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태수 (민중신학연구소장, 호서대 교수)

I. 개념정의

1. 민중

"민중이 누구냐" 하는 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민중과 민족"을 이번 주제로 정한 일본성서학연구소가 생각하는 민중은 민중신학에서 말하는 민중을 전제한다고 보고 민중신학적인 입장에서 민중을 간단히 정의해 보려고 한다.

"민중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중신학뿐만 아니라 민중사학(民衆史學), 민중경제학, 민중문학, 민중사회학 등 각 분야에서 학자들마다 자기 나름대로 민중을 정의하고 있다. 그 동안 한국에서 민중의 개념정의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지만 완전한 합일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 민중론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어느 학문, 어느 개념을 막론하고 토든 학자들이 완전한 일치에 이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필자는 여 기에서 민중개념 정의에 대한 논의를 상술하는 것을 생략한다. 그 대신 학자들마다 민중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그러나 중요한 부분에서는 대체적인 공통점과 합의점들이 있으므로, 그동안 신학 이외의 학문영역들에서 논의된 바 있는 민중론과, 서남동, 안병 무, 김용복 등을 비롯해서 민중신학자들이 논의한 민중론을 참고해서 필자 나름대로 생각하는 민중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 명제로 요약 정리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1)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며 사회적 실체이다.
(2) 민중은 정치적 피억압자, 경제적 피수탈자, 사회적 소외자 등 사회의 하류층이다.
(3) 민중은 자각된 대중(민중)뿐만 아니라 우매한 대중(민중)도 포함한다.
(4) 민중은 역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이다. 상대에 따라서는 비민중이면서 동시에 민중적 성격''을 가질 수도 있다.
(5) 하나님과 예수는 민중의 편에 서신다.
(6) 민중이 주체가 된 나라는 전 국민이 민중화된 나라 즉 정의·평등·자유·평화의 나라다.

이러한 민중이해에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중들을 찾아본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구약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임시 거주자, 품 꾼, 극빈자, 약자, 가난한 자, 노예, 그리고 신구약 중간시대에는 암하아레츠 등이 민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신약에서는 오클로스가 민중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임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2. 민족

브리태니커 사전은 민족(nation)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남들과 구별되는 몇 가지 문화적 공통사항을 지표(指標)로 하여 상호간에 전통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 여기서 말하는 문화적 공통사항에는 언어, 종교, 세계관, 사회조직, 경제생활, 그 밖의 생활양식 등이 포함된다."

동양언어에서 민족이라고 쓰는 말을 독일어에서는 Volk와 Nation 두 가지로 쓴다. Volk는 기원, 역사, 문화 그리고 대부분 언어까지도 동일한 인간집단을 말한다. 독일어에서 이 말은 Nation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Nation이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다면, Volk는 ''언어적이고 문화적인'' 의미를 더 많이 함유하고 있을 뿐이다. 현대에 와서 민족 개념은 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국가의 성립과 함께 국민문화와 국민성이 발달하면서 국민이 바로 민족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한민족(韓民族), 일본민족, 독일민족 등 대부분의 민족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미국, 러시아, 중국 등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민과 민족이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각 민족은 각각 나름대로의 민족의식 (Nationalbewußtsein)을 가지고 있다. 모든 민족이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관념 내지 의식이 민족의식이다. 이와 같은 민족의식은 자기 민족이 가지고 있는 독자성을 명확하게 인식하여 자기 민족의 역사적 전통에 긍지를 가지고 나아가 미래의 문제에 대해서도 역사적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민족의식에 합리적·사상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애국사상의 체계화이며 이것이 그대로 민족주의와 연결된다.

민족주의는 불란서 혁명 때에 이미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특히 일차대전 이후에 많은 나라들이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제1,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전체주의적인 성향의 민족주의가 나타나서 세계의 평화를 파괴하였다. 또한 나라 안에 소수 민족이 있을 경우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이 소수 민족을 억압하여 억지로 소수 민족을 다수 민족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소수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하려는 민족주의도 있다. 이럴 경우 이러한 민족주의에 대항하는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가 나타나 서로 대립하게 된다. 민족주의의 파괴적인 측면은 특히 한 민족의 민족주의가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와 이해상충(利害相衝)이 되어 서로 부딪치고 분쟁을 일으키고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 경우이다. 자기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고 자기 민족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이것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는 민족의식과 노력은 결코 세계평화를 방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긍정적인 의미의 민족사랑/애국심(Patriotismus)은 다른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전제한 민족사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중·동부 유럽에서 승리를 거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민족주의,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신생국가들의 식민지 민족주의는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자기 민족의 역사, 문화, 고유성을 회복하고 지키려는 민족주의였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침략적이고 억압적인 극단적인 민족주의 (Chauyinism, Jingoismus, Pangermanismus 등)는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해치게 된다. 세계 제2차대전시의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 그리고 일본의 군국주의적 민족주의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II. 민중과 민족

우리는 위에서 민중과 민족, 그리고 민족주의가 어떠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개념정의 차원에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기본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성서에서 민중과 민족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민중의 하나님

하나님은 민중의 하나님이다. 우리들은 위에서 구약성서에 나타난 민중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 임시 거주자, 품꾼, 극빈자, 약자, 가난한 자, 노예 등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물론 이들 이외에도 구약성서에는 민중에 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민중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람들로서 이들 민중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알아 보려고 한다.

고아(yatom) : 구약에서 하나님은 "고아를 돕는 자"(시편 10,14), "고아의 아버지"(시편 68,5), "고아의 하나님"으로 자처하고 나선다. 하나님은 고아를 억울하게 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것을 금한다(출애 22,21; 잠언 24,10; 예레 7,6).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고아를 적극적으로 도울 것을 여러 가지로 지시한다. 추수 때에는 고타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하여 일부러 곡식단이나 올리브 열매, 포도를 남겨 두어야 한다(신명 24,17-22; 레위 19,9; 23,22), 그리고 잔치 때에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불러서 반드시 참석시켜야 했다(신명 16,11-15). 또 삼 년마다 드리는 "민중의 십일조"는 가난하고 소외된 민중인 고아, 과부, 레위인에게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신명 14,28-29; 26,12-15).

과부(almana) : 과부는 보통 가난하고 고독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과부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섰다(신명 10,18). 하나님은 이러한 과부를 착취하거나 억압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못하도록 지시하는 한편(출애 22,22; 신명 27,19; 이사 10,2 등), 남편 대신 과부를 보호하고 책임질 의무를 이스라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부여하였다. 고아와 마찬가지로 과부는 추수 때에 남은 이삭을 거두어 가질 수 있었고(신명24,19-21), 칠칠절, 장막절 등 축제 때에 참석하여 함께 음식을 나누어먹을 수 있었다(신명 16,11.14). 또 과부는 삼 년마다 바치는 "민중의 십일조"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다(신명 14,28-29; 26,12-l5).

나그네(ger) : 나그네는 본토인(本土人, ''erah)과 외국인(nokri) 사이에 있는 존재다. 나그네는 정치, 경제, 기타 다른 이유로 고국을 떠나 외국 땅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본토인들이 누리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정치적·경제적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있는 나그네를 하나님은 긍휼히 보시고 그들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선다. 추수의 남은 이삭을 나그네가 먹도록 놔두고(레 위 19,10; 신명 24,19-21). 안식년에 실시되는 휴경(休耕)의 수확물을 먹을 수 있도록 하며(레위 25,6-7), "민중의 십일조"를 받아 곤궁을 면하도록 했다(신명 14,28-29).

임시 거주자(toshab) : 임시 거주자는 시민권 없이 남의 나라, 남의 집에 곁들여 사는 체류자들이다. 임시 거주자는 가난한 자로서 품꾼(sakir)이나 남종, 여종과 같이 휴경 등 사회보장제도의 혜택을 받기도 했다(레위 25,6.35). 임시 거주자는 종교적인 면에서 나그네 (ger)보다도 더 차별대우를 받았다(레위 25,10; 출애 12,45), 임시 거주자는 나그네(ger)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는 개념으로 쓰인 경우가 많다(창세 23,4; 레위 25,23, 시편 39,12).

품꾼(sakir): 품꾼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지만, 품삯을 받고 일하는 품팔이 일꾼이었다(신명 24,14). 그들은 오늘날의 ''날품팔이꾼"과 마찬가지로 하루 동안만 일을 하거나(레위 19,13; 신명 24,15), 일 년 동안 계약을 맺고 일을 하기도 하였다(레위 25,50.53; 이사 16,14). 법전들에서는 이러한 품꾼을 보호하는 조치로서, 해지기 전에 당일의 품삯을 지불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레위 19,13; 신명 24,15)예언자들은 이들을 착취하는 자들로부터 품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예레 22,13).

극빈자(ebyon) :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에브욘이라 불렀다. 에브욘을 "극빈자"(極貧者)"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은 에브욘의 하나님이요 그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분이다(시편 35,12-14; 86,1). 아모스서에서는 에브욘과 의인이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2,6; 5,12). 법전들에서는 에브욘을 보호하는 여러 가지 법들이 있다(출애 23,1-9; 레위 25,39-43). 그리고 아모스(2,6; 4,1), 예레미야(5,28; 22,16), 에스겔(18,12) 등 예언자들은 하나 같이 에브욘의 편에 서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에브욘의 옹호자들로 나선다.

약자(dal) : 달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약자이다(아모 5,11; 8,6). 이들은 힘있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의 억압과 착취의 대상이었으므로 예언자들은 이들 약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 부자와 권력자들을 비판하고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였다(아모 5,11; 이사 10,1-2; 스바 3,12). 또 시편과 잠언에서도 달은 보호받을 대상으로 나타난다(시편 82,3-4; 72,13; 113,7; 잠언 14,31;22,16; 28,8), 하나님은 이러한 달의 하나님이다(잠언 14,31).

가난한 자(''ani, rash): "아니"는 일차적으로 경제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출애 22,25; 레위 19,10 등). 또 아니는 정신적으로 겸손하며 경건한 자를 가리킨다(시편 34,6; 74,21 등). 아니는 완전한 이민으로서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악한 자들과 부자들, 권력자들의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이다(이사 3,15; 잠언 22,22; 시편 35,10등). 야훼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긍휼히 여기시며 이들을 도우시고 구원하신다(이사 10,2; 14,32; 시편 22,24 등). 예언자들 또한 이들 아니의 고난과 억울함을 대변하고, 이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들을 비판하고 심판을 선언한다(에제 16,49; 아모 8,4 등). 아니와 비슷한 아나우(''anaw, 복수 ''anawim)는 구약성서에서 별 차이가 없이 상호교환적으로 쓰인다.
"라쉬"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삼하 12,1-4). 라허는 특히 지혜서에 많이 나온다(잠언 14,20; 18,13; 22,7). 라쉬는 가난해서 노예가 되기도 하고, 생존경쟁의 낙오자가 되기도 하는 사회의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노예(''ebed, shiphah, ''amah) : 노예는 주인의 재산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자유롭게 사고 팔고 할 수 있었다. 인격이 없는 물건 취급을 받은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은 노예가 되더라도 면제년 즉 안식년 혹은 희년이 되면 해방되도록 법전들이 규정하고 있다(출애 21,2-11; 신명 15,1-18; 레위 25,39-55). 그러나 여자노예(출애 21,7)와 외국인 노예(레위 25,44-46)는 해방될 수 없었다. 또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해방되기를 포기하는 노예들도 있었다(출애 21,5-6). 이러한 노예들은 평생을 인간대접을 받지 못한 채 주인의 소유물로서 살지 않으면 안되었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의 편에 섰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아벨, 노아, 아브라함, 하갈, 이스마엘, 야곱, 이집트의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그들의 편에 섰다. 그리고 왕조시대에는 피지배계층인 민중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편에 섰 다. 왕조시대의 민중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2. 민중을 억압하는 민족의 지배자들

이스라엘 민족은 사사시대가 지난 다음 주전 11세기경에 왕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은 민족과 국가가 구별되지 않고 민족과 국가가 동일한 민족국가였다. 물론 통일왕국시대 이후에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단되어 한 민족 두 국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지만, 여기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국가라는 차원에서 동일한 범주로 보고 왕국치하에서의 민족/국가(Nation)와 민중의 관계를 살펴보려고 한다.

왕국시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희망과는 달리 평등과 자유와 정의의 사회를 이룩하지 못하고, 반대로 억압과 착취와 불의와 불법의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에서 계층 간의 갈등이 생겨났다. 크게 보아서 국가의 권력과 부를 독점한 상류층과, 힘없고 가난한 하류층 즉 민중계층으로 둘로 갈라져 이스라엘 사회는 갈등과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시 말하면 이 시대에는 민족과 국가를 유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대였다. 이러한 계층 간의 갈등에서 하나님은 어느 편에 섰는가? 이스라엘의 왕국사를 말하는 신명기사가의 역사서와 역대기사가의 역사서, 그리고 예언서들 은 하나님은 이러한 갈등관계에서 권력자와 부자들의 편에 서지 않고, 가난하고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민중들의 편에 섰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분명 민중의 하나님이다. 아래에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통일왕국시대의 왕들 : 다윗은 사무엘서에서, 그리고 역대기상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사무엘서에서는 다윗에 대한 비판도 상당부분 차지한다(삼하 11-열상 2장). 다윗은 부하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든다(삼하 11장). 그리고 그의 통치기간 동안에 압살롬의 반란(삼하 13-19장)과 세바의 반란(삼하 20,1-2)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반란에 가담한 사람들은 다윗의 통치에서 소외된 민중들, 특히 유다 지파를 제외한 북쪽지파 사람들이었다.

솔로몬은 왕으로서의 위엄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 호화로운 왕궁을13년에 걸쳐 건축했다. 그리고 성전도 7년에 걸쳐 건축하였다. 이외에도 나라를 방어하기 위하여 많은 군사요새들을 구축하였다. 이와 잘은 대토목공사를 장기간에 걸쳐 하기 위하여서는 우선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이를 충당하기 위하여 솔로몬은 많은 백성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였다. 한때 이 강제노동에는 무려 18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감독관만도 3,300명에 이르렀다(열상 5,13-16). 건축공사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또 솔로몬은 일천 명이 넘는 후궁을 거느리고(열상 11,3) 사치스러운 식생활을 하였으므로(열상 3,22-23) 많은 재정을 필요로 하였다. 솔로몬은 이 비용을 무역을 통해 일부 충당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은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서 충당하였다. 국가건설, 민족번영이라는 명분 하에 민중들만 허리가 휘도록 무거운 짐을 지게 된 것이다(열상 12,1-11). 솔로몬 시대는 경제적으로 풍요를 가져온 시기였다. 무역이 활발하였고, 특히 솔로몬은 말, 병기 등의 무역을 독차지함으로써 많은 이득을 이스라엘에 가져왔다. 그리고 상업, 공업 등 개인기업도 상당히 번창했다.

그러나 일부 도시, 소수 지배자들만이 이러한 부를 독점하여 상류층을 형성함으로써 노동자, 노예, 가난한 자 등 민중과 계급 차별이 생기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었다. 또한 권력도 공무원, 군인, 상인, 지주, 부자 등 소수 상류층이 독점하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결국 솔로몬 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의 민주적 지파체제가 무너지고 전제군주적인 계급사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 : 유다는 르호보암으로부터 마지막 왕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열아홉 왕 모두가 다윗 후손으로서, 다윗 왕조가 계속되었다. 이 다윗 왕조는 백성들의 자유와 평화, 평등을 지켜 주는 목자로서의 역할을 결코 잘 했다고 볼 수 없다. 르호보암 이후의 유다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 열왕기나 역대기가 주로 종교적인 관점에서 왕들을 평가한 반면, 경제, 사회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않기 때문에 대민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서에서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다행히 이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들의 예언이 남아 있어서 어느 정도는 그 시대상을 알 수 있다. 이사야, 미가, 스바냐, 예레미야 등 남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들에 의하면 대부분의 왕들과 상류층들이 불의를 자행하고, 가난한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였다고 비판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왕국 유다의 왕들은 북왕국의 왕들보다도 그래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왕들이 많지만, 어느 한 왕도 부분적으로나마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 않은 왕은 하나도 없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 : 여로보암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강압정책에 시달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나라를 갈라 나가 새로운 왕국을 창건했지만, 다윗과 솔로몬의 과중한 세금과 강제노역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 농민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는 솔로몬의 군사제도, 행정제도를 그의 영토 안에 유산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세제(稅制)나 강제노역, 징집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못하고 늘어나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여전히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여로보암은 그의 혁명을 뒷받침해 준 예언자나 민중들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새 질서확립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북왕국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왕들은 오므리 왕조와 예후 왕조에 속한 왕들이었다. 오므리 왕조 때에는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과중한 세금, 강제노동의 증가, 빈부격차의 심화 등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아합 왕이 왕권을 남 용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이야기는, 당시 왕을 포함 한 상류충이 민중들을 어떻게 착취하였는가 나는 것을 잘 보여 준다. 오므리 왕조를 뒤이은 예후 왕조가 통치하던 주전 800-750년은 북왕국의 전성기였는데, 특히 여로보암 2세 때(주전 787-747년)가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부와 권력이 소수에게 편중되고, 민중은 착취대상 이 되어 많은 세금과 강제노역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모스, 호세아 등이 나타나 이러한 착취와 불의에 패해 준엄한 비판과 심판을 선언하였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다윗왕조에서 독립해 나간 것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억압과 착취, 그리고 강제노역으로부터 해방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므리 왕조, 예후 왕조의 경우에 서 보았듯이 북왕국의 왕들도 여전히 민중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전제군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북왕국은 민중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왕국으로 출발했으나 결국 그 이상에 미치지 못하고 말았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통일왕국시대는 물론 남북 왕국시대의 이스라엘은 국가권력을 잡은 통치자들이 국가유지, 민족공동체 형성이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민족 공동체인 국가는 민중을 한낱 수단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민중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봉사하는 기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는 그 반대였다. 하나님은 이러한 민족의 지도자들에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경종을 울리고 예언자들을 보내서 회개를 촉구하고 심판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이들 민족의 지도자들은 이를 듣지 않고 악행을 계속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민중을 해방하고 구원하기 위하여 남북 왕국을 멸망시키고 왕을 비롯한 상류층들을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현대 민족국가의 모습은 어떤가?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독일의 나치 정권은 독일민족의 우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유대인을 학살하고, 장애인, 유전병 환자들을 살해하거나 더 이상 출산을 못하게 하기 위하여 단종(斷種) 수술을 하였다. 장애인, 유전병 환자들의 단종수술은 지금 북한에서도 실시되고 있다고 한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흑인들은 미국인이면서도 극심한 인종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부락민, 아이누족, 재일 한국인 등이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이들은 모두 민중들이다. 이들 민중들은 한 국가 안에서 차별대우를 받고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세계 도처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한국의 예를 들어 보자. 한국은 지난 30여 년 이상을 군사정권 하에서 살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의 근대화, 경제개발 등을 내세우면서 민중의 자유를 박탈하고 억압하며 노동자를 착취하는 정책을 자행하였다. 민족이라는 미명하에 민족의 주체요 주인인 민중을 노예화한 것이다. 이러한 일은 20세기에 생겨난 거의 모든 신생국가들에서 일어난 현상들이다.


III. 민족과 민족

우리는 위에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민중과 민족/국가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는 어떠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이스라엘 민족은 어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1. 이스라엘의 민족의식; 선민사상

이스라엘의 민족의식은 ''선민의식''이라는 독특한 형태를 띠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 외에도 자기 민족이 선민이라고 주장하는 민족들이 있지만, 이는 대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본따서 흉내내거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한낱 방편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본래적인 선민사상을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 땅 위에 이스라엘 민족만큼 선민의식이 강한 민족은 없다.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나타내는 중요한 용어는 "선택하다''는 뜻을 가진 바하르(bahar)라는 말이다. 이 말은 신명기 7장 6-7절에 처음으로 나온다. 그리고 열왕기상 3장 8절에도 나온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여 일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신명기사가의 시대 즉 주전 7세기 후반에야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선택사상을 너무나 ''바하르''라는 한 단어에 의존하여 설명하려는 데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된다. 선민사상을 나타내는 말로서 ''바하르''와 동의어로 쓰이는 말들이 구약성서에는 많이 있다. ''알 다'' (창세 18,19; 아모 3,2), ''짓다'' (출애 I5,16). ''부르다'' (호세 11,1) 등의 용어가 이스라엘의 선택과 관련하여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은 ''바하르''란 한 단어에 매여서만 보려고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야훼 문서 기자(J)는 이미 아브라함의 부르심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을 보고 있고(창제 12,1-3), 엘로힘 문서 기자(E)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맺은 시나이 계약(출애 19,5-6)에 의해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 주전 7세기경에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언제인지는 확실히 모르지만 그 훨씬 이전에 시작되어 내려온 사상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스스로를 ''하나님(야훼)의 백성'',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몫''으로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이스라엘의 선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택해 세웠는가? 이스라엘 선택의 목적과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의 본질을, 선민사상과 관련된 주요 구절들을 중심으로 찾아보도록 하자. 야훼 기자(J)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창세기 12,2-31).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을 대표하고 있다. 여기에 아브라함을 택한 목적이 두 가지로 나타나 있다. 2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한 큰 나라 즉 이스라엘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축복해 준다는 약속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결코 이스라엘 민족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3절에서 말한다. 아브라함 즉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이 땅의 모든 족속에게까지 전달되어 온 인류가 함께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하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 선택의 궁극적 목적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 함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축복의 ''중간 전달자''라는 말이다.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설화에 계속 반복되어 나타난다(창세 28,18; 22,18; 26,4; 28,14).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 즉 선민으로 계약을 맺는 장면을 묘사한 엘로힘 기자(E)는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의 정체를 말한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 19,5-6).

여기 나타난 ''내 소유'',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은 선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전문용어이다. 이 구절에서 특히 주목할 말은 ''제사장 나라''라는 말이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사람들의 죄와 간 구를 하나님께 알리고 용서를 고하는 역할이 제사장의 일이다. 이 ''중재자의 역할''을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 이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하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중재자적인 역할에 대하여 또 다른 적절한 표현을 한 예언자가 있는데 그는 제2이사야다. 그 는 당시 세계 중심지인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여러 다른 민족과 국가들을 경험하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한다 (이사 41,6; 44,1-2), 종은 남을 섬기는 자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요 증인으로서(이사 43,10, 44,8) 다른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섬겨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의미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사명과 목적을 위하여 그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은 그만한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가? 아니다. 그 반대다. ''바하르''(선택)라는 분명한 용어를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선택을 말하고 있는 신명기 7장 6-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는 야훼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야훼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야훼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이스라엘이 선택될 만한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다거나, 수효가 많고 위대한 민족이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작고 보잘 것 없는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역설이다. 왜 하나님은 이런 역설적 인 선택을 했을까? 거기엔 이유가 있다. 첫째, 자기가 잘나서 선택된 것이 아니므로 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라는 의미고, 둘째, 자기 자신이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였으니 늘 이 세상의 작고 미천한 사람과 민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일하라는 뜻이 고, 셋째, 결코 강대국이 되어 남의 나라를 지배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고 섬기며 봉사하라는 의미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역할을 올바로 함으로써 이 땅 위에 자유와 평화와 평등의 사회가 건설될 수 있기를 하나님은 바라신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사실은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역할을 수행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범을 이스라엘에게 바라신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을 종합하여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이 선민이 된 것은 ''자기 목적''(Selbstzweck)을 위해서가 아니고, 세계구원과 인류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중재자, 봉사자로서 일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구별하신 본래의 의도인 것이다. 이러한 범세계 구원사상은 구약성서 도처에 나타나 있다(호세 2,23; 이사 19,24-25; 말라 1,11; 시편 22,27; 86,9).

이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을 보면 그 방향과 내용이 야훼 신앙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스라엘만 창조한 것이 아니고 만민을 다 창조하였으므로 만민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만민이 한 가족, 한 인류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너무 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리고 ''역사의 주'' 하나님은 온 세계 만민을 통치하시고 그 역사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되기를 바라시고, 또 그렇게 되도록 섭리하신다. 또 하나님은 ''배방의 하나님''으로서 어느 한 민족도 다른 민족의 지배 하에서 살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리고 모 든 사람이 다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민중의 하나님'' 야훼는 이 땅 위의 어떤 민중적 민족도, 어떤 약하고 가난한 민중도 멸시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창조의 본 모습대로 하나님의 형상답게 대접받고 살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화의 하나님''은 이 세 계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이 갈등과 전쟁을 그치고 에덴 동산처럼 평화롭게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믿는 야훼의 뜻이요, 이것을 이 땅 위에 실현하도록 하나님의 선민으로 부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할 일이다. 물론 하나님의 이 거대한 뜻은 이스라엘만 이 아니라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민족이 다 함께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장자로서 우선적으로 이 사명을 감당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2.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많은 전쟁을 하기도 하였다. 출애굽 당시 이집트와의 대결, 광야에서 아말렉, 아모리, 모압 등과의 전투, 가나안 정착 당시 가나안 민족들과의 대결, 사사시 대에 모압, 미디안, 암몬, 불레셋 등과의 싸움, 왕조시대에 불레셋, 아람, 바빌론, 앗시리아 등과의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적대관계에 대한 것은 생략하기로 하고, 위에서 살펴 본 이스라엘 선민사상의 궁극적 목적, 즉 세계구원과 인류공동체의 평화를 위한 중재자, 봉사자로서의 역할과 관계된 타민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1) 평화적 공존사상(요나서)

요나서는 주전 400-200년 사이에 기록된 책이다. 요나서는 작은 책이지만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책이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의 적국이다. 그리고 죄가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이 당장 쳐들어가 점령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요나서의 처방은 이와 정반대이다.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고 구원하신다. 결국 니느웨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방이 둘이 아니요 하나가 되는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은 이미 이사야도 묘사한 바 있다. "그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이사 19,24-25). 하나님이 이스나엘을 선민으로 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세계 만민에게 선포하여 모든 민족이 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구원을 받고 한 인류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나님 안에서 세계 만민이 한 공동체가 되는 평화공존의 길을 요나서는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다."(미가서)

미가서 4장 1-5절은 이사야서 2장 2-5절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평행을 이루고 있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 아직까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사상이다. 여기에 전쟁종식의 영구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국제적인 어려운 문제들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민족들이 그 돌파구를 야훼의 말씀에서 찾으려고 시온 산으로 몰려 올 때(1절), 선민 이스라엘은 이들 민족들에게 전쟁이 아닌 평화공존의 길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맡기신 선민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의 의미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 길"이 바로 전쟁종식의 길임을 여기서 밝히오 있다. 너무나 쉽고 자명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인류역사는 이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 왔다. 사람들은 전쟁을 막고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전쟁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는가? 아니다! 그 반대였다. 평화를 빌미로 만든 무기로 결국은 전쟁을 일으키고야 말지 않았던가? 이제 더 이상 이러한 양두구육식(羊頭狗肉式)의 사이비 평화논리에 속지 말아야 한다.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첫째, 더 이상 무기를 만들지 말고, 둘째, 이미 만들어진 무기는 폐기하여 생산도구로 만들고, 셋째, 군비축소를 계속하여 결국 이 땅 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무기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고, 넷째, 그리하여 전쟁이 역사에서 파라지게 해야 한다. 이 길만이 영원한 전쟁종식의 길이다. 하나님의 백성된 자는 반드시 이 길을 앞장 서 가야 한다(미가4,5).

이러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아들인 서구 기독교 민족들의 타민족에 대한 자세는 어떠하였는가? 서구 기독교 국가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15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식민지주의다. 포르투갈은 15세기 이후 남미의 브라질을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았으며, 스페인도 칠레에서부터 멕시코에 이르는 거대한 식민지제국을 건설하였다. 네덜란드는 16세기 초부터 자카르타를 비롯하여 인도네시아를 점령하여 식민지를 삼았다. 영국은 아시아를 비롯하여 북미,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 전 세계에 걸친 해질 날이 여는 대식민지제 국을 건설하였다. 이들 서구 기독교 국가들은 위에서 살펴 본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이나, 요나서와 미가서에 나타난 봉사정신이나 평화사상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는 전 세계적으로 팽창주의가 발호 하여 독일을 비롯하여 미국, 벨기에, 이탈리아, 러시아, 그리고 일본 등이 식민지 쟁탈전에 나서서 가능한 한 넓은 지역을 식민지로 확보하여 억압과 수탈정책을 자행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 대부분의 식민지 국가들은 해방되었지만, 아직도 많은 신생국가들이 식민지 시절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계든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독일과 일본이 혹시나 또다시 재무장하여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세계는 강대국들의 팽창주의, 식민주의 가 다시금 발호 하여 더 이상 약소민족들을 괴롭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IV. 맺는 말

(1) 민족이나 국가는 과 자체가 목적일 수 없다. 민족이나 국가는 그 구성체인 북민이나 민중이 인간다운 삶,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 수 있도록 해 줄 때 비로소 그 존재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반대로 민족이나 국가의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한다면 이러한 민족이나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민족국가들이 이 땅 위에 여전히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2) 민족주의 가운데는 ''침략적 억압적 민족주의''가 있는 반면에 ''해방적 자주적 민족주의''가 있다. 전자는 대개 강대국들에서 나타나고, 후자는 약소국들에서 나타난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이스라엘의 선민사상에서 인류의 발전과 평화에 기여하는 ''봉사적·희생적 민족주의''가 있음도 보았다.

어느 의미에선 각 민족은 모두 다 어떤 형태건 민족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 이기주의적인 침략적·억압적 민족주의는 인류 발전에 백해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민족주의, 민족의식은 모두 다 경계하고 배척하고,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해 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지배 하에서 아직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지 못했거나, 외형상 독립은 했다 할지라도 아직도 완전한 자주 적 국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약소 민족들에서 나타나는 해방적·자주적 민족주의는 적극적으로 도와주어서 완전한 독립과 주권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올바른 민족의식, 선민의식에서 보았듯이, 보다 적극적이고 희생적이며 봉사적인 민족의식, 민족주의가 모든 민족들에 나타나 인류의 구원과 평화공존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이 길만 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아 남는 길이기 때문이다.

논문의 출처
임태수, "구약에서의 민중과 민족", 한국민중신학회편『민중신학』-창간호/1995, (한국신학연구소), pp.57-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