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준

전도자의 가는 길에는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고난의 관문을 통과하는 일꾼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는 것이다.
웨슬리의 기쁨은 회심자의 수가 날로 증가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전도자는 그 수 보다는 질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웨슬리의 회심자들은 삶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는데 그 특징이 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지닌 신앙과 생활의 일치란 신학적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웨슬리가 부리스톨에서 처음 한 옥외 설교에서 얻은 회심자는 윌리암 웹이란 사람이었다. 그는 호기심으로 야외 집회에 갔다가 자기도 모르게 웨슬리의 전혀 새로운 설교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는 수 없이 많은 죄와 완고한 마음 때문에 무지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나를 향하신 하느님의 선하심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는 사랑으로 나의 마음을 이끄시어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을 따르게 하셨다." 그는 97세까지 살면서 철저한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었다.

웨슬리는 자기의 독특한 선교의 결과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임을 강조하였다. 그 회심자들 중에 상당수가 흉악한 죄인들 - 주정꾼들, 악담가들, 도둑들, 매춘부들, 간음하는 자들 -이었는데 그들은 수 십년 동안 자기들의 죄를 자랑으로 삼고 산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이신론이란 종교 뿐만 아니라 무신론이란 종교 개념조차도 소유하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같은 이 불쌍한 영혼들을 사랑하셔서 이들의 영혼 속에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신 것은 실로 거룩한 일이었다.

웨슬리는 자기의 선교를 통해 나타나는 새로운 역사에 대한 논리로써 자기를 비난하는 영국국교의 지도자들에게 도전하였다. 엑세터의 감독인 조지 래빙톤은 웨슬리 운동에 대하여 가장 신랄한 비판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감리교도와 가톨릭교도의 열광주의에 관한 비교"라는 글에서 욕설에 가까운 혹평을 하였다. 그의 결론은 "이 새로운 운동은 열광주의, 미신 및 협잡의 혼합물이다"라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응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었으나 바로 잡기 위하여 정중하게 대답하였다. "당신이 새로운 운동이라고 말하는 뜻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은...수년 전 영국과 아이랜드에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죄악으로 만연하였습니다. 종교의 형태는 거의 사라지고 그 영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암흑에서 하느님은 빛이 있으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짧은 기간 중에 하느님은 수천의 죄인들을 참회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인류에 대한 사랑 및 경건한 신앙으로 충만하여 모든 선행, 곧 경건과 자비에 의한 생활을 영위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회심자들 중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도 있었다. 13, 4세의 소녀가 있는가 하면 새드웰에서는 16세의 레베카 메이슨이란 소녀가 웨슬리의 설교를 들으러 온 일이 있었다. 그녀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웨슬리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웨슬리가 도착하고 자리가 정돈되자 웨슬리가 함께 부른 찬송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수치스런 나무에 못박히신 인류의 구세주를 바로 보라." 이 찬송가는 그녀에게 매우 신성한 충격을 주었고 그녀의 시선을 하느님의 사람에게 집중시켰다. 그녀가 집에 돌아갔을 때 그의 어머니가 설교가 좋았느냐고 물으니 그녀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다시 가겠어요."라고 하였다. 그녀는 80세가 되어 세상을 떠나기까지 주님을 위하여 열정적이고 빛나는 생활을 하였다.

웨슬리는 1751년 볼턴에서 부활절이 자난 후 이발소에 간 일이 있다. 그 주인은 손님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목사님으로 인해서 하느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주정뱅이었습니다. 그러나 창가에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나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그 때 나는 음주를 극복하는 힘을 달라고 간곡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느님을 내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주셨습니다. ...그는 나의 주욕을 제거하여 주셨으나 ...나의 불안은 계속 악화되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간) 하느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그가 나를 사랑하심을 알았고 마음의 평화를 느꼈습니다. 어제로서 12개월이 되었지만 나는 신앙이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이니까요. 그 때부터 나의 마음은 그의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전도자가 이발소 의자에 않아서 이런 고백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무적이겠는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것임에 틀림 없다.

1742년 엡워스에서 설교할 때 옥외에 모인 회중 가운데 어떤 귀족이 있었는데 그가 공개적으로 자기는 어떤 종교도 믿지 않는다는 말에 웨슬리는 놀란 일이 있었다. 그는 30세가 되도록 예배를 드린적이 없다고 하였는데 웨슬리의 설교가 끝났는데도 그는 동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웨슬리는 그에게 가까이 가서 "당신은 죄인이요?"하고 물으니 그는 "그렇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그의 아내와 하인들이 와서 마차로 데리고 가기까지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약 10년 후에 웨슬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 비록 육신은 쇠약했으나 신앙적으로 강함을 보고 놀랐다. 그는 웨슬리와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자기는 의심이나 공포심 없이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누려 왔고 지금 자기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영원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웨슬리의 설교는 성령의 충만함과 강력한 침투력의 조화로 이루어졌다. 어떤 군인은 악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한 사람으로 웨슬리가 미친 사람이란 말을 듣고 그 요소를 찾으려고 집회에 온 것이었다. 그러나 웨슬리의 설교가 시작되었을 때 군인은 그의 말이 자기에게 향햐였다는 생각과 함께 전율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공포로 인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하느님에게 땅을 갈라서 자기를 삼켜 버리던지 아니면 당장 죽여 달라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그 때 웨슬리는 설교를 맺으면서 외치기를 "악한 자는 자기의 길을 버리며 불의한 자는 자기의 길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오라. 그리하면 하느님은 그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고 하였다. "만일 이것이 진실이라면 오늘 나는 하느님께로 돌아가겠다"고 그 군인은 고백한 것이다.

웨슬리가 세 나라와 반세기를 걸쳐 열정적인 선교활동을 벌인 끝에 개인 생활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혁까지 싹트게 하였다. 찰스 그랜드 로벗슨이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웨슬리는 불가항력적인 정화력으로 타락한 공기를 쓸어 버렸다. 그의 설교와 복음은 수천 명의 남녀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영혼 없는 생활 속에 종교를 가져왔고 위로, 영감 및 심판이 되게 하였다. ...웨슬리는 그 시대의 악과 더불어 씨름하였고 모든 형태의 죄, 비극 및 죄악과 싸우기 위하여 영원히 새롭게 하는 내적 확신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을 선포하였다."

한 번은 링컨셔의 감리교인들이 마차에 가득 실려 치안 판사 앞에 서게 되었다. 판사는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냐고 묻자 오랜 침묵 후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잘난 척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만 합니다"고 하였다. 판사는 그 밖의 다른 것은 없는가고 물었을 때 한 노인은 대답하기를 "그들은 나의 아내를 개종시켰습니다. 그녀가 이전에는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양과 같이 조용합니다"고 하였다. 치안 판사는 명령하기를 "그들을 돌려보내시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동리에 있는 바기지 긁는 모든 여인들을 개종시키게 하시오"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우리 교회의 형편은 이것과는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이렇듯 수 많은 회심자의 등장은 실로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모든 의구심과 침묵하고 있는 비판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 사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닦아 놓았다. 개종자들은 복음의 능력과 생활의 변화를 보이는 산 증인이 되므로서 복음은 널리 펴지게 되었다. 웨슬리의 지도를 받은 설교자들은 밖으로 나아가서 무수한 민중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기수가 되었다. 수 많은 설교자들은 웨슬리처럼 순회 설교자가 되었다. 또 어떤 개종자들은 자기의 거주지에서 모이는 집회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카펜터 학장이 "성 바울, 루터 및 칼빈 이후 어떤 기독교 전도자도 그의 목회가 낳은 구체적인 결과 이상의 것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고 한 말은 결코 과장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존 웨슬리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물려 줄 유산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의 도서를 팔아서 얻은 이익은 감리교 기금으로 보내게 되었다. 몇 개의 개인 소유는 그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실상 그는 책, 옷, 마차 및 동전 밖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의 귀한 유산은 성령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그는 선교를 자기 나라에서 세계로까지 펼칠 수 있는 많은 개종자들을 뒤에 남겨 놓은 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그 명단을 만들 수 없다. 이것이 웨슬리가 남긴 가장 핵심적인 유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