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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선희목사 (소망교회)
결혼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어서 이 아들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역시 원만하지 못하여 많이 구타를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으나 역시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마다 제일 처음 얻은 이 아들이 마치 큰 혹과도 같이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의붓아버지를 두 번 세 번 바꾸어야 하는 그런 처지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그런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서운 부부싸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세 남자에게 배신당한 이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가짜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급기야 이 아이는 공격형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큰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또 큰 사고를 내어 불명예 제대를 당했습니다. 어쩌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그는 항상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나가는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됩니다.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 그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바로 이 때 제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거기서 듣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 엄청난 비극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인 제임스 밥슨이라고 하는 분은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삽니다. 우리는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을 받고 살고 사랑을 하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떠하든지 아이들을 호되게 나무라든가 혹은 때려보신 일이 있습니까? 두고보십시오. 사흘 후에 그 아이는 감기에 걸립니다. 어쩌면 병원에 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왜 꾸중을 듣고 매를 맞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스럽던 어머니의 눈, 그 사랑스럽던 아버지의 눈이 무섭게 변할 때에 이 아이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병이 듭니다.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들과 부모님 사이에는 오직 사랑,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보고 사랑을 먹고 그리고 자라고 성장하고 건강한 것입니다. 이 줄이 끊어지면 못 삽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세상의 비극이 있다면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반하는 데에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금 그 처지 그대로 놓고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느끼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사랑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성경 66권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하는 중에 언젠가 칼바르트의 책에서 이 한 문장을 찾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두고 두고 외우고 있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너무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여러분, 사랑 받을만 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만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받을만한 자가 못되는 것을 사랑해서 사랑 받을만한 자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 사랑을 믿는 자로 사랑을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이 구원이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사랑을 그 사랑의 속성을 드라마틱하게 상징적으로 실제상황에서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창조적 사랑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바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끝까지요 능력적으로도 끝까지요 속성적으로도 끝까지요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생각하건대 열두시간도 못되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눈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강파티처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십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신은 수난을 당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안과 그 아픔을 다 초월하고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매여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때에 꼭 찾아가야 될 환자가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약속을 하고도 찾아가지 못하다가 언젠가 한 번 밤 10시가 넘어서 ''더 이래선 안되지, 아무래도 내가 저 분이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가서 뵈어야겠다'' 병원을 찾아가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주사바늘을 온 몸에 꽂고 코에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찾아 들어갔더니 자기가 아픈 것과 자신이 지금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바쁜 중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일 아침 또 새벽기도 나가셔야 될텐데…" 걱정하시면서 어떻게 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느냐고 자꾸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그렇지 않다고, 나야 건강한 사람인데 가던지 오던지 상관이 있느냐고 "지금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위로를 해보아도 "아닙니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가는 길인데,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 이 시간에 이런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저를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분이 아주 심덕이 높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덕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병원에 가보면 자신이 좀 아프다고 해서, 자신이 아픈 것이 누구 때문에 아픈 것인가요? 좌우간 주변사람들을 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잖아요.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다가 그래도 ''한국에 와서 이 의술을 가지고 한국 동포를 위해서 마지막 생을 보내리라'' 하고 한국에 돌아오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그 의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자, 병원에서 주사를 놓을 때나 혹은 실밥을 뽑을 때에 좀 따끔하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의사가 미안해서 "조금 아픕니다"라고 말을 하고 시술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대개 미국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How are you feeling now? 어떻게 느끼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준비된 대답이 있습니다. "That''s O.K. Thank you,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대답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사를 놓다가 잘 안 들어가고 아프던가 하면은 딱 눈을 부릅뜨고 "너 가짜 의사 아니야?" 이런다고 합니다. 간호원 의사 할 것 없이 다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그럴 때에 ''이것 참, 무슨 앓는 것이 벼슬인가.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구나. 내가 이런 사람 치료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주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느껴보십시오. 내가 아픈 건 내가 아픈 것이지 왜 주변사람들까지 못살게 굴어요. 이 수준밖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래, 이젠 남에게 화를 내어도 되는 것입니까? 짜증을 낼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나대로 살던 죽던 나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나는 어떤 순간에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집착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바쁘다 뭐다 하게되면 누굴 돌아보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만 대단한 것처럼. 그 순간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헬렌 니어링이라고 하는 분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서 조화로운 삶의 원칙을 아주 쉽게 풀어서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웬만하면 오전에는 전화를 받지 말 것,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그리고 사색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하라. 아무리 바빠도 좀 그러한 영적인 경건한 시간을 갖도록. 새벽부터 전화 걸고 전화 받고 이 야단하지 말고, 그건 조화롭지 못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어떤 때에 보면 새벽기도 마치고 내려가서 잠깐 좀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에 "따르릉"하고 전화를 걸어서 별소리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러면 좀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고마운 사람. 그리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자꾸 나쁜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생각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세 번째는 돈을 벌더라도 온종일 몽땅 돈버는 데에만 쏟지 마라. 사업을 해도 사업에 미치지 말아라. 성공도 실패도 별거 아니고 다 한 사업도 끝낸 사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래야 나도 생각할 수 있고 남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뭐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죽느니 사느니, 거기에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일이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왜 죽기 살기로 그러십니까? 이제 여러분 아이들 대학 시험을 봅니다만 거기도 대충대충 해두십시오. 거기에 합격하면 살고 아니면 죽어라, 이거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가출을 하지요. 거기에 목숨 걸 거 없습니다. 해 보고 되면 좋고 안되면 다른 길 찾자, 그러고 말지 거기에 전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끝나자마자 자살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됩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착하지만 이 엄청난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제자들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장에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가룟유다가 자꾸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배신을 합니다. 이 사람이 독사 눈을 하고 쳐다본다는 말입니다. 그 가룟유다와 예수님 사이에 눈이 마주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하고 집착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있는 열 두 제자를 함께 사랑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를 포함해서 열 두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교부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길 때에 가룟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는 말입니다.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맘이 아니고는, 참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실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가룟유다 비슷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들이고,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갑니다. 이런 사건이 다 앞에 있습니다. 다 그러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설교학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교할 때에, 제가 이렇게 설교할 때 지금 보면 우리교회는 특별히 온 교인들이 다 이렇게 저를 쳐다봅니다. 전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오시고 깜짝 놀랍니다. 집중해서 쳐다보는 데 정신이 없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 잘하는 비결은 조는 사람을 보지 말아라. 졸기만 하나요, 입을 벌리고 천장을 보면서 아주 주무십니다. 그쪽으로 눈이 가기 시작하면 설교를 할 때에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면 설교가 그 날 잘못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 봐야 합니다. 그 쪽을 안 봐야 합니다. 설교를 잘 안 듣는 사람을 안보고 해야지 그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면 어느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 살면서 가능한 좋은 것만 많이 보십시오. 좋은 생각만 많이 하십시오. 긍정적으로 보십시오. 가룟유다가 분명히 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제자들도 시기 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생각하게 되면 참 기가 막힙니다. 이 밖에서 들어올 때에는 더구나 이 잔치에 올 때에는 발을 씻어야 하는데 종이 없을 때에는 서로서로 씻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시기 질투가 나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내가 우편에 네가 좌편에, 이러고 있을 때니 저들이 생각하기를 ''네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기겠다.'' 서로 팽팽하니 맞섰습니다. 결국을 발을 못 씻고 예수님의 발도 씻어드리지 못하고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우락부락한 마음,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내어놓아라" 그리고 씻기십니다. 베드로 차례에 갔을 때에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랬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영원히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넌 나와 상관이 없다." 또 생각을 돌려가지고 "얼굴서부터 다 씻겨 주세요" 라고 합니다. 좌우간 극성입니다. 이거 다 정말 뜻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러하든 저러하든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내가 왜 발을 씻기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지금은 모른다, 모르는 대로 씻기십니다. 모른다고 책망하지 않아요. 모른다고 져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사실입니다. 알아서 발을 씻기게 될 것이고 알아서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뒤에 알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현실을 이해하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에게 위탁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얼마나 귀중합니까?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하신 것입니다.
Carl R. Rogers 라고 하는 학자의 On Becoming a Person 이라고 하는 책에서 건강한 인격은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에 기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는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으로 대하고 수용합니다. 일을 만날 때에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의미가 있으니까.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또 하나는 실존적 삶을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속에 깊을 뜻이 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아침을 향하여 갑니다. 확실한 미래가 있고 자신만만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실함이 없는 사람은 휘청거리느라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심령이 자유로워야 하고 의존적이 아니고 어디도 끌리지 않고 영적 자유를 느끼고 사명이 확실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넘어서서 창조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혹 장난도 심하고 해도 우리는 그들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장난기를 보면서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가룟유다같은 못된 마음이 있는 것을 아시면 서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무지하고 몽매하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건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도 미련한 짓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랑하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 엄청난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재창조를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십니다. 오직 사랑 안에 구원이 있고 새로워지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결혼에 실패한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있어서 이 아들을 데리고 두 번째 결혼을 했지만 역시 원만하지 못하여 많이 구타를 당하고 많은 고생을 하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또 다시 이혼을 하게 되고, 세 번째 남자와 결혼을 했으나 역시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결혼을 할 때마다 제일 처음 얻은 이 아들이 마치 큰 혹과도 같이 아주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만 느껴졌습니다. 아들의 입장에서는 계속해서 의붓아버지를 두 번 세 번 바꾸어야 하는 그런 처지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존재로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하는 그런 고통을 느끼며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서운 부부싸움을 보면서 그렇게 살았고 그렇게 자라났습니다. 세 남자에게 배신당한 이 어머니는 아들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믿지 말아라. 사람을 사랑하지 말아라. 세상에 사랑은 없다.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 가짜다. 아무 것도 믿을 것이 못된다''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급기야 이 아이는 공격형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큰 사고를 쳐서 퇴학을 당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또 큰 사고를 내어 불명예 제대를 당했습니다. 어쩌다 결혼을 했지만 아내의 사랑을 받아줄 줄을 모르고 이해할 줄도 모르고 그는 항상 부부싸움을 격하게 하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나가는 직장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됩니다. 1963년 11월22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 그를 향하여 총을 쏘았습니다. 바로 이 때 제가 미국에 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사건을 거기서 듣고 볼 수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사람이 이 같은 엄청난 사건 엄청난 비극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의사인 제임스 밥슨이라고 하는 분은 이 사실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비극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 한 아들이 저지른 역사적인 비극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밥을 먹고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먹고삽니다. 우리는 알거나 모르거나 사랑을 받고 살고 사랑을 하면서 살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이유야 어떠하든지 아이들을 호되게 나무라든가 혹은 때려보신 일이 있습니까? 두고보십시오. 사흘 후에 그 아이는 감기에 걸립니다. 어쩌면 병원에 가게 됩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왜 꾸중을 듣고 매를 맞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스럽던 어머니의 눈, 그 사랑스럽던 아버지의 눈이 무섭게 변할 때에 이 아이들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병이 듭니다.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들과 부모님 사이에는 오직 사랑,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보고 사랑을 먹고 그리고 자라고 성장하고 건강한 것입니다. 이 줄이 끊어지면 못 삽니다. 사랑은 생명입니다. 세상의 비극이 있다면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배반하는 데에 비극이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지금 그 처지 그대로 놓고 받아들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을 느끼고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 사랑을 믿을 때에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사랑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 사랑을 성경 66권은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공부를 하는 중에 언젠가 칼바르트의 책에서 이 한 문장을 찾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두고 두고 외우고 있습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너무 너무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하신다고. 여러분, 사랑 받을만 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받을만 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받을만한 자가 못되는 것을 사랑해서 사랑 받을만한 자로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아는 자로 사랑을 믿는 자로 사랑을 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재창조하시는 것이 구원이요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그 엄청난 사랑을 그 사랑의 속성을 드라마틱하게 상징적으로 실제상황에서 계시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창조적 사랑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바로 실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듯이 그래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간적으로 끝까지요 능력적으로도 끝까지요 속성적으로도 끝까지요 인간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생각하건대 열두시간도 못되어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눈 앞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환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강파티처럼 마지막으로 유월절 만찬을 잡수십니다. 얼마나 비장합니까?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가시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제자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닙니까? 자신은 수난을 당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불안과 그 아픔을 다 초월하고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처지와 자기 기분에 매여서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버리기도 합니다.
제가 어떤 때에 꼭 찾아가야 될 환자가 있었는데 이렇게 저렇게 약속을 하고도 찾아가지 못하다가 언젠가 한 번 밤 10시가 넘어서 ''더 이래선 안되지, 아무래도 내가 저 분이 세상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가서 뵈어야겠다'' 병원을 찾아가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 주사바늘을 온 몸에 꽂고 코에다 산소호흡기를 하고 있었습니다만 찾아 들어갔더니 자기가 아픈 것과 자신이 지금 임종이 가까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바쁜 중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내일 아침 또 새벽기도 나가셔야 될텐데…" 걱정하시면서 어떻게 이 어려운 걸음을 하셨느냐고 자꾸 말씀을 하십니다. 아이고 그렇지 않다고, 나야 건강한 사람인데 가던지 오던지 상관이 있느냐고 "지금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렇게 위로를 해보아도 "아닙니다. 나는 어차피 이렇게 가는 길인데, 목사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오늘 이 시간에 이런 어려운 걸음을 해주셨습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며 저를 걱정해 주시더라고요. 저는 생각합니다. ''이분이 아주 심덕이 높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덕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가만히 병원에 가보면 자신이 좀 아프다고 해서, 자신이 아픈 것이 누구 때문에 아픈 것인가요? 좌우간 주변사람들을 다 못살게 구는 사람이 있잖아요.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의사가 되고 훌륭한 일을 많이 하다가 그래도 ''한국에 와서 이 의술을 가지고 한국 동포를 위해서 마지막 생을 보내리라'' 하고 한국에 돌아오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그 의사들이 하는 말입니다. 자, 병원에서 주사를 놓을 때나 혹은 실밥을 뽑을 때에 좀 따끔하게 아플 때가 있습니다. 의사가 미안해서 "조금 아픕니다"라고 말을 하고 시술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대개 미국사람의 경우에는 이렇게 묻는다고 합니다. "How are you feeling now? 어떻게 느끼십니까?"하고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준비된 대답이 있습니다. "That''s O.K. Thank you, 괜찮습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대답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주사를 놓다가 잘 안 들어가고 아프던가 하면은 딱 눈을 부릅뜨고 "너 가짜 의사 아니야?" 이런다고 합니다. 간호원 의사 할 것 없이 다 욕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도 듣지 않고. 그럴 때에 ''이것 참, 무슨 앓는 것이 벼슬인가.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구나. 내가 이런 사람 치료하려고 여기까지 왔나'' 아주 실망할 때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느껴보십시오. 내가 아픈 건 내가 아픈 것이지 왜 주변사람들까지 못살게 굴어요. 이 수준밖에 안 된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속상하고 답답한 일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래, 이젠 남에게 화를 내어도 되는 것입니까? 짜증을 낼 권리가 있는 것입니까? 나는 나대로 살던 죽던 나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나는 어떤 순간에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처지에 집착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만 생각하고 바쁘다 뭐다 하게되면 누굴 돌아보겠습니까? 내가 하는 일만 대단한 것처럼. 그 순간 사랑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을 수도 이해할 수도 할 줄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헬렌 니어링이라고 하는 분의 "조화로운 삶"이라는 책에서 조화로운 삶의 원칙을 아주 쉽게 풀어서 세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웬만하면 오전에는 전화를 받지 말 것, 그리고 기도하는 시간, 성경 읽는 시간 그리고 사색하는 명상의 시간을 갖도록 하라. 아무리 바빠도 좀 그러한 영적인 경건한 시간을 갖도록. 새벽부터 전화 걸고 전화 받고 이 야단하지 말고, 그건 조화롭지 못하다. 정말 그렇습니다. 저는 어떤 때에 보면 새벽기도 마치고 내려가서 잠깐 좀 기도하고 있는 그 시간에 "따르릉"하고 전화를 걸어서 별소리도 아닌 것 가지고 그러면 좀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경우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라.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고마운 사람. 그리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라. 자꾸 나쁜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생각을 사랑하는 방향으로 돌리십시오. 세 번째는 돈을 벌더라도 온종일 몽땅 돈버는 데에만 쏟지 마라. 사업을 해도 사업에 미치지 말아라. 성공도 실패도 별거 아니고 다 한 사업도 끝낸 사업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그래야 나도 생각할 수 있고 남을 생각할 수도 있고 남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뭐 대단한 일 하는 것처럼 죽느니 사느니, 거기에 목숨을 걸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목숨을 걸만한 일이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왜 죽기 살기로 그러십니까? 이제 여러분 아이들 대학 시험을 봅니다만 거기도 대충대충 해두십시오. 거기에 합격하면 살고 아니면 죽어라, 이거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아이들이 가출을 하지요. 거기에 목숨 걸 거 없습니다. 해 보고 되면 좋고 안되면 다른 길 찾자, 그러고 말지 거기에 전적으로 하니까 아이들이 끝나자마자 자살하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됩니까?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이 세상을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착하지만 이 엄청난 십자가를 앞에 놓고도 제자들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아시면서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현장에 있던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가룟유다가 자꾸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가룟유다가 배신을 합니다. 이 사람이 독사 눈을 하고 쳐다본다는 말입니다. 그 가룟유다와 예수님 사이에 눈이 마주칩니다. 이것을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하고 집착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가룟유다가 있는 열 두 제자를 함께 사랑하셨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가룟유다를 포함해서 열 두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이라고 하는 교부의 말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발을 씻길 때에 가룟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겼다는 말입니다. 가룟유다의 발을 씻기시며 제자를 사랑했습니다. 여러분, 그런 맘이 아니고는, 참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좀 더 실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자들의 마음속에도 가룟유다 비슷한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들이고,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도망갑니다. 이런 사건이 다 앞에 있습니다. 다 그러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설교학에 보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설교할 때에, 제가 이렇게 설교할 때 지금 보면 우리교회는 특별히 온 교인들이 다 이렇게 저를 쳐다봅니다. 전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다른 교회의 목사님들께서 오시고 깜짝 놀랍니다. 집중해서 쳐다보는 데 정신이 없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설교 잘하는 비결은 조는 사람을 보지 말아라. 졸기만 하나요, 입을 벌리고 천장을 보면서 아주 주무십니다. 그쪽으로 눈이 가기 시작하면 설교를 할 때에 목소리가 커집니다. 그러면 설교가 그 날 잘못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안 봐야 합니다. 그 쪽을 안 봐야 합니다. 설교를 잘 안 듣는 사람을 안보고 해야지 그 쪽으로 자꾸 시선이 가면 어느 사이에 목소리가 커지고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 세상 살면서 가능한 좋은 것만 많이 보십시오. 좋은 생각만 많이 하십시오. 긍정적으로 보십시오. 가룟유다가 분명히 앞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머지 제자들도 시기 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생각하게 되면 참 기가 막힙니다. 이 밖에서 들어올 때에는 더구나 이 잔치에 올 때에는 발을 씻어야 하는데 종이 없을 때에는 서로서로 씻기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시기 질투가 나서 네가 크냐? 내가 크냐? 내가 우편에 네가 좌편에, 이러고 있을 때니 저들이 생각하기를 ''네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기겠다.'' 서로 팽팽하니 맞섰습니다. 결국을 발을 못 씻고 예수님의 발도 씻어드리지 못하고 만찬을 먹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그 우락부락한 마음,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마음을 헤아리시고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떠다가 "내어놓아라" 그리고 씻기십니다. 베드로 차례에 갔을 때에 베드로의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성경에서 보면 "절대로 안됩니다" 그랬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영원히 안됩니다"라는 뜻입니다. 내 발은 영원히 씻기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넌 나와 상관이 없다." 또 생각을 돌려가지고 "얼굴서부터 다 씻겨 주세요" 라고 합니다. 좌우간 극성입니다. 이거 다 정말 뜻을 모르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바보 같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이러하든 저러하든 발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모르나 후에는 알리라. 내가 왜 발을 씻기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지금은 모른다, 모르는 대로 씻기십니다. 모른다고 책망하지 않아요. 모른다고 져버리지도 아니하십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발을 씻겨 주십니다. 그러면 그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이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사실입니다. 알아서 발을 씻기게 될 것이고 알아서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뒤에 알 것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은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현실을 이해하고 사랑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에게 위탁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얼마나 귀중합니까?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사랑하신 것입니다.
Carl R. Rogers 라고 하는 학자의 On Becoming a Person 이라고 하는 책에서 건강한 인격은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에 기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몇 가지 생각해 볼 만합니다. 먼저는 경험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으로 대하고 수용합니다. 일을 만날 때에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의미가 있으니까. 개방적으로 수용하고, 또 하나는 실존적 삶을 생각하면서 긍정적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속에 깊을 뜻이 있으니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십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아침을 향하여 갑니다. 확실한 미래가 있고 자신만만한 신념이 있기 때문에 제자들을 사랑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확실함이 없는 사람은 휘청거리느라고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심령이 자유로워야 하고 의존적이 아니고 어디도 끌리지 않고 영적 자유를 느끼고 사명이 확실할 때에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을 넘어서서 창조적인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우리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혹 장난도 심하고 해도 우리는 그들의 먼 미래를 바라보며 장난기를 보면서 과학자가 될 것이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 아이가 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우리는 미래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십니다. 내 마음속에 가룟유다같은 못된 마음이 있는 것을 아시면 서도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십니다. 이 무지하고 몽매하고 어리석고 바보같은 짓을 하고 있건만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창조적으로 사랑하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오늘도 미련한 짓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 사랑하십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 엄청난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재창조를 하십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십니다. 오직 사랑 안에 구원이 있고 새로워지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