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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를 감사하자 (출애굽기 23:14-17)
빈부의 바른 개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입니다. 제가 책방에 수차례 가 보아도 이 책이 눈에 잘 띄는 곳에서 계속 팔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부자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부자가 되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은 부자가 되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다 라는 전제입니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그 사상을 전제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은 저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부자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부가 성공의 기준이라는 철학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부자 아빠는 좋은 아빠, 가난한 아빠는 나쁜 아빠라고 하는 논리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에 대한 시각을 바로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을 이 책은 암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큰 차를 타고 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부정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고 작은 집에서 살고 작은 차를 타는 사람들은 청빈한 사람들이다 라는 논리도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싸울 때 어느 편을 들어야 되겠느냐 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어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옳은 자의 편을 들어주라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부자, 의로운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부자 아빠는 성공한 아빠요 가난한 아빠는 실패한 아빠로 규정하는 철학이 깔린 사회의 풍조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추수절
성경에서 추수절은 맥추절과 수장절로 명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더불어 개신교가 받아들이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경에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 절기를 제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맥추절과 수장절로 지키라고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지키는 이 절기의 일자는 교회가 정한 것이지만 감사절은 성경이 명하고 있는 역사깊은 아름다운 절기이며 기독교의 자랑입니다. 이슬람은 라마단 기도기간이라 하여 200만명이 모여서 라마단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절기를 명하셨는데 이것은 구원의 축제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는 것은 추수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수장절을 지키라는 것은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을 주셨고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추수감사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이 절기는 율법의 중요한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섯 가지 제사와 여덟 가지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다섯 제사와 여덟 절기는 따로 되어 있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의미가 묶어져 있고 전체 율법 안에 절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도 "…수고하여 얻은 열매로 지키라. 밭에서 거두어 들이라…"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17절에는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물건은 곡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명하실 때의 추수절은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수절을 지키는 환경은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추수절에 어떻게 드리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회적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절기에 관해서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말씀을 이어 가시는데 맥추절과 수장절만이 아니라 이 절기와 연관하여 계속 그 이야기들을 율법에서 이어갑니다. 레위기에도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
율법에 왜 절기와 함께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민수기 18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절기에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를 말합니다. 그들이 바친 이스라엘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 가운데 또 십일조를 떼어서 기업이 없는 레위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돌렸습니다.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 가운데 또 십일조를 떼어서 여호와께 감사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절기에 십일조 하는 형식으로 예물을 명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공동의 십일조가 바로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얼마든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감사절과는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매월 십일조를 드리고 매주마다 이미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추수감사절에 일년 소득의 십일조를 감사헌금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의 규례를 가지고 절기헌금을 명하고 있으며 그것 가운데서 또 십의 일을 구분하여 레위인에게 돌리고 또 십의 일을 구분하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소득에 대해서든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십일조 논쟁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는 하지 않아도 된다, 십일조는 폐하여진 법이고 예수님이 십일조를 가르친 바가 없다, 사도 바울도 십일조를 가르친 바가 없다, 교회가 십일조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말씀에 맞지 않다, 십일조헌금은 이미 없어진 제도이다 라는 십일조 무용론을 펼쳤습니다. 학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구원문제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인식을 해야 됩니다. 최소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산다는 삶의 신앙고백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내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산다는 그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온전한 십일조만 한다면 다른 헌금은 드리지 않아도 교회재정은 배가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재정의 90%가 십일조 헌금입니다. 모든 교회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작년 결산을 보니까 89.2%가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외의 헌금은 교회 재정상 1할밖에 안됩니다. 십일조가 9할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헌금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성경에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잘 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이 계십니다. 만약 십일조 헌금을 온전하게만 드린다면 우리 교회는 재정이 배로 되고도 남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만큼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물론 십일조 한다고 다 훌륭한 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나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꾼을 부르신다'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백만원 십일조를 하는 교인 백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는 목회자로서 그 분의 기도를 따라하지 못하겠습니다. 꼭 한다면 이렇게 수정하고 싶습니다. '주여, 과부의 두 렙돈이라도 좋으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교인 백명을 주시옵소서.' 온전한 십일조가 중요하지 결코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백만원 짜리 십일조가 힘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단 돈 만원을 십일조 해도 믿음으로 해야 힘이 있습니다. 절대로 돈이 힘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물질을 능가하지만 물질의 힘은 절대로 믿음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액수가 힘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헌금인가 라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을 때 힘있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율법에 보면 세 가지 몫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몫
첫번째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여러분 무슨 소득이든지 하나님의 몫을 돌려드리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추수했느냐, 내게 가져오라는 하나님의 몫으로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께만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십일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됩니다. 설교자가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삼가해야 됩니다. 그러나 들으실 때 물질이야기인지 헌금이야기인지 구분하셔야 됩니다. 헌금은 물질이야기와 다릅니다. 또 헌금 중에도 다른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으로 십일조를 요구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추수한 것은 하나님이 몫을 요구합니다.
이웃의 몫
두번째는 이웃의 몫이 있습니다. 그 우선되는 몫이 구제입니다.
레위기 23장 22절에 "너희 땅에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너희들이 추수를 할 때에 밭 모퉁이의 십 분 일을 남겨두되 삼 년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매년 절기를 지키되 삼 년마다 너희 추수의 십분의 일을 밭에 남겨두어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들이 추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삼 년마다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 구제 십일조입니다.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서 삼십 분의 일을 구제하라는 암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를 많이 하라고 명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계산해보니까 삼십 분의 일입니다. 삼 년마다 십 분의 일을 가난한 자를 위해서 돌려주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몫입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하고 장학하고 전도하는 것은 본 예산 속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또 경조하는 것도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우리 교회가 많이 하는 교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정선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한 일억오천여만원은 이웃을 위해서 쓰는 예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향하여 돌려주라는 명령이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안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추수할 때부터 삼 년마다 이웃에게 돌려줄 몫을 남겨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또한 품삯도 이웃의 몫입니다.
레위기 19장 13절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내게 두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래 고용인들을 부릴 때 품삯을 정당하게 주라는 것입니다. 품삯은 내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되 빨리 주라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두지 말고 그날에 주라는 것이 율법의 명령입니다. 품삯을 가로챈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인격과 삶이 아닙니다.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장사가 안되어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자꾸 교회 안에 알려지니까 목사님이 위로한다고 "집사님, 그렇게 힘들게 사업을 하십니까? 그만하시지요. 내가보니 집사님은 사업을 안하셔도 얼마든지 여유있게 살 만하고 매주마다 골프치러 가셔도 괜찮겠는데 왜 그렇게 고민하고 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 집사님이 좋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사업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함께 먹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그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됩니다. 둘째는 국가에 세금을 내야 됩니다. 내가 사업이 안되어도 직원들 임금 주고 세금 내는 그 재미가 있으므로 사업을 해야 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에게 돌릴 것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빚입니다. 빚은 내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갚아야 될 몫입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토론하면서 빚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두 가지 빚 말고 다른 빚은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갚아도 안 갚아지는 만성 빚이고 또 하나는 처음부터 떼먹을 작정으로 남의 돈을 빌리는 악성 빚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다 빚을 지라는 것입니다. 갚을 수 있는 빚은 얼마든지 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을 안지고는 사업이 안된답니다. 그리고 그 분 이야기는 빚지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빚 갚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사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만성 빚과 악성 빚은 지지말라는 것입니다. 빚은 왜 갚아야 됩니까? 내게 돈을 준 그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받기 때문에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잊어버리고 있는데 돈을 준 사람은 절대로 상대방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의 한 가난한 여인 집에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인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기름을 붓는데 이 기름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열왕기하 4장 7절에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게 하라"고 합니다. 빚은 내 몫이 아니라 갚아야 할 이웃의 몫입니다.
또한 세금은 네 몫이 아닙니다. 세금을 내야 될 우리는 절세는 가하지만 탈세는 안됩니다.
이랜드 박성수 사장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두 가지 서원을 하나님께 했는데 뇌물과 탈세없는 사업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보니까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서원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해보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그분이 이렇게 비유를 하였습니다. 뇌물과 탈세없이 사업을 하려니까 뇌물과 탈세를 일삼는 사람과 내가 손발을 묶고 경기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못하는 고충을 겪고 오해도 받았지만 십 년을 뛰어보니까 자기가 앞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은 17장 24절 이하에 바리새인들이 베드로에게 와서는 우리는 성전세를 냈는데 당신하고 당신 주인은 성전세를 안낸다, 우리는 성전세를 내는데 왜 당신들은 안내느냐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30장에 성소에 들어가는 남정네들과 전쟁에 나갈 남정네들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드로는 성전에 출입하면서 성전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책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세금을 안내는 것은 오해를 받을 만하다. 그래서 물고기 입에 돈을 낚도록 하는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주님이 성전세를 물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몫
세번째는 내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몫을 나중에 주시더라도 제일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몫을 드리라, 그리고 이웃을 위해 십 분의 일을 삼 년마다 밭에서 추수하지 말고 남겨 두라, 그리고 품삯을 갚아주라는 것이 율법에 그대로 나오는 교훈입니다. 이웃에게 추수해서 돌릴 것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몫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절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교훈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추수감사절기를 통해서 또 한번 율법의 정신을 우리 삶 속에 배워야 됩니다. 내가 혹시라도 하나님께 돌릴 몫과 이웃에게 돌릴 몫과 내게 돌아올 몫을 섞어 놓고 살지 않았는지 하나님은 그 몫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그 몫을 인식하라는 것이 감사절기를 주신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삼 년마다 이웃을 위해 밭에 추수할 것을 남겨두라고 하나님이 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몫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돈이 있는지 모릅니다. 몫을 구분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
빈부의 바른 개념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란 책이 오랫동안 베스트 셀러입니다. 제가 책방에 수차례 가 보아도 이 책이 눈에 잘 띄는 곳에서 계속 팔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보면서 부자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부자가 되는 여러 가지 방법론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사상은 부자가 되는 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다 라는 전제입니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다는 그 사상을 전제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대목은 저의 마음속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부자되는 법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부가 성공의 기준이라는 철학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부자 아빠는 좋은 아빠, 가난한 아빠는 나쁜 아빠라고 하는 논리는 여러 가지 부작용을 불러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에 대한 시각을 바로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주 위험한 사상이라는 것을 이 책은 암시합니다. 다시 말하면 큰 차를 타고 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다 부정하게 돈을 번 사람들이고 작은 집에서 살고 작은 차를 타는 사람들은 청빈한 사람들이다 라는 논리도 대단히 위험합니다. 우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 싸울 때 어느 편을 들어야 되겠느냐 라고 한다면 일반적으로 가난한 자를 도와주어야 된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옳은 자의 편을 들어주라는 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의로운 부자, 의로운 가난한 자를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부자 아빠는 성공한 아빠요 가난한 아빠는 실패한 아빠로 규정하는 철학이 깔린 사회의 풍조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추수절
성경에서 추수절은 맥추절과 수장절로 명하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성탄절과 부활절과 더불어 개신교가 받아들이는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경에는 성탄절과 부활절을 지키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교회가 이 절기를 제정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은 성경에서 맥추절과 수장절로 지키라고 엄격히 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우리가 지키는 이 절기의 일자는 교회가 정한 것이지만 감사절은 성경이 명하고 있는 역사깊은 아름다운 절기이며 기독교의 자랑입니다. 이슬람은 라마단 기도기간이라 하여 200만명이 모여서 라마단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절기를 명하셨는데 이것은 구원의 축제입니다. 유월절을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맥추절을 지키라는 것은 추수를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수장절을 지키라는 것은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에게 추수감사절을 주셨고 우리가 그 은혜 안에서 추수감사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이 절기는 율법의 중요한 핵심적인 교훈입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섯 가지 제사와 여덟 가지 절기를 주셨습니다. 이 다섯 제사와 여덟 절기는 따로 되어 있는 교훈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부 의미가 묶어져 있고 전체 율법 안에 절기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도 "…수고하여 얻은 열매로 지키라. 밭에서 거두어 들이라…" 이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6장 17절에는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물건은 곡식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명하실 때의 추수절은 농경사회이기 때문에 곡식으로 드렸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추수절을 지키는 환경은 아주 다릅니다. 그런데 추수절에 어떻게 드리라는 기준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회적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절기에 관해서 하나님이 계속적으로 말씀을 이어 가시는데 맥추절과 수장절만이 아니라 이 절기와 연관하여 계속 그 이야기들을 율법에서 이어갑니다. 레위기에도 십일조에 관한 언급이 대단히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
율법에 왜 절기와 함께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를 민수기 18장 21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추수절기에 하나님께 바친 십일조를 말합니다. 그들이 바친 이스라엘의 십일조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 가운데 또 십일조를 떼어서 기업이 없는 레위 사람들을 위해서 그것을 돌렸습니다.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받은 것 가운데 또 십일조를 떼어서 여호와께 감사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절기에 십일조 하는 형식으로 예물을 명하고 있는 대목을 보면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공동의 십일조가 바로 추수감사절에 하나님께 바쳐진 것으로 얼마든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감사절과는 환경이 너무 다릅니다. 매월 십일조를 드리고 매주마다 이미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추수감사절에 일년 소득의 십일조를 감사헌금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의 규례를 가지고 절기헌금을 명하고 있으며 그것 가운데서 또 십의 일을 구분하여 레위인에게 돌리고 또 십의 일을 구분하여 제물로 드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소득에 대해서든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십일조 논쟁이 많습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는 하지 않아도 된다, 십일조는 폐하여진 법이고 예수님이 십일조를 가르친 바가 없다, 사도 바울도 십일조를 가르친 바가 없다, 교회가 십일조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말씀에 맞지 않다, 십일조헌금은 이미 없어진 제도이다 라는 십일조 무용론을 펼쳤습니다. 학술적으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자유는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가 구원문제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인식을 해야 됩니다. 최소한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산다는 삶의 신앙고백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내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산다는 그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우리의 삶 속에서 늘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가 온전한 십일조만 한다면 다른 헌금은 드리지 않아도 교회재정은 배가가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교회는 교회재정의 90%가 십일조 헌금입니다. 모든 교회가 대부분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렇습니다. 작년 결산을 보니까 89.2%가 십일조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 외의 헌금은 교회 재정상 1할밖에 안됩니다. 십일조가 9할을 차지하는 가장 중요한 헌금입니다.
온전한 십일조
성경에 온전한 십일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 중에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잘 드리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온전하게 드리지 못하는 성도들도 많이 계십니다. 만약 십일조 헌금을 온전하게만 드린다면 우리 교회는 재정이 배로 되고도 남을 여지가 있습니다. 그만큼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어떤 이는 십일조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물론 십일조 한다고 다 훌륭한 교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 중에서 나올 수는 없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꾼을 부르신다'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이런 기도를 했답니다. '주여, 우리 교회에 백만원 십일조를 하는 교인 백명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저는 목회자로서 그 분의 기도를 따라하지 못하겠습니다. 꼭 한다면 이렇게 수정하고 싶습니다. '주여, 과부의 두 렙돈이라도 좋으니까 온전한 십일조를 하는 교인 백명을 주시옵소서.' 온전한 십일조가 중요하지 결코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백만원 짜리 십일조가 힘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단 돈 만원을 십일조 해도 믿음으로 해야 힘이 있습니다. 절대로 돈이 힘있는 게 아닙니다. 믿음이 힘이 있습니다. 믿음의 힘은 물질을 능가하지만 물질의 힘은 절대로 믿음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액수가 힘이 있는 게 아닙니다. 온전한 헌금인가 라는 믿음이 포함되어 있을 때 힘있는 하나님의 제물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율법에 보면 세 가지 몫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몫
첫번째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것이 십일조입니다. 여러분 무슨 소득이든지 하나님의 몫을 돌려드리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추수했느냐, 내게 가져오라는 하나님의 몫으로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하나님께만 돌려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십일조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됩니다. 설교자가 물질 이야기를 하는 것은 삼가해야 됩니다. 그러나 들으실 때 물질이야기인지 헌금이야기인지 구분하셔야 됩니다. 헌금은 물질이야기와 다릅니다. 또 헌금 중에도 다른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몫으로 십일조를 요구한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추수한 것은 하나님이 몫을 요구합니다.
이웃의 몫
두번째는 이웃의 몫이 있습니다. 그 우선되는 몫이 구제입니다.
레위기 23장 22절에 "너희 땅에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고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너는 그것을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하여 버려 두라.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절기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너희들이 추수를 할 때에 밭 모퉁이의 십 분 일을 남겨두되 삼 년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매년 절기를 지키되 삼 년마다 너희 추수의 십분의 일을 밭에 남겨두어서 가난한 자와 나그네들이 추수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삼 년마다 십일조를 하라는 것이 구제 십일조입니다.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위해서 삼십 분의 일을 구제하라는 암시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제를 많이 하라고 명하지는 않습니다. 굳이 계산해보니까 삼십 분의 일입니다. 삼 년마다 십 분의 일을 가난한 자를 위해서 돌려주라는 것은 이웃을 위한 몫입니다. 우리 교회가 선교하고 장학하고 전도하는 것은 본 예산 속에서도 하고 있습니다. 또 경조하는 것도 이웃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계산해보면 우리 교회가 많이 하는 교회는 아니라 할지라도 적정선에서는 하고 있습니다. 한 일억오천여만원은 이웃을 위해서 쓰는 예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향하여 돌려주라는 명령이 절기를 지키라는 명령 안에 포함되고 있습니다. 추수할 때부터 삼 년마다 이웃에게 돌려줄 몫을 남겨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또한 품삯도 이웃의 몫입니다.
레위기 19장 13절 "너는 네 이웃을 압제하지 말며 늑탈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내게 두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아래 고용인들을 부릴 때 품삯을 정당하게 주라는 것입니다. 품삯은 내 몫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되 빨리 주라는 것입니다. 내일 아침까지 두지 말고 그날에 주라는 것이 율법의 명령입니다. 품삯을 가로챈다는 것은 크리스천의 인격과 삶이 아닙니다. 율법이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장사가 안되어 남는 게 거의 없습니다. 그 이야기가 자꾸 교회 안에 알려지니까 목사님이 위로한다고 "집사님, 그렇게 힘들게 사업을 하십니까? 그만하시지요. 내가보니 집사님은 사업을 안하셔도 얼마든지 여유있게 살 만하고 매주마다 골프치러 가셔도 괜찮겠는데 왜 그렇게 고민하고 계십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때에 그 집사님이 좋은 대답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래도 사업을 꼭 해야 될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과 함께 먹고 살아야 됩니다. 내가 그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됩니다. 둘째는 국가에 세금을 내야 됩니다. 내가 사업이 안되어도 직원들 임금 주고 세금 내는 그 재미가 있으므로 사업을 해야 됩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에게 이웃에게 돌릴 것을 가지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바로 빚입니다. 빚은 내 몫이 아닙니다. 이것은 갚아야 될 몫입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토론하면서 빚에 대한 강의를 하는데 두 가지 빚 말고 다른 빚은 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는 갚아도 안 갚아지는 만성 빚이고 또 하나는 처음부터 떼먹을 작정으로 남의 돈을 빌리는 악성 빚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외에는 다 빚을 지라는 것입니다. 갚을 수 있는 빚은 얼마든지 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빚을 안지고는 사업이 안된답니다. 그리고 그 분 이야기는 빚지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빚 갚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사업에 성공한다, 그러나 만성 빚과 악성 빚은 지지말라는 것입니다. 빚은 왜 갚아야 됩니까? 내게 돈을 준 그 사람이 나를 볼 때마다 마음에 상처를 받기 때문에 갚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나는 잊어버리고 있는데 돈을 준 사람은 절대로 상대방을 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수넴의 한 가난한 여인 집에 갔습니다. 하나님이 그 여인의 집에 복을 주셨습니다. 기름을 붓는데 이 기름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때에 엘리사가 이런 말씀을 합니다.
열왕기하 4장 7절에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게 하라"고 합니다. 빚은 내 몫이 아니라 갚아야 할 이웃의 몫입니다.
또한 세금은 네 몫이 아닙니다. 세금을 내야 될 우리는 절세는 가하지만 탈세는 안됩니다.
이랜드 박성수 사장이 이런 간증을 하였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두 가지 서원을 하나님께 했는데 뇌물과 탈세없는 사업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보니까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원을 했기 때문에 서원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해보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그분이 이렇게 비유를 하였습니다. 뇌물과 탈세없이 사업을 하려니까 뇌물과 탈세를 일삼는 사람과 내가 손발을 묶고 경기하는 것만큼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못하는 고충을 겪고 오해도 받았지만 십 년을 뛰어보니까 자기가 앞에 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은 17장 24절 이하에 바리새인들이 베드로에게 와서는 우리는 성전세를 냈는데 당신하고 당신 주인은 성전세를 안낸다, 우리는 성전세를 내는데 왜 당신들은 안내느냐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30장에 성소에 들어가는 남정네들과 전쟁에 나갈 남정네들은 반 세겔을 성전세로 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베드로는 성전에 출입하면서 성전세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책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때에 주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저희로 오해케 하지 않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너와 나를 위하여 주라"고 하셨습니다.
세금을 안내는 것은 오해를 받을 만하다. 그래서 물고기 입에 돈을 낚도록 하는 기적을 베풀어서라도 주님이 성전세를 물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 몫
세번째는 내 몫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몫을 나중에 주시더라도 제일 많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몫을 드리라, 그리고 이웃을 위해 십 분의 일을 삼 년마다 밭에서 추수하지 말고 남겨 두라, 그리고 품삯을 갚아주라는 것이 율법에 그대로 나오는 교훈입니다. 이웃에게 추수해서 돌릴 것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몫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추수절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교훈입니다.
맺는 말
우리는 추수감사절기를 통해서 또 한번 율법의 정신을 우리 삶 속에 배워야 됩니다. 내가 혹시라도 하나님께 돌릴 몫과 이웃에게 돌릴 몫과 내게 돌아올 몫을 섞어 놓고 살지 않았는지 하나님은 그 몫을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그 몫을 인식하라는 것이 감사절기를 주신 정신입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가져오라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삼 년마다 이웃을 위해 밭에 추수할 것을 남겨두라고 하나님이 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몫을 구분하지 못하는 혼돈이 있는지 모릅니다. 몫을 구분하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출처/이용호 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