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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마 1:1-11)
충신교회/박종순목사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태복음 1:1-11)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로 시작됩니다. 창세기 12:2과 15:4, 17:2-4, 22:18을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7:12-16을 보면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대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마태복음 서두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시작한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의 왕이며 메시야이시며 다윗의 자손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9:27을 보면 앞을 못 보는 맹인이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에 나와 소리를 지르며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12:23을 보면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들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2을 보면 귀신들린 딸을 둔 어떤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멸시받던 이방여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네 동네를 다녀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와 소리쳐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라고 그들이 고백한 다윗의 자손이란 단순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뜻이 아니라 예언된 말씀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과 다윗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고 그 열두 아들들이 낳고 낳아 이스라엘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입니다. 다윗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된 사람입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였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혈통상 조상일 뿐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도 역시 조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신앙은 행동하고 순종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떠나라면 떠났고, 바치라면 바쳤습니다. 단 한번도 ‘아니오, 못합니다, 싫습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 해도 바쳤습니다. 다윗도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인 이었습니다. 소년시절 골리앗과의 싸움은 유명한 일화로 전해 내려옵니다. 그때 다윗이 한 말을 살펴봅시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7)고 했고,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삼상 17:48)라고 했습니다. 그때 사울왕은 골리앗이 무서워 일선에 나오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골리앗과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싸우기만 하면 뭘 합니까? 그는 싸워 이겼습니다. 그것은 철저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두 사람 다 허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도 후처를 취했고, 다윗도 남의 여자를 탐내 범죄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고, 허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그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본처와 후처, 적자와 서자간의 갈등으로 집안에 시험과 갈등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경우 잘못을 책망 받는 순간부터 하나님께 회개하고 자복하는 눈물을 펑펑 쏟았습니다.
셋째는 예배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짐을 푸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다윗도 지방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고, 자신이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기도했습니다. 시편 안에는 수를 셀 수 없는 다윗의 찬양과 기도가 들어 있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가던 날부터 지금까지 매주 목요일이면 백악관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합니다. 그 자리에는 백악관 식구들과 원하는 외빈들이 포함됩니다. 이 일을 놓고 민주당 쪽에서 그리고 부시를 반대하는 언론들이 꼬집기 시작했습니다.
“백악관이 교회냐? 왜 대통령 집무장소를 사설집회장으로 바꾸느냐 당장 집어 치우라”고 대들었습니다. 부시의 대답이 멋있습니다. “나는 거듭난 이후 20년 동안 매주 성경을 공부했다. 이것이 나의 생활방법(Lifestyle)이고 철학이다 그것을 백악관에 들어왔다고 바꾸란 말이냐?”얼마나 당당하고 멋이 있습니까? 내내 교회 잘 다니다가 지위가 높아지고 돈을 벌고 일거리가 많아지면 교회를 멀리하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신앙 생활을 힘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를 기뻐하시고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을 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대통령 각하, 당신이 이라크 전쟁을 결정할 때 아버지 부시는 뭐라고 대답했습니까?”그 질문에 부시 대통령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 질문에 부시 대통령은 “나에겐 두 분의 아버지가 있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는 텍사스에 있고 더 높은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다. 나는 더 높은 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결정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부시의 신앙입니다. 족집게 도사한테 묻고, 유명하다는 무당 점쟁이한테 묻고, 선거 참모들한테 자문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받은 것입니다. 이 신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이며 은혜와 복을 받는 신앙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6까지는 계속 낳고 낳고로 이어집니다. 한때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구호를 내걸고 캠페인을 벌이던 가족계획협회에서는 마태복음 1장을 안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낳고 낳고 자체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창세기 1:28을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했고, 창세기 22:17을 보면 “내가 네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바로 낳고 바로 키우고 바르게 사는 것은 축복이며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낳고 낳고로 이어지는 족보 속에서 네 여인의 이름을 찾아내야 합니다. 3절을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습니다. 남편이 병으로 죽자 대를 이어야 된다며 다말이 어느 날 시아버지 유다를 속이고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창세기 38). 있을 수 없는 일을 다말이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아브라함의 족보를 써 내려가면서 다말과 유다의 이름을 대문짝만하게 집어넣은 것입니다. 5절을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했습니다.
라합 이야기는 여호수아 2:1-6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녀는 여리고 성의 기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리고 성을 정탐하러 들어간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기지를 발휘해 살려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살몬과 결혼해 보아스를 낳게 된 것입니다. 천대받고 멸시받던 기생의 신분이 택함 받은 이스라엘의 아내로 변한 것입니다.
5절을 다시 보면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절로 건너가면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성경 룻기를 보면 룻은 모압에 살고 있던 모압여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아내 이름은 나오미이고, 큰아들은 말론, 둘째는 기룐이었습니다. 살고 있던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먹고 살기가 힘들어지자 그들은 모압 땅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모압 땅에 자리잡고 두 아들이 모압여인들과 결혼까지 했습니다. 큰며느리는 오르마, 둘째 며느리는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엘리멜렉이 죽고 뒤를 이어 말론과 기룐이 차례로 죽는 비운이 닥쳤습니다. 거기다 모압땅에 흉년이 들고 베들레헴은 풍년이 들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는 다시 살길을 찾아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면서 두 과부며느리에게 작별을 청했습니다. 가진 것도 대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여기서 헤어지자고. 큰며느리는 울면서 떠났습니다만 룻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룻기 1:16을 보면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7절을 보면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방인은 족보 근처에도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의 효부라면 족보에 천번 만번 대문짝만한 글씨로 넣어도 모자랍니다.
훗날 베들레헴에서 그녀는 보아스와 결혼하고 메시야의 족보에 등재된 것입니다.
6절을 보면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야는 다윗을 위해 국방을 책임진 장군이었습니다. 어느 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된 다윗이 탐심을 품고 밧세바를 궁으로 끌어드려 동침했습니다. 불륜이 들통날 경우 닥칠 후환을 걱정한 다윗이 우리야 장군을 최전방 전투에서 전사한 것처럼 꾸며 암살해버립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정실처럼 받아드리고 그녀에게서 솔로몬왕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의 부정과 탐욕으로 얼룩져 낳은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물론 첫 번째 낳은 아들은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그런 관계, 그런 여자를 족보에 써넣은 것입니다.
족보 기록이 주는 몇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정직한 책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를 기록한 책입니다. 개인을 영웅시하거나 그렇다고 죄인에게 돌팔매를 던지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개인의 자서전이 아닙니다. 다윗의 치부도 아브라함이나 야곱의 실수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세게는 보통 사람들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남자들만 큰소리치는 세계가 아닙니다. 의인들만 큰소리 치는 세계가 아닙니다. 죄인의 이름도 들어가고, 유대인도 들어가고, 여자도 들어가고, 남자도 들어갑니다. 장차 우리가 들어갈 천국도 그렇습니다. 동서남북 열두 진주대문이 있고, 수문장도 없습니다. 누구나 들어갑니다. 단 예수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셋째 예수 중심의 족보라는 것입니다. 족보 기록의 주된 목적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룻이나 다말이나 요셉을 드러내고 높이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출생과 그 배경과 조상들을 설명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족보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을 기록한 이유도 결국 메시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밝히기 위해서 이고, 신약도 태어나신 예수, 성장하신 예수, 복음을 전하신 예수, 고난받으신 예수,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승천하신 예수, 다시 오실 예수를 설명하고 증거하기 위해 쓴 책입니다.
내가 살고 우리가 사는 이유도 예수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에 앉아있고, 서있고, 움직이고, 일하는 이유도 예수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 때문에 살게 된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안에 살고 있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