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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3:12-17)
미국의 북쪽에 위치한 코넷트주의 어느 가정에 예쁜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헬렌켈러(Hellen Keller)였는데 2살 되는 해 심한 열병을 앓고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 삼중고의 장애아가 되어서 슬픔과 눈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헬렐켈러는 사리반(Sallivan) 선생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방향이 바꾸었습니다. 그 이후에 헬렌켈러는 비록 소경이고, 귀머거리이고, 벙어리이었지만 사리반 선생님을 만남으로 이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해서 교육학박사, 철학박사, 인문학박사를 받았습니다. 90년 평생을 세계에 다니면서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저서 '암흑 속에서 만난 사람'에서 "사람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합니다."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덕스러운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손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인생에서 5가지를 잘 만나야 한다”고 말하면서 “① 좋은 친구 ② 좋은 선생 ③ 좋은 부부 ④ 좋은 직장친구 ⑤ 좋은 이웃친구를 만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제자는 스승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스승도 제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성인을 꼽을 때 소크라테스를 먼저 꼽습니다. 물론 이 분은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리고 그의 제자로는 플라톤이 있습니다. 플라톤이 스크라테스를 만난 것은 복이었습니다. 또한 소크라테스이 플라톤과 같은 제자를 만났다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사상, 학문, 생활, 인격에 대해서 글자 하나도 남겨놓지 않았지만 플라톤이 모든 것을 다 써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플라톤은 그의 스승 스크라테스로 하여금 스승되게 하는 제자였습니다.
? 또한 교인들은 교역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지난 16일(2003.5) 연천 답곡리에서 120명이 집단종교 생활하는 ‘대순성도회’에서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신도 중 4명이 죽었습니다. 이에 경찰이 수사에 나섰고 관련자가 체포되었습니다. 이들은 “상제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시면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교인들도 교역자들을 잘 만나야 합니다. 그러나 사실 교역자와 교인들이 서로 잘 잘 만나야 합니다.
? 그런데 우리에게는 소크라테스보다나 플라톤보다도 휠씬 더 위대하신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주님이시면서,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참 스승이요, 동시에 탁월한 스승이셨습니다. 플라톤이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보다 10배 100배로 좋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참 스승이신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스승의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 올바른 제자의 삶을 살기 위함에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 자체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1:29에서“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예수님을 스승으로 인정하는 옳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主)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스승이라고 자인하였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영원한 스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참 스승이신 예수님은 제자로 하여금 배우라고 말만 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한번도 제자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고, 3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먹고 자고 행하면서 제자들을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끼고 사랑하였습니다. 식사할 여유도 없이 너무 과로할 때 주님은 제자들을 따로 불러 한적한 곳에 가 쉬게 하였습니다.(막6:31) 그리고 하늘나라 메시지를 통하여 참된 가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참 스승으로 인정한다면 주님과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제자라면 스승의 학문, 인격, 생활, 정신을 모두 배우며 스승을 닮아가고 섬기고 높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 이러한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스승의 주일로 지키는 것은 참으로 의의(意義)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교회가 스승의 주일을 지키는 것은 목사나 교사들이 대접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갈 6:6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 6:6)고 말씀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스승의 주일로 지키는 근본적인 이유는 아닙니다.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교회의 영적 권위와 질서를 위해서 세우신 스승들에 대해서 보다 바로 알기 위함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고 하여,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보았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아버지를 파더(father)라고 부르고, 천주교의 신부도 파더라고 부릅니다. 파더는 '아버지'라는 뜻과 '신부', 즉 '교사'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동서양 모두 사랑으로 자식과 제자를 양육하고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들이 이미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선생님들이 제자들에게 안 맞으면 다행스러운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존경할 스승이 탄식하는 소리에 긍정할 수 없는 안타까운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하는 말 중에, 목사는 많되 참 목자는 없고 선생은 많되 스승은 적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의 목사의 숫자가 대략 7만 8천명이라는데 목자가 없다는 말은 참 목자 되신 예수님을 닮은 목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숱한 선생님들이 있는데도 스승은 없다는 말은 참 스승이신 예수님 같은 스승이 없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본받아야 할 참 스승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 땅에 참된 선생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양이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은 랍비(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말씀했습니다. 다른 이유 없습니다. 선생과 지도자의 책임이 너무나 무겁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 하나를 낙심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책임이 크고 무겁다는 것입니다.
? 그러나 스승의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영원한 참 스승이 필요한 이 시대에 우리의 최고의 스승이시고 참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보면서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하는 교역자나 부모 그리고 교사들이 그 사명과 역할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된다면 오늘 우리가 지키는 스승의 주일은 참으로 복되고 큰 의의(意義)을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요, 제자요, 자녀 된 우리 모두가 이전 보다 더욱 협력하고, 이해하고, 기도하는 계기가 된다면 주님이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참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은 권위를 갖고 계신 스승이셨습니다.(13절)
본문 13절에서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선생으로서 권위를 가지신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권위가 있으셨습니다. 참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실 권위가 나타났습니다.
①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다른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과 달랐습니다. 그래서 마 7:29에서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능력이 나타났으며 감동이 있었고, 말씀이 그들의 위로와 용기와 힘이 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②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죄를 사하는 영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중병풍자를 고치시면서 “...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위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6)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으로서 만민을 다스리시는 권위가 있으셨습니다.(요 17:2)
③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영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을 보면서 두려워하였고, 이런 권위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마 98)
④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음부의 권위를 이기는 영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마 16:18에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위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영권 앞에서 더러운 귀신도 잠잠하였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막 1:27)
⑤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이길 수 있기에 충분한 영권이었습니다.
(마 28:18)
⑥ 예수님의 영적 권위는 우리로 하여금 지옥 불에 던지게 하시기에 충분한 영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눅 12:5에서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위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심판하시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 5:2)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버릴 권위도 있으시고, 다시 얻을 권위가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요 10:1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관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맺어진 이 관계는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이란 말이 있습니다. 참 스승이신 예수님은 영적 권위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바른 길'을 가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갖고 계신 스승이셨습니다. (마 11:29)
마 11:29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온유와 겸손의 인격을 갖고 계신 스승이셨습니다.
목청을 높인다고 권위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권위를 주셔야 되고 다른 사람들이 권위를 인정 해 주어야 권위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이것이 바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입니다. 그분이 인격적인 스승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사는 스승의 역할을 하며 모든 제자들과 함께 동역하는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함을 배우고 본받고 이러한 그러한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의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요 13:14)
본문 14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사랑과 희생의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음으로 사랑과 희생을 모범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이 땅에 사는 스승의 역할을 하는 모든 제자들과 함께 동역하는 모든 제자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본을 보인 스승이었습니다.(14절) 말로, 지식으로, 책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행동으로 가르친 실제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적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실천함으로 보여준 교육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인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갑자기 일어나셔서 물을 떠 오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참으로 이점이 모든 교사들에게 영원한 모범을 보여준 교사상입니다. 그리고 참된 권위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을 가르쳐 보여 주었습니다. 가치 있는 삶은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것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마 20:15-17에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위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15-27)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에게는 당시의 스승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본문 12절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고 말씀하신 말씀입니다. 곧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어 주신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 15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줌으로 후에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가를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운동을 확산시키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스승이 제자보다 크지만, 스스로 섬김의 본을 보여 줌으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란 지배가 아니고 섬김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이란 자기를 배신할 제자의 발까지 씻긴 관용의 행위임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런 주님이었기에 우리는 영원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리고 영원한 가치의 삶이 어떤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참된 권위가 어디에서 기인되는 가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선생님이 제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그 일은 반드시 새로운 사랑의 운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 후에 서로 발을 실제 씻는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만민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파할 뿐 아니라 그 전도하는 과정에서 자기들의 가진 것을 제공하며 희생의 피를 부었습니다. 베드로도 그렇게 순교했고 야고보도 마가, 마태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희생하는 사랑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오신 선교사님들도 그렇게 많은 분들이 희생의 행동을 보이시면서 전도하셨습니다.
이기풍 깡패를 이기풍 선교사님으로서 변화시킨 마포삼열 목사님의 이야기가 다 그런 것입니다. 돌에 맞아도 여전히 사랑으로 복음을 전한 가운데 그 사랑이 결국 많은 사랑하는 제자들을 이 땅에 심어놓은 것입니다. 사랑의 확산운동이 곧 선교운동이요 제자운동입니다. 교사님들이 보이시는 사랑의 희생을 우리는 따라서 알아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교사님들의 수고를 이해하면서 우리 학생들, 제자된 분들이 함께 본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교회도 좋은 선생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사랑과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게 되어질 때에 그것으로 권위가 세워지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직책(職責)을 이용하여 타인에게 큰 소리치고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권위주의(權威主義)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무슨 직분을 맡았든지 서로 낮아져야 합니다. 낮아짐으로 서로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하여 섬김의 도를 다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은 인내의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벧후 3:15 상)
벧후 3:15 상반 절에서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인내의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주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된 것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구원도 소망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6)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자신이 친히 오래 참으시며 본을 보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인내에 들어가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 죽었던 우리 죄인들을 구속하기 위해서 온갖 수모와 멸시 속에서도 인내하셨습니다. 주님의 인내가 있었기에 우리의 구원도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때로 믿음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비난(非難)과 멸시(蔑視)와 중상모략도 당하지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잘 참으며 일할 때에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직분자로서의 권위가 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 12:1에서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요한도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은 성실의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 (마 11:1,눅 21:37)
마 11:1과 눅 21:7에서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여 성실한 본을 보이신 스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르치시며, 복음을 증거 하시며, 각종 질병을 고치시는 일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구원 사역을 위한 최선이었습니다.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아울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잘 활용함으로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전력을 기울일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실한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참 스승이신 주님을 섬기는 제자들의 삶은 어떠해야 되겠습니까?
1.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 감사할 줄 알아야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사 1:3에서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라고 말씀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는커녕 깨닫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점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배우고 깨닫고 지식인이 된 것은 결코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우리를 가르치신 많은 스승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많은 스승들로 하여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승들의 은혜에 보답해야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감사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갈 6:6에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역자들이나 교사들이 대접을 받기를 위해서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꽃이라도 한 송이 선물하는 것이 제자들의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그러나 마음도 없이 선물만을 주고받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믿음의 은사이나 학문의 은사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감사하는 마음도 생기고, 관심도 생기고,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것입니다.
2. 스승을 존경하고 따를 줄 알아야합니다.
오늘날 스승들을 업신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우리는 참 스승의 권위를 인정할 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본인 스스로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적 권위가 무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영적 질서를 위해서 교역자나 지도 지도자들에게 영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영적 질서를 주신 교역자나 지도자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의 질서를 위해서 위정자를 세우셨고,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 가장인 남편을 세우셨고,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교역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의 권위가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직장에서는 상사들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역자나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하여 존경하고 따라야 합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인의 삶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곳에 영적 질서가 있고 행복(幸福)이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회 속에 권위자를 세워 질서가 정립되고 인간 사회가 행복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각 단체마다 그곳에 알맞은 권위자를 세우신 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인정하고 따르며 존경해야 합니다. 존경할만하기 때문에 존경해야 하겠지만 설혹 존경받을 만한 부분이 없을지라도 존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존경해야만 교회의 영적 권위가 바로 서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가정에 남편이 존경받을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존경하지 않고 무시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콩가루 가정이 됩니다. 여러분이 다니는 직장의 상사가 존경받을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존경은커녕 무시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존경받을만하지 못하다고 해서 온 국민과 위정자들이 대통령을 무시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주님께서는 딤전 5:17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권위만을 가지고 사람들을 억압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은 그 권위를 함부로 해서는 안됩니다.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귄위자로서 존경할만한 모습을 보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고 비판하고 판단하고 고통스럽게 만든다면 그것 역시도 바른 태도가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책망하면서도 아파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때리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고, 교사의 아픔을 헤아리는 복된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3. 스승들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준대로 순종하고 생활에 실천해야 됩니다.
참 스승 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대로 순종하고 배우고, 그대로 생활에 실천해야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가르쳐주신 부모님들, 이웃 스승들, 교회에서의 주일학교 교사들, 웃어른들의 말씀에 순종하고 잘 따라야 합니다. 특히 영적 은사인 교역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은사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은 영적 은사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 질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히13:17에서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개(悔改)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은 말세 중에 마지막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딤후 3:2-3) 지금은 사탄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장난하되 하나님께로부터 온 권위를 업신여기고 무시하여 가정을 파괴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서, 세상 지나고 변할지라도 참 스승되신 주님을 따라가므로, 주님의 은혜에 보답할 줄 알고 스승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 존경하며 기쁘시게 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 어디든지 주님을 잘 따라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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