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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1:1-8
요한계시록은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을 받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근본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도 요한이 유배된 밧모섬은 에베소에서 로마로 가는 해로에 단 한번 정류하는 곳입니다. 그가 밧모섬에 정배 갔던 것은 계1:9절 말씀을 통해서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형벌은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할 때에 있었던 일인데 특히 도미시안 황제 때 그러니까 AD81-96년경에 일반적으로 행하였던 형벌입니다.
본서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대하여 분명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의 궁극적인 목표가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땅에 얽매이지 말고 하늘에 속한 성도답게 내세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서의 명칭은 1절에 나타나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시’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감추인 것을 들어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휘장으로 가려둔 것을 벗겨서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세계의 모든 역사는 서로 연관 없이 우연히 생기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적인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의 작정된 계획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또한 어떤 시련과 어려움에 처한다할지라도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복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한 과정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큰 위로를 받으며 참고 인내하며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동요를 받지 말고 굳세게 믿음의 정절을 끝까지 지켜나가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의 적인 사탄 마귀는 결국 실패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당시 박해에 직면한 성도의 심정으로 읽을 것이요, 또한 말세지말에 임할 시험과 환난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코 어떤 호기심이나 이상한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일에 대하여 보여주셨는데, 그것은 천사를 그의 종 요한에게 보내어 상징적으로 이러한 사실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고 했고 2절에 보면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 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두절 말씀의 뜻은 상징을 사용하여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는 여러 가지 환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성령의 조명을 받아 이해해야지 적당하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당하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벧후3:16절에 보면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성경해석은 무책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잘못 해석하면 자신도 멸망하게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큰 피해를 주게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진정으로 복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해주고 있고 특별히 때가 가까운 이 시대에 성도들이 힘써야 할 일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전 기간이 종말의 때이지만, 오늘 우리가 처한 시대는 더한층 말세가 임박한 때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말세니까 말세에 관한 성경만을 골라서 읽어야하는데 특히 요한 계시록에 치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물론 말세에 처한 성도들로써 말세에 관한 말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 고해서 계시록 외에는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에 어느 곳을 보아도 말세지말이 되면 계시록에 치중하라는 말씀은 한 곳도 없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계시의 말씀이란 신구약 66권 전체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4절에 상반 절에 보면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본서가 서신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서는 기본적으로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물론 당시에는 일곱 교회에 보냈지만 ‘일곱’이라는 수는 완전수로 역사상 전 교회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많은 숫자가 나옵니다. 그 숫자에는 다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1’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 ‘2’는 증인(11:3), ‘3’은 삼위 하나님의 수 혹은 하나님의 완전성(사6:3), ‘4’는 피조계의 전체(7:4), ‘5’는 지난날의 관한 수(17:10), ‘6’은 사람에 관한 수---인본주의적인 노력, 건설, 조직, ‘7’은 사람에게 행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완전하다는 뜻, ‘10’은 시련의 관한 수, ‘12’는 선택, 완전조직, 건설 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께서 그 종들에게 열어 보여 주시려고 주신 말씀인데, 그 내용은 ‘반드시’ 그리고 ‘속히’될 일이라고 했습니다.
‘반드시’란 말은 예언 성취의 필연성, 다시 말하다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속히’될 일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속히’라는 말은 ‘곧’이라는 뜻이 아니라 ‘급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역사는 어떤 기간을 두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즉시 이루어지는 구원의 역사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시는 순간 즉시 구원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빨리 이루어진다든지,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다 구원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는 순간 완성되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세 가지 직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첫째로 충성된 증인, 즉 선지자직을 말하고, 둘째는 ‘죽었던 자’ 즉 제사직을 말하고, 셋째는 ‘임금들의 머리’ 곧 왕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근거는 모두가 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절대로 희생이 없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하여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바로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보수적이요, 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라 무조건적이요, 희생적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고 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신 공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과 같은 것으로 죗값은 피 곧 생명의 지불로써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6:1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를 명망의 형벌에 매는 줄과 같은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 무서운 줄을 끊으시고 멸망의 형벌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 찬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행위의 업적은 물론 제일차적으로 우리에게 미쳤지만 그 최종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으로 그 목적을 완전히 이룬 것입니다.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했는데 그것은 제사장의 나라 곧 그리스도를 임금으로 모시고 질서 있고 평화로운 제사장들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는 이렇게 질서와 평화를 생명과 같이 여기며 이를 잘 이루어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므로 왕되신 예수님의 말씀을 엄수하여 영적 질서를 세워야합니다.
7절에 보면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을 상장하는 말입니다. 이를 누구나 다 볼 것이라고 했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을 박해한 자들에게 대한 통칭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벌벌 떨며 애곡하리라고 했습니다. 심판을 무서워 떨게 될 것이며, 회개하지 안은 것을 통분이 여김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을 더럽고 추악한 죄인들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렇게 소망 없고 비참한 자들이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 할 수록 하나님의 무조건 적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하여 더욱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일을 어떤 의무적으로나 책임 때문에 하지 않고, 감사하므로 즐거움으로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와 즐거운 마음으로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내세를 잘 준비하여 주님 다시 오실 때에 기쁨으로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