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수 410
그날 현충사 정원의 벤치에는 초가을의 따스한 햇살이 한가롭게 내려앉아 있었다.
그때 고요함을 깨뜨리며 어디선가 확자지껄한 소리가 밀려들더니 '효도관광'이란 플래카드를 허리띠처럼 두른 관광버스에서 노인들이 하나둘 내려서고 있었다.
대부분 칠십이 훨씬 넘어보이는 그 노인들 중에서 한 노부부가 걸음을 옮겨 벤치로 걸어가 앉았다.
쭈글쭈글한 피부, 검은 머리칼을 셀 수 있을 만큼 세어버린 은빛 백발. 할아버지의 콧잔등에 맺힌 땀을 닦아주는 할머니의 손이 갈퀴발처럼 거칠어 보였다.
"영감, 힘들지 않소?"
"나야 괜찮지만 몸도 편치않은 당신이 따라나선 게 걱정이지"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얼굴엔 병색이 완연했다.
"내 걱정일랑 붙잡아 매시고 당신이나 오래 사슈"할머니는 허리춤을 뒤적여 뭔가를 꺼내들며 말했다.
"자, 눈을 꼭 감고 입이나 크게 벌려 보슈"
"왜?"
"쪼꼬렛 주려고 그러우"
할아버지는 엄마 말 잘듣는 아이처럼 시키는 대로 눈을 감고 입을 벌렸다. 얇은 은박지가 잘 벗겨지지 않는지 할머니는 몇 번 헛손질을 한 뒤에야 겨우 알맹이를 꺼낼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할아버지의 입속에 넣어주었다.
갑자기 할아버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야? 이건 쪼꼬렛이 아니잖아?"
"그렇수. 영감. 부디 나보다 오래 사시유"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입속에 넣어준 것은 우황청심환이었다. 할머니의 눈속에 정감이 빛나고 있었다. <빈터를 보면 꽃씨를 심고 싶다> 권채경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