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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순목사 (그리스도사랑의교회 목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말씀 자체가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혹자들은 사람과 사람의 대인관계 속에서 신앙의 행위를 가르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말씀은 오직 당신이 구원자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영생에 대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했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능력과 권능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임을 증거 하기 위한 역사를 했던 것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어떤 것이 성령이며 성령 받은 다음에 변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되고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내 자신의 구원은 예수를 향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때에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라고 하는 것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조명해서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고 내가 깨달은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러 다닐 때에 제자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묻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라는 제자가 얼른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명료하게 명확하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알게 해 주었으므로 네가 안 것이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할 것을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시옵소서! 주께는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간 할 때에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사람의 생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인간적 생각으로 그러한 말을 한다고 예수님 지적했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또 뿐만 아닙니다. 성령에 감화와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고 한 말씀을 들고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한 주가 그리스도인 것을 고백하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자기 신앙을 표현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죄에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우리는 시시 때때로 죄에 억눌림을 당할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해도 죄송스럽고 또 주님 말씀을 볼 때에 내 삶과 신앙이 전혀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가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란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냐? 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으로 베드로가 중생을 했느냐? 구원을 받았느냐? 거듭 났느냐?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할 것이요" 라고 말씀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적중하게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끌려갔습니다. 그 끌려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따라갔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떠한 재판을 받을까? 하고 예수님이 있는 장소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때가 약간 추웠을 때인 것 같습니다. 불을 피우고 불을 쬐고 있을 때 계집종이 나와서 베드로를 향하여 "너도 그 당이라. 내가 동산에 있는 것을 보았고 갈릴리에서 오지 아니했느냐?" 라고 분명하게 예수와 한 가지로 다닌 제자가 아니냐고 이렇게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라고 나는 모른다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했던 것을 봅니다. 누구 앞에서 누구를 부인했습니까? 분명히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님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중생은 고백을 통한 중생이 아니라 언제 중생 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알 때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샘플이 되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에 내 중심적으로 성경을 아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오직 성경은 말씀하신 그 분의 의도대로 우리가 알고 깨달을 때에 주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증거하고 믿을 때에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이 올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는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한다고 순교자적 차원의 고백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시인하고 믿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출회를 당하게 됩니다. 출회를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과 함께 마셔도 안 되고 물물 거래를 해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속에서 경리되어 버리는 자로 전락되기 때문에 유대 사회 속에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순교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 속에 말씀한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시인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으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내가 받았다고 해서 결코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누가 하십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권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중생을 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감화 감동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자가 없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도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 속에서 예수 믿는다고 할 때에 많은 핍박과 고통과 괴로움과 생활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 속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누가 시인하겠습니까? 이 말씀한 말씀의 그 상황과 배경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내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니까 내가 성령의 감동 받아서 시인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면 이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깨달아야 되는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서 산적하게 놓아져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내가 과연 중생이 되었느냐? 라고 하는 이러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목마르거든 내게와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의 비유로 성령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아직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한 다른 보혜사 성령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를 말이 많지만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허락한 성령, 진리의 영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말을 생각나고 기억나게 하리라." 라고 예수님은 성령에게 다 의탁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 삼일만에 부활하시어서 나타나 오백여 문도에게 보였습니다. 오백 명이라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을 주었습니다.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는 위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허락한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 부탁의 말씀을 들은 일백 이십 명의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할 때에 급기야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에 각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던 것을 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까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가치와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삼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듣고 보고 배웠던 것은 마음속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알았고 눈으로 볼뿐이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저희들이 받고 보니까 마음에 견딜 수 없어 예수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린 그 사회 속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길거리로 나가 외쳤습니다. 그들이 외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와 우리 허물을 인해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제 삼일만에 살아나 우리 오백여 문도에게 보였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지금 오시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그리스도의 부활 증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에는 16개국 사람들이 모여 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베드로의 설교와 사도들이 증거 하는 설교를 16개국 사람들이 다 자신들의 난 곳 언어로 들리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우리 난 곳 말로 들리는 것이 어찜이뇨? 이것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도다.'' 라고 사도들이 증거 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고백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봅니다.
바로 그것이 방언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외국어가 방언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혀로써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이렇게 이해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저들이 복음을 증거 한 것은 방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저들은 분명하게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로써 복음을 증거 했지만 각각 듣는 사람에게 자기의 난 곳 말로 들리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게집종의 물음에도 벌벌 떨었던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오직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생했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 났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중생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중생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므로 그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성령으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하면 마치 베드로가 삼년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신앙에 머물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듭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성령의 은혜로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고 거듭나기를 원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거듭난 사람의 삶과 거듭난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울이라는 청년은 철저한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인 메시아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을 때 도리어 자기 신앙의 사고체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인물인 것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감옥에 넣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때 바울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어떤 변화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믿고 있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을 자신이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는 중생한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거듭난 사람은 회개합니다.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내 잘못한 윤리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놓고 기도하고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회개는 내 믿음이 내 신앙생활이 내 중심적인 체계에서 그리스도 중심체계로 바꾸어지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회개했습니다. 회개는 오래 걸리는 것 아닙니다. 회개는 그 즉석에서 성령이 역사할 때만이 참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나아가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할 때에 자신의 신앙에 변화가 온 것을 간증하면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했던 것을 봅니다. 이 모든 사건과 이렇게 되는 것은 성령이 그 심령 속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만이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셔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목숨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사고체계로 이해하는 생명과 예수께서 오시어서 우리에게 영생을 말씀한 영원한 생명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자가 없다고 예수님은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거듭나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들이 삼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그때에 예수를 알고 있는 그 수준 가운데 있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그 제자들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있다면 구하십시다. 찾으십시다. 두드립시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을 찾고 두드려서 성령과 만남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십시다. 주님 우리에게 이 시간도 역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주종의 관계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삶은 자기라고 하는 중심체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중심체계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체계로 삶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있습니다. 남북전쟁을 할 때에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했습니까? 그 부관하나가 ''각하!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에 링컨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아니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다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된다.'' 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의 중심 체계가 내 중심적인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도바울의 고백을 봅니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할 때에 이미 죽었고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변화 받으십시다!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십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하시면서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서 많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말씀 자체가 우리를 향해서 무엇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혹자들은 사람과 사람의 대인관계 속에서 신앙의 행위를 가르친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말씀은 오직 당신이 구원자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영생에 대한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말씀했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능력과 권능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이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자임을 증거 하기 위한 역사를 했던 것을 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은 어떤 것이 성령이며 성령 받은 다음에 변화는 우리에게 어떻게 일어날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알아야 되고 깨달아야 될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내 자신의 구원은 예수를 향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고백할 때에 나는 구원받았다. 라고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라고 하는 것을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조명해서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고 내가 깨달은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러 다닐 때에 제자들을 향해서 이런 말을 묻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어떤 사람은 세례요한, 어떤 사람은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을 때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베드로라는 제자가 얼른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명료하게 명확하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고백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내 스스로 안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 알게 해 주었으므로 네가 안 것이라고 말씀하신 연후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할 것을 베드로에게 말씀했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시옵소서! 주께는 그런 일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간 할 때에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네가 사람의 생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인간적 생각으로 그러한 말을 한다고 예수님 지적했던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 대화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믿고 있는 구원의 서정에 대한 것을 올바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또 뿐만 아닙니다. 성령에 감화와 감동을 받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말씀하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고 한 말씀을 들고 우리는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또한 주가 그리스도인 것을 고백하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설명하고 자기 신앙을 표현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죄에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우리는 시시 때때로 죄에 억눌림을 당할 때가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 나와서 기도해도 죄송스럽고 또 주님 말씀을 볼 때에 내 삶과 신앙이 전혀 말씀과는 동떨어진 이러한 생각을 가질 때가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란 어떤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이냐? 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 고백으로 베드로가 중생을 했느냐? 구원을 받았느냐? 거듭 났느냐?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말씀하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할 것이요" 라고 말씀한 말씀이 베드로에게 적중하게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끌려갔습니다. 그 끌려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따라갔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어떠한 재판을 받을까? 하고 예수님이 있는 장소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때가 약간 추웠을 때인 것 같습니다. 불을 피우고 불을 쬐고 있을 때 계집종이 나와서 베드로를 향하여 "너도 그 당이라. 내가 동산에 있는 것을 보았고 갈릴리에서 오지 아니했느냐?" 라고 분명하게 예수와 한 가지로 다닌 제자가 아니냐고 이렇게 물었을 때에 베드로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아니라고 나는 모른다고 뿐만 아니라 저주까지 했던 것을 봅니다. 누구 앞에서 누구를 부인했습니까? 분명히 사람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주님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중생은 고백을 통한 중생이 아니라 언제 중생 했느냐? 라고 하는 것을 알 때에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샘플이 되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볼 때에 내 중심적으로 성경을 아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오직 성경은 말씀하신 그 분의 의도대로 우리가 알고 깨달을 때에 주의 말씀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에서 그리스도가 구원자임을 증거하고 믿을 때에 말할 수 없는 핍박과 고난과 어려움이 올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는 자는 나도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한다고 순교자적 차원의 고백을 말씀했던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시인하고 믿을 때에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출회를 당하게 됩니다. 출회를 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과 함께 마셔도 안 되고 물물 거래를 해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 속에서 경리되어 버리는 자로 전락되기 때문에 유대 사회 속에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인정하는 것은 순교와 같은 신앙인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역사적 배경 속에 말씀한 말씀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를 시인하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으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다고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여러분! 구원이란 내가 받았다고 해서 결코 받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누가 하십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권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중생을 해야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중생하지 않고는 결코 구원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감화 감동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자가 없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도 여러 가지 여건과 상황 속에서 예수 믿는다고 할 때에 많은 핍박과 고통과 괴로움과 생활의 위협까지 느끼는 상황 속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을 받지 않고는 예수를 누가 시인하겠습니까? 이 말씀한 말씀의 그 상황과 배경적인 것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내가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니까 내가 성령의 감동 받아서 시인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면 이것은 착각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깨달아야 되는 이러한 문제들이 우리 앞에서 산적하게 놓아져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서 내가 과연 거듭났는가? 내가 과연 중생이 되었느냐? 라고 하는 이러한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목마르거든 내게와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의 비유로 성령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아직 성령이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예수께서 말씀한 다른 보혜사 성령은 언제 어떻게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를 말이 많지만 너희가 감당하지 못한다. 아버지께서 허락한 성령, 진리의 영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말을 생각나고 기억나게 하리라." 라고 예수님은 성령에게 다 의탁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제 삼일만에 부활하시어서 나타나 오백여 문도에게 보였습니다. 오백 명이라는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에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소중한 말씀을 주었습니다. 볼 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 는 위대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승천 하셨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허락한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얻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 부탁의 말씀을 들은 일백 이십 명의 문도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할 때에 급기야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에 각 사람에게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던 것을 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보니까 그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가치와 소중한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삼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듣고 보고 배웠던 것은 마음속에서 아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알았고 눈으로 볼뿐이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을 저희들이 받고 보니까 마음에 견딜 수 없어 예수를 핍박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린 그 사회 속에서 그들은 예루살렘 길거리로 나가 외쳤습니다. 그들이 외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와 우리 허물을 인해서 십자가에 고난 당하시고 제 삼일만에 살아나 우리 오백여 문도에게 보였을 뿐 아니라 성령으로 지금 오시어서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다는 그리스도의 부활 증인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때에 예루살렘에는 16개국 사람들이 모여 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베드로의 설교와 사도들이 증거 하는 설교를 16개국 사람들이 다 자신들의 난 곳 언어로 들리는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은혜의 체험을 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우리 난 곳 말로 들리는 것이 어찜이뇨? 이것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도다.'' 라고 사도들이 증거 하는 복음의 말씀을 들은 그들은 고백한 것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봅니다.
바로 그것이 방언으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방언은 외국어가 방언입니다. 그런데도 대다수 사람들은 혀로써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을 방언이라고 이렇게 이해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오순절 날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저들이 복음을 증거 한 것은 방언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저들은 분명하게 저들이 사용하는 언어로써 복음을 증거 했지만 각각 듣는 사람에게 자기의 난 곳 말로 들리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을 봅니다. 여러분! 게집종의 물음에도 벌벌 떨었던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오직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은 중생했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 났기 때문에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중생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중생한 것이 아니라 오순절 날 마가 다락방에 성령이 임하므로 그 성령에 의해서 거듭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거듭나셨습니까? 성령으로 우리는 거듭나지 못하면 마치 베드로가 삼년 동안 주님을 따르면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그 신앙에 머물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거듭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고 말씀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나의 노력으로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듭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한 성령의 은혜로만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외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받고 거듭나기를 원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계십니다. 거듭난 사람의 삶과 거듭난 사람의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깨달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사울이라는 청년은 철저한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원자인 메시아의 가치와 의미를 알지 못했을 때 도리어 자기 신앙의 사고체계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 인물인 것입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끌고 감옥에 넣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이때 바울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어떤 변화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가치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알고 있고 자신이 믿고 있고 자신이 깨달았다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그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을 자신이 경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는 중생한 것입니다.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거듭난 사람은 회개합니다. 우리는 회개라고 하면 내 잘못한 윤리적인 문제, 도덕적인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놓고 기도하고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회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회개는 내 믿음이 내 신앙생활이 내 중심적인 체계에서 그리스도 중심체계로 바꾸어지는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인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회개했습니다. 회개는 오래 걸리는 것 아닙니다. 회개는 그 즉석에서 성령이 역사할 때만이 참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사울은 나아가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할 때에 자신의 신앙에 변화가 온 것을 간증하면서 예수가 구원자임을 증거 했던 것을 봅니다. 이 모든 사건과 이렇게 되는 것은 성령이 그 심령 속에 오셔서 역사하실 때만이 거듭남이 이루어지고 참된 회개가 이루어지고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듭나게 하셔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우리의 목숨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사고체계로 이해하는 생명과 예수께서 오시어서 우리에게 영생을 말씀한 영원한 생명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자가 없다고 예수님은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내가 거듭나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들이 삼년 동안 예수를 따라다니던 그때에 예수를 알고 있는 그 수준 가운데 있는가? 이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삼년 동안 따라다녔던 그 제자들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있다면 구하십시다. 찾으십시다. 두드립시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성령을 찾고 두드려서 성령과 만남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거듭나십시다. 주님 우리에게 이 시간도 역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주종의 관계가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삶은 자기라고 하는 중심체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중심체계의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체계로 삶이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있습니다. 남북전쟁을 할 때에 얼마나 치열한 전쟁을 했습니까? 그 부관하나가 ''각하!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에 링컨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면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아니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다니 우리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 된다.'' 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신앙의 중심 체계가 내 중심적인 체계가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꾸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생한 사도바울의 고백을 봅니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고난 당할 때에 이미 죽었고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했던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변화 받으십시다! 성령을 통해서 거듭나십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십시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마음에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하시면서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