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13:6

“여로보암”은 “솔로몬”임금 당시의 성을 건축할 때에 감독으로 일을 했던 자로 선지자 “아히야”를 만났습니다.  아히야의 예언에 “네가 장차 이스라엘 10지파의 왕이 되리라”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알고 저를 죽이려 하므로 애굽으로 도망하여 “시삭” 왕에게 의탁하고 있었습니다.(왕상 11:27-40)
그리하여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와서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의 기회를 타서 북방 10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것입니다.(왕상 12:20) 그러나 백성들이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것을 보면서 장차 자기를 배반할 염려가 있다하여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섬기게 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배반하는 죄가 될 뿐 아니라 백성들을 죄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무명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냅니다. 그래서 우상 앞에 분향하는 여로보암에게 가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심판을 예언하였습니다.
2-3절에 “하나님의 사람이 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가로되 단아 단아 여호와께서 말씀하기를 다윗이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이 낳으리니 저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 제사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위에 사르리라 하셨느니라”라고 하며 예조로 제단이 갈라져 재가 쏟아지리라고 외졌습니다.
  이 예언의 내용은 장차 요시야라는 인물이 태어나 벧엘의 단을 부수고 거짓 제사장을 죽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예언을 입증하는 기적 곧 예조가 일어나 그 단이 갈라지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절에 “여로보암 왕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며 저를 잡으려 하더라”
제단에서는 인간에 감정을 폭발해서도 아니되고 명예나 권세를 자랑하며 인간에 의를 보여도 안되며 다만 제단에서는 하나님께 회개와 통회자복만이 있어야 하며 그의 섭리만 바라는 자세를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성전은 성스러운 곳입니다.  죄인들이 와도 의인으로 변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에 제단은 기도와 예물과 찬송과 예배를 드리는 곳입니다. 거룩하며 경건한 곳입니다.  하나님만 영화롭게 해야하며 은혜와 축복을 받는 곳이요 모든 문제를 해결을 받는 곳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도의 바른 신앙 가운데 하나가 교회관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신자가 교회관이 바로 되지 못하면 신앙이 바로 되지 못하며 또한 하나님에 은혜와 복을 받지 못하며 자기중심의 신앙이 되고 구제불능의 자리에 이르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4절에 “여로보암왕이 하나님의 사람을 벧엘에 있는 단을 향하여 외쳐 말함을 들을 때에 단에서 손을 펴서 저를 잡으라 하더라 저를 향하여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며” 합니다.
  청천병력같은 이 소리에 놀란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하여 손을 내밀자 그 손이 말라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우상에 분향 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를 잡으라고 외치며 내민 손이 말라 버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당연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해야 했는데도 자기가 경고 받은 진노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경고를 전해준 은혜를 경멸히 여겨 하나님의 사자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사자를 부리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보호하시며 인간의 분노를 막아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손을 마르게 함으로서 여로보암의 분노를 제지시켰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선지자를 해칠 수도 없었고 마음대로 내민 손을 거두어 들일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송아지를 분향하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을 때는 그 손이 마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잡으라고 가르치는 손을 뻗자 그는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그 손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자신의 정책적 성공을 도모하기 위한 종교행사를 거행하는 중간에(1절; 12:25-33) 홀연 하나님의 심판의 예언이 임했습니다.
이는 곧 훗날 벨사살 왕의 잔치 자리에 손가락이 나타나 심판의 글자를 쓴 내용과 유사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단 5:1-9, 17-28). 즉 축제, 잔치 등의 요소가 심판, 파멸과 대비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어떤 절정의 순간에 돌연 그에 대한 심판이 들려왔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이러한 돌발성은 심판 선고가 주는 충격을 훨씬 강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편 손이 말라 다시 거두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종교 정책이 순탄하게 진행되어 마침내 거국적인 종교 행사를 가지게 된 마당에 갑작스런 선지자의 출현과 모욕적 발언이 있자 극도로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손을 들어 신복들에게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그 순간 손이 말라버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릴 때 육체적인 손 정신적인 손 재정적인 손 제반분야의 손이 마르게 될 것입니다.
말라(야베쉬)는 '시들다'는 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이는 식물이 수분이 없어 메마르는 모양을 가리킵니다(욥 18:16; 시 102:11; 사 19:7; 렘12:4; 겔 17:9). 그러나 이 '야베쉬'는 또한 '심판'을 의미합니다. 땅이 마르고 가뭄이 드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사 15:6; 19:5-7; 렘 12:4; 50:38).

    5절에 “하나님의 사람의 여호와의 말씀으로 보인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진지라
예언대로 '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는' 현상(5절)은 훗날 요시야의 숙정(肅正)을 미리 알리는  예표입니다(왕하 23:15-20).
그러므로 이는 예언자의 선포 내용에 권위를 더해 주는 부수 현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를 통하여 말씀을 전달하고(2절) 그 말씀을 입증하기 위해 이처럼 즉각적으로 이적을 보이신 것은, 당시 백성들의 신앙 상태가 매우 퇴락되었음을 시사하는 단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요시야는 앞으로 300년 후에 태어날 유다의 왕을 가리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예언은 놀라울 뿐입니다(왕하23:15-20).

6절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청컨대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내 손으로 다시 성하게 기도하라 하나님의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니 왕의 손이 다시 성하여 전과 같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지자에 하나님이 같이 하시므로 여로보암의 손이 마르게도 하고 회복하게도 하도록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은 가장 값있고 능력에 손으로 사용하여 크게 쓰임받는 손이어야 할 것을 교훈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일하는 자와 같이 하시므로 역사가 나타나게 하십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 10:17)고 했습니다.  이들은 갈릴리 전도여행을 수행했던 12제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들을 내어 쫓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모세는 손을 들어 기도할 때에 흥해 바다가 갈라지게 하는 역사와 블레셋과의 싸움에서는 기도의 손을 들으므로써 승리하는 팔이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손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손이 되었습니다.(행 3:1-10)
   12년간이나 혈루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고침을 받기도 했습니다.(막 5:25-34)
우리들의 손은 복을 받는 손이 되며 뭇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이 어디나 계시지만 특별히 제단에  계시어서 역사하심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여로보암의 “손을 마르게도 하였고 또한 회복하게도 하셨으며 단이 갈라지며 재가 단에서 쏟아지게도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 제단에 계시어서 그에게 축복해 주시었고(창 22:1)
   호렙산의 모세의 제단에도 계시어서 돌판에 계명을 내려 주시었고 벧엘에 야곱의 제단에 나타나시어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개명해 주시었고 한나의 기도의 제단에 계시어서 저의 소원인 아들을 잉태케 하셨고(삼상 1:1)  엘리야의 제단에 계시어서 불로 응답하시어 간구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에 제단을 특별히 경각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제단에서 멸시하는 태도를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엘리야를 놀리던 아이들이 대머리라고 하다가(왕하 2:23-24) 숲속에서 곰들이 나타나 저들을 먹어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미리암은 모세를 동생으로만 생각하고 그의 결혼 한 것을 비방하다가 문둥병이 걸리어 불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하시는 엘리사를 속이다가 문둥병이 걸리어 불행을 당했습니다.(왕하 5:27) 군대장관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을 멸시하고 듣지 아니할 적에는 문둥병을 고칠 수 없었으나 그의 말을 듣고 순종할 때는 문둥병을 고친 것입니다.(왕하 5:8)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사도들을 속이려다가 단번에 부부가 멸망을 당했습니다.(행 5:1-11)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는 일군들을 존경을 하되 멸시 맙시다.  이는 본인이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을 무시하는 것은 종국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섭리를 무시하는 예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한 불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을 받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때에 왕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하면서 후에 예물로 대접할 것을 약속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벧엘을 떠나갔습니다.(7-10)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여로보암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보다는 그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호의를 베풀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행위는 우상 숭배의 죄악을 멈추지 않는 여로보암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담겨져 있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였습니다. 적어도 그는 이 시점까지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권세 앞에서도 용감히 사명을 다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선지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말하고 하나님의 대언자로 살아야 합니다.


출처/강성찬목사 설교 중에서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