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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의 영원하신 주 (마22:41-46)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빈정거리는 교묘한 질문을 한 적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그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모세에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모세의 권위를 빌어 예수님을 처치할 구실을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략을 오히려 그들의 무지를 드러내시는 기회로 역이용하심으로써 그들의 두 가지 노림수를 다 무력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두개인들은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어 물러나고 말았습니다(눅20:40). 오늘 본문보다 조금 앞서는 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다” 합니다. 사두개인들이 간교한 질문으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는 데 실패하자 이번에는 바리새인들이 다시 몰려와 달려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일 구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가는 무리들의 모습이 훤히 보입니다. 평소에는 서로 싸우던 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일에는 자연스럽게 협력하며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악하고 거짓된 세상의 세력들은 진리와 의를 대적하는 일에는 늘 하나가 되곤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로 하여금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게 만드신 예수님께서는 사두개인들에 이어 몰려온 바리새인들 또한 더 이상 당신에게 아무런 간교한 질문을 할 수 없게 만들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뜻은 또 멋지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뭐라고 합니까?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어떤 질문과 무슨 말씀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딱 두 차례의 질문으로 그 말 많은 바리새인들의 입을 막아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던지실 수 있는 수많은 질문 중에 굳이 이 질문을 하신 것은 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 자신에 대한 이해의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믿음과 구원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지식에 관한 질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다니면서 사람들로부터 들은 대로 대답했습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마16:14). 그 어느 것도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7-19).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고백하는 지식은 주님께서 그 위에 복을 주시고 교회를 세우실 정도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주님께서 음부의 권세도 물리치게 해주시고 천국 열쇠까지 받게 해주실 만큼 대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적대시하며 모함하려는 모든 자들을 결정적으로 침묵시키시면서도 또 그 기회에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게 하시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보다 더 적절한 질문은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모든 시도는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 오신 당신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당신 자신에 관한 질문을 던지심으로써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당신을 부인하며 제거하려고 하는 모든 저항세력에 대해 정면 승부를 거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은 사실 그 대답이 여러 가지로 주어질 수 있는 폭넓은 질문입니다. 질문을 받는 사람이 어떤 방향으로 대답해야 할지 당황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서 그 질문의 방향을 좁혀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구의 자손이냐?” 원문은 “누구의 자손이냐?”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누구의 아들이냐?”라는 뜻의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며 당신 자신에 대해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밝히 가르치려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역시 예수님께서 예상하신 대로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대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유대인들의 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메시야 이해에 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메시야 이해의 문제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메시야를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로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하는 물음에 “다윗의 자손이니이다”라고 대답한 것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 가문의 후손일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를 다윗 같이 유대 민족에게 군사적인 승리와 정치적인 해방과 경제적인 부를 가져다 줄 지도자로 기대하고 있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성취로 보내신 메시야이신 당신께서 다윗과 같은 그런 지도자나 군주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크고 높으실 뿐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에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이시고 왕이심을 가르치려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뇌리에 박혀있는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상식적 명제에 새로운 의미, 참된 의미를 입혀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상식적 명제의 재해석을 위해 준비하신 후속 질문은 본문 43-45절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예수님께서는 이 두 번째 질문을 하시며 성경을 인용하셨습니다. 사두개인들을 침묵케 하실 때에도 모세오경을 들어 설명하셨듯이 바리새인들을 잠잠케 하시는 데에도 성경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시편 110편의 1절을 사용하셨습니다. 시편 110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것을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한 말로 확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시편을 훗날에 메시야로 오신 당신에 관한 예언적인 글로 받아들이고 계셨습니다. 다윗이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한 말 가운데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에서 앞의 “주”는 아버지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고, 뒤의 “주”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110:1을 인용하여 질문하시며 다윗이 먼 훗날 자기의 혈통에서 태어날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른 사실에 주목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를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자기보다 높고 크고 뛰어난 분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자기의 혈통에서 태어날 메시야를 “주”라고 불렀다는 이 사실로부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메시야는 단순히 다윗의 인간적 자손이 아니며 다윗처럼 오직 이스라엘 민족의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해방자나 군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이해시키려 하신 것입니다. 45절에서 보듯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는 것이 다윗의 혈통에서임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가 다윗 가문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그는 혈육으로 다윗의 자손인 사람 이상의 어떤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옛날 다윗 자신이 성령의 감동으로 “주”라 불렀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인간적으로 다윗의 후손이라면 왜 이스라엘의 왕이요 최고로 높은 사람이었으며 선조인 다윗 자신이 그를 “주”라고 말했겠느냐고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우편에 앉게 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두 가지 질문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신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자신이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만의 메시야가 아니며 온 인류의 메시야이시고,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가 아니라 온 인류를 죄와 죽음과 불안과 절망과 기쁨 없음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며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한때는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시키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고 있던 메시야가 순전히 인간적이고 민족적인 해방자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런 메시야로 알고 군중이 열광하여 그를 앞세우며 무력봉기라도 일으키는 날에는 로마군대의 무자비한 유혈진압과 희생을 초래할 것을 예수님께서 염려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참 메시야로서의 구원사역을 이루실 날이 가깝기까지는 자신이 그리스도이심을 아직 드러내려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참 뜻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진정한 뜻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단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가난을 면하는 것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빼앗기고 이방나라의 압제와 민족적 굴욕과 수모를 당하며 경제적인 착취와 수탈을 겪어야 했던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우상을 숭배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뜻과 그를 향한 그의 백성의 참된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배반과 우상숭배와 신앙적 무지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곧 모든 인간의 하나님 앞에서의 죄였습니다. 이 모든 죄와 그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닥친 죄의 노예상태와 죽음과 불안과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시려는 것이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하나님나라의 회복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민족의 국가를 회복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리시기 위하여 던지신 것이 그리스도에 관한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혈통으로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셨으나 그는 근본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참 인간으로 오셨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유대인만의 주가 아니시고 만인의 주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단지 옛날 예수님 시대에만 그리스도이셨던 것이 아니라 영원히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시간적으로 그의 훨씬 후대에 오실 이를 가리켜 “내 주”라고 부른 것은 그리스도께서 시간을 초월해 계신 이 즉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이의 영원한 주이신 것입니다. 그가 모든 이의 영원한 주시라는 것은 그는 단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겪고 있던 문제의 해결만 아니라 온 인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유일한 주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정치적 경제적 해결사로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죄와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주로 오신 참되고 영원한 왕이신 것입니다. 로마제국과 싸워 그 압제로부터 해방을 쟁취해줄 군사적 메시야가 아니라 사탄과 악한 세상의 권세를 파하시고 죄의 노예상태와 죽음의 공포와 절망과 불안으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해방시키실 구세주로 오시는 메시야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을 때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그러자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님께서 다시 대답하셨습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18:37). 예수님께서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오신 왕이십니다. 영원한 구원과 생명의 진리를 선포하려 오신 주님이십니다. 먹어도 또 배고프게 하는 양식과 마셔도 또 목마르게 하는 음료가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게 해주는 하늘의 양식과 음료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일시적인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영원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오신 주님이십니다. 잠시의 만족과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과 복락을 담보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예수님께서 물으셨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질문을 오늘 우리를 향한 주님의 물음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모두의 유일하시고 영원하신 구원자이시고 주님이심을 분명히 하며 확고히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나에게 당장 급한 세상적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적인 복 받기를 원해서 예수 믿으며 그의 강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이의 영원하신 주이심을 잊지 않으며, 모든 인간과 온 세상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그의 오심을 간구하는 우리가 됩시다. 오직 온 누리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땅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이번 성탄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목사 설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