것은 청년들보다 중․고등학생들은 훨씬 더 중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들 때에 좋은 습관을 가르친다면 정말 그것은 너무나 좋은 것 같습니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 아닙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생각이 바뀌면 말이 바뀌고 말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결국 우리들에게 반복이 될 때 습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습관이 우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육이라는 것은 좋은 습관을 생성하는 것인데 어릴수록 그 습관을 생성하는데 드는 수고와 노력과 시간이 더 적어도 그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 유년부, 초등부 어린이들은 좋은 습관을 형성하는데 더욱더 좋은 시기가 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의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좋은 습관을 키워주기 위해서 그리고 좋은 원칙과 기준을 정해주기 위해서 일관성 있는 교육과 지침을 가지고 그 일을 진행해야 합니다. 순간 순간 상황 속에서 상황에 따라서 변화된다면 결국 그 당시는 편할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기준을 세울 수 없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데 남의 자녀는 다 잘 자라주는 것 같은데 유독 내 자녀만 속을 썩이는 것 같은 생각을 가진 부모님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얼마나 속상하면 그렇게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모든 자녀들이 부모 속을 다 썩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의 역사를 이루는데 우리 마음속에 마음 상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녀를 키워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능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용서를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저희 집에도 아이가 셋이 있는데 아이들 셋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한명은 게으르고, 한명은 신경질적이고, 한명은 모범생입니다. 저 아이들이 도대체 누굴 닮아서 저럴까라고 생각했더니 가만히 보니까 셋 다 저를 닮았더라고요. 제가 게으르잖아요. 그리고 제가 좀 신경질을 내잖아요. 그리고 제가 모범생인 것도 좀 있잖아요. 그 아이가 다 제 모습을 닮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야단을 잘 못 치겠어요. 그게 제 모습인데, 저 아이들이 절보고 자연스럽게 닮아간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보니 무조건 야단을 칠 수가 없더라고요. 어떻게 아이들에게 저런 모습이 투사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어찌 생각하면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본대로 배우는 것인데요. 그렇지요?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 지십니까? 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부모들이 뭔가 좀 잘못한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한테 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것도 아이들이 보면 배우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보는 대로 배우니까요.
정말 우리의 마음을 아파하며 자책하며 자식을 기르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운데서도 우리는 이 아이들에게 우리의 약점과 우리의 그릇된 점이 재생산되는 것을 보며 우리의 부족을 느끼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을 다잡아서 자녀들을 믿음 안에 키워가는 수고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특별히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데 일관성을 가지고 진행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 것인데 그 원칙과 기준을 세우는데 성공한다면 결국 그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원칙과 기준 속에서 그들의 삶을 분별해 나갈 것입니다.
여러분 교육과 나무를 심는 것은 당대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교육의 효과도 최소한 20년은 지나야 볼 수 있다는 얘기들을 하지 않습니까? 나무도 심어서 수십 년이 지나야 결과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 눈앞의 어떤 변화로 말미암아 내가 흡족해 할 것이라는 기대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결국은 이 아이가 일관된 원칙과 소신과 그리고 기준을 가지고 살 때 하나님께서 이 아이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작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그 일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인물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일정한 역할 모델과 만남을 이루게 해주는 것은 가장 중요합니다. 꿈은 모방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어떤 꿈을 가진다. 자녀가 어떤 비전을 품는다라는 것은 모방에서 시작됩니다. 꿈이라는 것은 입력된 지식이 채색되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입력된 지식이 없이는 꿈이라는 게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경험세계 안에서만 상상을 합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실은 상상을 할 수가 없어요. 상상이라는 것은 내가 손끝만한 조그만 작은 경험이라도 해야 그 경험이 부풀려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상상입니다. 그러니까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들에게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는 신앙의 인물들을 만나게 해주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인들에 관한 얘기를 읽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또 만나게 해주는 것이 필요하고 그 사람들과 더불어 자신의 꿈을 계획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필요 합니다. 위인을 만나게 해주고 신앙의 인물을 만나게 해주는 것은 사람의 얼굴을 면대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서도 만날 수도 있고, 모임을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집회를 통해서 만날 수 있고 우리는 구체적으로 그가 무엇인가 마음에 도전받을 수 있는 기회를 통해서 그의 길을 제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요즘 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 성도들이 일년에 한 3개월에 한번 정도만 마음에 충격적인 감동을 받을 수 있을 말씀을 들으면 인생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매주 매주 마음에 충격을 받고 정말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3개월에 한번이라도 내 마음속에 정말 큰 은혜를 받으면 그것은 우리의 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큰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됨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신앙의 인물들을 만나서 그들의 삶 가운데 도전을 받고 새로운 은혜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열려져야 합니다.
저는 요즘 우리 중, 고등학생들이나 특별히 유, 초등부 학생들을 생각하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저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여러 가지 기회를 제공하는 것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원리를 직접 가르치는 것보다 원리를 체득할 수 있는 상황을 그들에게 늘어놓아 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원리를 추출해 내고 간단하게 그 원리를 추출해서 그것을 주려는 생각을 합니다. 매우 좋은 방법이지요. 시간을 절약할 수도 있고. 그런데 문제는 그 원리만을 추측해 주었을 때 그 배경을 알지 못하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한 줄 진리를 배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그 진리를 깨닫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늘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고 승리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 간증, 강의 등을 학생들에게 직접 보여주고 들려줌으로 말미암아 그 학생들의 마음에 ‘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살아가는구나’라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가져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저도 제가 자라온 과정을 보면 결국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된 것 같습니다. 제가 기도회를 하면서 그것을 가끔 느끼는데 제가 금요심야기도회나 기도회를 하면 좀 오래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15분씩, 20분씩 이렇게 오래 기도하고 또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하는데 결국 제가 학생 때 교육을 그렇게 받았으니까 저도 모르게 그런 기도의 습관이 드는 것 같습니다. 3분 기도하고 또 찬송하고 3분 기도 하고 또 찬송하고 늘 이런 식으로 교육을 받았으면 저도 아마 그렇게 기도회를 인도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중 고등학생 때 저를 지도하셨던 목사님은 늘 기도를 참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기도도 오래하셨고 또 이렇게 산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또 기도훈련도 시키셨고, 수련회가면 밤 1시 2시까지 늘 기도훈련을 시키시고 하셨는데 그런 것들이 그와 같은 신앙의 기본적인 체질을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때는 어쩔 수 없습니다. 입력된 대로 출력되게 됩니다. 어떻게 교육받았느냐에 따라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선택하고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그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의 순간, 선택의 순간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이루게 되는 결정들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 가운데 그들이 믿음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그들의 근간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자녀들에게 어떠한 믿음의 사실을 가르치기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원칙을 세워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또 하나는 가르치는 부모의 권위를 그들이 인정할 수 있게 만들고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볼 때 늘 부모의 장점과 더불어 동시에 약점과 같이 생활합니다. 같이 생활하면서 그 자녀를 가르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이해하는 것은 그들도 역시 나이가 들어서 또 부모의 입장에 서게 될 때 그때를 회상하며 부모의 훌륭한 점을 그들이 깨달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어린 시절부터 우리 부모가 정말 훌륭해라고 생각하는 자녀들도 있겠지만 그런 자녀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일반화시켜 얘기해 버리면 우리는 많은 사람이 좌절하게 되죠. 많은 경우에 자녀들은 그 부모가 그렇게 훌륭하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며 자신들이 그 위치에 서있어 봤을 때 비로소 부모들이 훌륭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 대한 보다 효과적인 교육을 위한다면 우리는 자녀들에게 부모의 훌륭한 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주변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또 여러 가지 여건을 받아 자녀들의 마음에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배워야 되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야 됩니다. 배워야 되겠다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그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우리 부모로부터 배워야 되겠다’라는 마음의 의욕이 없는데 어찌 부모들이 자녀들을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동시에 우리들은 내 자녀가 왜 훌륭한가도 파악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왜 훌륭한 부모냐? 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함과 더불어서 내 자녀가 왜 훌륭한가도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훌륭하지 않은 자녀에게 어떻게 교육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평가하는 대로 된다고 합니다. 부모가 생각하기에 ‘야, 쟤는 형편없어. 정말 안 되겠어’ 그렇게 되면 그 아이는 절대 안됩니다. 그런데 부모의 마음에 기대를 가지고 소망을 품고 ‘저 아이는 무엇인가 분명히 잘 할거야.’ 기대하고 소망하면 그 자녀가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그 마음에 그렇게 기대와 소망을 품고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그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서 신앙의 인물을 만나고 주변의 사람을 통해서 신앙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결국 부모가 하는 일은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좋은 선생님을 만날 수 있도록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그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가 선생의 위치에 설 수 있어야 되고, 또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는 좋은 선생님을 찾아다니며 정말 그 아이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생의 선배를 만나게 될 때 바로 그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것을 봅니다.
결국 부모의 교육도 어떤 일을 선택하고 집중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가 부모의 역할이죠. 우리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은 말이나 한 두 마디 어떤 내용의 글로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그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어떤 구조 속에 놓아 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라’라고 말해서는 절대 배우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 놓여지게 만들어주어서 하라고 말 안해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미끄러져 갈 때 그 아이가 교육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지금 그 아이의 범위를 넓혀 줄 것인가? 아니면 지금 좁혀진 상태에서 빛나게 갈고 닦을 것인가? 이것은 부모가 구조를 만들어가는 선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자녀들을 부모가 잘못 인도해서 망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가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부모의 그릇된 선택이 자녀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큰 아픔과 얼마나 큰 고통을 준다하는 것을 우리는 시간이 지나서 깨닫지 않습니까? 그러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하게 생각해서 지금 어떠한 구조 속에 그 자녀를 놓아둘 것인가? 방치하는 것이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정말 구조를 만들어줘서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격려해주고 후원해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좀더 늦더라도 용량을 키워줄 것인가? 아니면 이 상태에서 그 그릇을 빛나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도 부모의 중요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우리 교역자들께 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갈고 닦기 전에 마음의 그릇을 넓히는 일을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작은 그릇은 아무리 갈고 닦아도 작은 그릇으로밖에 사용이 안됩니다. 나중에 갈고 닦을 여력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그릇의 범위를 넓힐 수 있는 큰 그릇을 만드는데 우선 주력을 해야 합니다. 용량을 크게 키우는데 큰 주력을 해야 되고 그리고 그것을 빛내게 할 시기에 빛낼 수 있는 일에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걸릴 것이나 결국 부모가 그 아이의 신앙적인 모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의 잘못됨과 잘됨도 결국 부모의 약점과 단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부모 노릇이 얼마나 힘든가하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모의 눈물로 부모의 기도로 키운 자녀들은 반드시 시간이 지나면 그 기도의 열매들을 얻게 되는 것을 봅니다.
더욱이 부모들은 슈퍼맨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장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단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고 모든 어려운 점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또 부모들로 인하여 자녀들이 약점들을 재생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것을 다만 파악해서 우리가 부족한 것을 다른 분들을 통해서 채워줄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늘 이 교회를 다니면서 목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잘하는 분야도 몇 가지 있겠지만 제가 잘 못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면 잘 못하는 것을 어떻게 처리하냐 하면 그것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성도님들이 각양각색으로 배우고 또 그것을 습득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여럿이 도와서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된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학생들은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는 안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하는 대로는 한다고 하지요. 바로 모범의 원리입니다. 솔선수범의 원리입니다. 우리 부모들이 이와 같은 노력을 한다면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해도 시간이 지나서 그것을 깨달아 가게 될 때 반드시 그 일을 좀더 빨리 깨닫고 좀더 늦게 깨닫고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좀더 빨리 깨달으면 그가 활용될 수 있는 범위가 더 넓어지고 좀 늦게 깨달으면 그가 사용될 수 있는 범위와 시간이 짧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 큰 그릇으로 오랫동안 사용되게 하려면 우리는 어려서부터 하나님 앞에 바른 기준과 근거를 설정해 주고 또 좋은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해주고 또 그가 인생의 좋은 선배를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구조를 만들어 주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주는데 우리는 주력해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 이것은 원칙이 없을 때, 기준이 없을 때, 어떤 일관성이 없을 때 자녀들이 보통 노엽게 됩니다. 분명히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내 생각은 정말 틀렸다라고 생각하면 노여워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것을 강요받을 때 노여움을 타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와 같이 일관성 있는 원칙을 만들어주고 좋은 인생의 선생을 만날 수 있도록 우리는 안내해 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것을 말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되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아이의 모든 생각의 근원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하고 신앙적인 배경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나 생활의 사고와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무엘을 주셨을 때 그 한나는 그 사무엘을 성전에서 자라도록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성전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전의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귀한 은혜의 백성으로 자랐던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시종을 들면서 모세의 지도력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아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섬기면서 바울의 마음에 있는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의 뜨거운 심정을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이 어떻게 배울 수밖에 없는 사고의 구조 속에 그리고 삶의 구조 속에 자녀들을 위치시켜 주는 것입니다.
자녀는 절대로 말로 하면 안 듣습니다. 말로 해서 어떻게 듣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쉽게 가르치면 자녀들은 어렵게 배워요. 그런데 우리가 어렵게 가르치면 자녀들은 쉽게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자녀들을 믿음으로 가르칠 수 있는 주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듣건 듣지 않건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으로 교육을 해야 합니다. 사실 교육처럼 어려운 것이 없죠. 왜냐하면 교육의 가장 기본은 인내입니다. 교육의 가장 기본은 인내에요.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교육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앞에서 어떤 행동과 생각이 즉각적으로 변하기를 바라는 것은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이라는 것은 단시일 내에 이룰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무에 물주고 금방 자라지 않나 지켜보고 있으면 나무가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죽어요. 여러분 가르쳐 놓고 이 아이가 어떻게 바뀌어가나 그것 감시하고 그래서는 부모가 더 먼저 말라 죽죠. 조금씩 조금씩 달라질 것을 기대하며 가장 기본적인 인내를 습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 서서히 형성된 삶의 습관과 지식은 강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앞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에요. 앞에서 순종하는 것보다 뒤에 돌아가서 밤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그게 옳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앞에서는 그렇게 얘기하고 나서 그다음에 뒤에 가서는 다른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먼 곳을 바라보며 큰 그림을 이루기 위해서 애를 써야합니다. 작은 결과에 연연하다가는 큰 그림을 망치기 쉽습니다. 계획이 확실하다면 소신을 가지고 가야 합니다. 파도가 높을 때도 있고 잔잔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때 정말 당장 어떤 효과를 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 아이가 중요한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그 말씀이 생각나고 더 중요한 것은 그 때 부모가 결정했던 것들이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쳐라.’라고 모리아 산에 가서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할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왔습니다. 이삭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버지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양을 준비하셔서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그는 자식에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 땅에 머무르다가 큰 위험을 당하게 됩니다. 온 가족이 세겜 족속에게 몰살을 당하게 됐을 때 온 식솔들을 모아놓고 그들은 모든 장신구를 다 풀어놓습니다. 그것은 우상 섬기던 것이었습니다. 다 풀어 놓고 의복을 갈아입고 뭐라고 얘기합니까? ‘이제 벧엘로 올라가자. 우리는 하나님께 약속했던 믿음의 땅을 향하여 올라가자.’ 어려울 때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에 귀의하는 것을 그의 자손에게 보였던 것입니다.
요셉이 그냥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믿음의 모습을 보고 요셉도 중한 경우에 그와 같은 일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요셉도 그의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어요. 요셉도 그의 형들을 만나고 그와 같은 과정 속에서 용서해 주고 또 그 뿐만 아니라 믿음의 인물로 우뚝 솟은 것은 이와 같은 신앙의 내력 속에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어떤 한 순간에 마음에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습니다. 저는 늘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를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응답이 어디서 이루어지는가를 봅니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이와 같은 사자굴 앞에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믿음대로 살면 사자굴에 던집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으면 살 수 있어요. 그렇지만 다니엘은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습니까? 아니면 던져지지 않았습니까? 던져졌어요. 믿음의 응답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같으면 사자굴에 던져지기 전에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으면 구원이라고 생각할 텐데 문제는 사자굴에 던져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응답은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자에게 찢겨서 죽지 않고 오히려 거기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그의 세 친구도 풀무불에 던져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던져졌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풀무불에서 살아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응답이, 기도의 응답이 어디서 나타나는가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보다는 한 템포 느릴 때가 있는데 그 한 템포가 늦음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확실한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십니다. 원래 나사로는 병들어 있어서 예수님을 초청했는데 예수님께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나사로는 죽었어요. 한 템포 늦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도착해서 나가로가 죽었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를 보면 성경은 언제든지 우리 인간의 소망보다 한 템포 늦은 적이 참 많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착해보니 이미 죽었어요.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를 살린 것입니다. 병든 자 고친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템포 늦어짐으로 말미암아 더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속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속도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 자녀들의 양육에 가장 중요한 점임을 생각해 봅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 내 중요한 목표가 어디에 맞추어져 있느냐 입니다. 자녀들이 세상적인 욕심이나 욕구에 따라서 정말 어떤 일을 성취하는 것이 자녀들의 목적인가? 아니면 정말 내가 목적하고 자녀들이 목표로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에 근거한 것인가를 우리는 정직하게 살펴봐야 합니다.
아이들은 비교적 정서적이라 감정의 충동에 좌우되기 쉽습니다. 부모는 삶의 경험이 많기에 비교적 이성적입니다. 따라서 부모들은 자기 이성적 사고를 아이들에게 강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 그것을 풀어서 설명해 주어야 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가르치려면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그가 깨달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그가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외워서 얻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해해서 얻은 지식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가 그것을 체험함으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좀 마음이 답답하고 속이 터진다 할지라도 기다려 줄 수 있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돈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녀를 기르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기르는 것은 그냥 우리의 육신적인 자녀를 기른다라는 개념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귀한 기업을 하나님 앞에 잘 가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태의 유업은 상급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자녀를 기를 수 있는 분은 다 축복받은 분들입니다. 자녀를 기를 수 있는 것은 큰 축복이에요. 그러니 그런 축복을 주셨으니 그것을 잘 가꾸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잘 가꾸어 돌려 드려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생각의 틀과 습관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항상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내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생각해보고 결정해서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습관을 들여 주어야 합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아나서는 삶의 여행을 이루게 합니다. 이것은 찾아나서는 것 뿐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어떻게 그 선생님을 활용하는가 하는 방법을 체득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 삶의 구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그 길을 인도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제가 성도님들께 꼭 부탁을 드립니다. 어떤 일을 가르치려면 말로 가르치려고 하지 마시고 그 일을 배울 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 놓아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라고 말하지 말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서 그 구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장 편한 것은 말 한마디로 가르치는 것이거든요. ‘이렇게 해’ 그런데 이렇게 해라는 말 한마디가 그 아이에게 얼마나 많은 행동과 수고와 애씀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는 너무 쉽게 가르치려고 해서는 도저히 결과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비록 어려워도 구조를 만들어서 체험을 통해 본인이 그것을 이룰 수 있도록 할 때 우리는 늦어도 결국은 빠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정말 부모로서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것이고 특별히 가장 가까이서 같이 생활하는 사람의 삶을 움직인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그 아이가 배울 수 있도록 그 위치에 놓아주고 이러저러한 사정이 반복될 때 언젠가는 아이의 마음속에 큰 감동의 기회가 있게 될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저 역시 자녀를 키워가면서 여러 가지 이러저러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잘 못하는 이런 중에 있습니다. 제가 아침에 갈 때 아이들을 위해서 꼭 기도를 한번씩 해주는데 새벽기도 끝나고 여기서 일을 보다가 아이들이 8시쯤 간다고 생각하면 제가 55분되면 빨리 차를 타고 가서 제가 아이들 학교 가는데 인사를 받으려고 합니다. 별것 아니지만 제가 아이들의 인사를 받고 제가 꼭 기도를 해줍니다. 그런데 목사 집 얘들도 기도 받는 것 아주 좋아할 줄 아세요? 아니에요. 그냥 바쁘다고 늦었다고 그냥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 제가 ‘안돼,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는 받고 가야 돼.’ 제가 손은 얹고, 안고 기도를 하는데 엘리베이터 눌러놓고 30초 기도를 하든지 10초 동안 기도를 하든지 하여간 기도를 한번 받고 가야 됩니다. 저도 제가 갈 수 있는 날은 꼭 급하더라도 가서 안 되면 문 앞에서라도 만나서 제가 기도를 하고 바로 오는 적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반복되면 투덜거리는 것이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더라고요. 그것이 일관성속에 습관으로 형성되는 것이겠지요.
정말 교육이라는 것은 습관의 형성 같습니다. 어떻게 좋은 습관을 들이는가 결국 그 습관 몇 가지가 이루어져 그의 삶의 기준과 원칙으로 그의 삶을 움직이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가? 하는 것이 그에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는 아빠의 소망이야.’ 그리고 제가 이렇게 또 물어봐요. ‘너는 아빠의 뭐지?’ 하고 괄호 넣기 하면 ‘아, 소망이요.’ 제가 반복해서 주입을 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혀 모를텐데 그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왜 우리 아빠가 우리에게 자꾸 우리가 아빠의 소망이라고 얘기 했는가를 생각하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을 봐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20년이 지났을 때 그 아이가 그 생각을 할 때 무슨 생각을 할까를 생각해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제가 다시 한번 우리 성도님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무와 사람은 당대에서 결실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에 교육의 결과를 보려고 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한 20년쯤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하고 투자하신다면 마음 조급해 하지도 않고 또 오히려 여유있게 그 모든 일을 이루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귀한 성도님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설교/ 최종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