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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보다 크신 주님 (마태복음 12 : 38 - 42)
이적이란 하나님의 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주를 창조
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인간 자체의 이적
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 까닭은 인간 자신이 피조물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모 성도는 『이적을 믿지 않는 종교는 약한 종교이다. 그
러한 종교로서는 세상도 사람도 감화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
님께서 이적을 행하심은 의의가 있고 또 반드시 필요성에 따라 행하신
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큰 의의를 가진 이적을 터득해야 하
겠습니다.
성경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는데
유대나라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보기 원하는 표적을 예수에게
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인의 심리는 평소에 볼 수없는 신기한 것
을 동경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
리라. 그래도 그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는 격의 기적을 행
하실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안목을 즐겁게 해주는 마술사
가 아니요, 또한 곡예의 묘기를 연출하는 분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생명
을 내포한 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큰 표적을 상징하는 것입니
다.
현대는 과학만능을 자랑하는 시대로써 원자무기와 인공위성을 제작
해 내는가 하면 고대 인류의 꿈이었던 달나라에 도달을 실현의 단계로
옮겨가고 있는 우주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역에서는 인지와 과학도 너무나도 뒤떨어져 있습니
다. 생명은 인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원한 숙제로써 남을 뿐입니
다. 밀알 하나를 만들 수 없고 벌레 한 마리를 아직 제조할 수 없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싹을 그 속에 포함한 요나의 이적은 20세기
후반의 시대에도 보일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여 다시스로 가
는 배를 타고 가다가 갚은 바다에 던짐을 당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하
늘나라에 갈 수 없는 처지일진대 넘실거리는 대양의 창파 속에 그 몸
을 깨끗이 수장하는 것이 나은 일일는지도 모르나 제이의 죽음은 돌연
저를 습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흑암 중에 신음하
게 되었으니 이 이상 잘 묘사할 수 없는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절망! 그러나 절망에서의 출구는 삼일 후에 나타났으니,
통쾌하게도! 신비롭게도! 요나는 물고기의 토하는 바가 되어 육지에
던짐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의 심장은 격렬히 뛰었고, 재차 임
하는 하나님의 사명의 말씀에 저는 순종의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하
여 니느웨의 거역과 음란과 불의에 도전하여 외침으로, 니느웨를 죄악
중에서 회개하게 하여 구출하였던 것입니다.
요나가 살고 따라서 니느웨가 살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표적입니
다.
예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
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혹 큰고기
의 입이 삼킨 바를 토해 낸다는 일은 있을 수 있거니와 인류의 숙적
죽음이란 냉엄한 입이 삼켜 버린 후에 다시 거기서 뛰쳐나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영웅과 호걸과 열사들이 다 이 분묘에서 함몰되어 지금까지 자고 있
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요나 보다도 솔로몬왕 보다 더 큰 이가 누구입니까?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
네!』 예수님 생명의 승리로서 우주의 감격스런 신기원을 수립했습니
다. 마치 하얀 냉각지대에 봄이 찾아와 시들어 구겨진 푸른 날개를 다
시 펴는 것과 같이 예수의 부활은 썩어짐의 열매로서 탄식하는 만물에
게 유일한 소생의 소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류에게 부
활과 영생을 얻게 한 것입니다.
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성의 사람을 구원함같이 무덤에서
나오신 주 예수는 인류를 사망에서 부활케하며 영생하게 하는 것입니
다. 역사상 최대표적은 요나의 표적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함에 생명
을 내건 것을 명심해야 하겠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비롯하
여 역대의 증거자들을 붙드시고 역사해 오심으로 금일의 교회의 발전
을 보았다는 이 사실을 잘 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부흥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러 오는 분이 있습니
다. 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나의 경력과 나의 지식과 나의 재
능과 나의 수단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
습니다 이것이 교회 부흥의 비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마귀의 세력을 이기신 주님만이 교회를 진정
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회와 국가가 죄악과 불의를 탈피하여 의를 지향한 참
삶의 길을 모색함도 선과 생명의 근거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되시고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주
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
셔서 교회를 부흥시키시며 방방곡곡에 교회를 설립하여 이 지상에 천
국수립을 위하여 착실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부흥이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함을 알고 성도들
은 교회 부흥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함과 간구함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
니다. 구제품이나 영화 등 인간 수단으로 참된 교회 부흥을 기하지 못
함을 기독교 역사가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라
긍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을 이기시고 교회 부흥의 주
인공이 되시며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에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간절
히 매어 달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6)
이적이란 하나님의 사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우주를 창조
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입니다. 인간 자체의 이적
은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그 까닭은 인간 자신이 피조물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모 성도는 『이적을 믿지 않는 종교는 약한 종교이다. 그
러한 종교로서는 세상도 사람도 감화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
님께서 이적을 행하심은 의의가 있고 또 반드시 필요성에 따라 행하신
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큰 의의를 가진 이적을 터득해야 하
겠습니다.
성경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고 하였는데
유대나라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보기 원하는 표적을 예수에게
행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유대인의 심리는 평소에 볼 수없는 신기한 것
을 동경하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 땅에 오심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
리라. 그래도 그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라』는 격의 기적을 행
하실 의도는 추호도 없는 것입니다. 그는 안목을 즐겁게 해주는 마술사
가 아니요, 또한 곡예의 묘기를 연출하는 분은 결단코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보일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생명
을 내포한 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일 큰 표적을 상징하는 것입니
다.
현대는 과학만능을 자랑하는 시대로써 원자무기와 인공위성을 제작
해 내는가 하면 고대 인류의 꿈이었던 달나라에 도달을 실현의 단계로
옮겨가고 있는 우주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영역에서는 인지와 과학도 너무나도 뒤떨어져 있습니
다. 생명은 인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영원한 숙제로써 남을 뿐입니
다. 밀알 하나를 만들 수 없고 벌레 한 마리를 아직 제조할 수 없습니
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의 싹을 그 속에 포함한 요나의 이적은 20세기
후반의 시대에도 보일 표적이 되는 것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항거하여 다시스로 가
는 배를 타고 가다가 갚은 바다에 던짐을 당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하
늘나라에 갈 수 없는 처지일진대 넘실거리는 대양의 창파 속에 그 몸
을 깨끗이 수장하는 것이 나은 일일는지도 모르나 제이의 죽음은 돌연
저를 습격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흑암 중에 신음하
게 되었으니 이 이상 잘 묘사할 수 없는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한
폭의 그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절망! 그러나 절망에서의 출구는 삼일 후에 나타났으니,
통쾌하게도! 신비롭게도! 요나는 물고기의 토하는 바가 되어 육지에
던짐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의 심장은 격렬히 뛰었고, 재차 임
하는 하나님의 사명의 말씀에 저는 순종의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하
여 니느웨의 거역과 음란과 불의에 도전하여 외침으로, 니느웨를 죄악
중에서 회개하게 하여 구출하였던 것입니다.
요나가 살고 따라서 니느웨가 살았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표적입니
다.
예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
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혹 큰고기
의 입이 삼킨 바를 토해 낸다는 일은 있을 수 있거니와 인류의 숙적
죽음이란 냉엄한 입이 삼켜 버린 후에 다시 거기서 뛰쳐나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영웅과 호걸과 열사들이 다 이 분묘에서 함몰되어 지금까지 자고 있
을 따름입니다.
그러면 요나 보다도 솔로몬왕 보다 더 큰 이가 누구입니까? 그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분입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
네!』 예수님 생명의 승리로서 우주의 감격스런 신기원을 수립했습니
다. 마치 하얀 냉각지대에 봄이 찾아와 시들어 구겨진 푸른 날개를 다
시 펴는 것과 같이 예수의 부활은 썩어짐의 열매로서 탄식하는 만물에
게 유일한 소생의 소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인 인류에게 부
활과 영생을 얻게 한 것입니다.
고기 뱃속에서 나온 요나가 니느웨성의 사람을 구원함같이 무덤에서
나오신 주 예수는 인류를 사망에서 부활케하며 영생하게 하는 것입니
다. 역사상 최대표적은 요나의 표적이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입니다.
부활절을 맞이한 우리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부활을 증거함에 생명
을 내건 것을 명심해야 하겠으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을 비롯하
여 역대의 증거자들을 붙드시고 역사해 오심으로 금일의 교회의 발전
을 보았다는 이 사실을 잘 인식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교회 부흥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 부흥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으러 오는 분이 있습니
다. 저는 서슴지 않고 대답하기를 『나의 경력과 나의 지식과 나의 재
능과 나의 수단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
습니다 이것이 교회 부흥의 비결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마귀의 세력을 이기신 주님만이 교회를 진정
으로 부흥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회와 국가가 죄악과 불의를 탈피하여 의를 지향한 참
삶의 길을 모색함도 선과 생명의 근거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옴에 있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 되시고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주
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
셔서 교회를 부흥시키시며 방방곡곡에 교회를 설립하여 이 지상에 천
국수립을 위하여 착실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부흥이 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함을 알고 성도들
은 교회 부흥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함과 간구함에 전력을 다하는 것입
니다. 구제품이나 영화 등 인간 수단으로 참된 교회 부흥을 기하지 못
함을 기독교 역사가 역력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은 지당한 사실이라
긍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망을 이기시고 교회 부흥의 주
인공이 되시며 우리의 소망이 되신 주님에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간절
히 매어 달리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콜슨영스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11-03 1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