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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봉목사 (와싱톤한인교회)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하여 “응, 나야!” 혹은 “예, 접니다!”라고 말했는데, 그쪽에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응답해, 무안해 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상대방이 내가 기대했던 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응답을 받은 경우에는 별로 무안할 것 없지만, 나를 즉시 알아볼 것이라고 기대한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무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는 말은 특별한 인간적인 관계에서나 쓸 수 있는 특별한 말입니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는 말은 또 다른 상황에서 의미 있게 쓰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심히 아팠던 경험을 했습니다. 심각한 질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누워 있으며 치료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때, 통증과 씨름하며 기진맥진하여 잠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다시금 통증 때문에 희미하게 정신이 들 때, 옆에서 제 손을 잡으시고 제 귀에 들려주시던 “얘야, 나다!”라는 어머님의 음성을 기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 익은 목소리,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은 그 목소리가 저를 향해 “얘야, 나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던져주는 위로와 평안의 무게는 제가 아는 척도로는 측량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다!”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참 좋습니다. 특히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이름 없이 “나야”라는 한 마디로 통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 그 말은 참 듣기 좋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와 걸음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제공해 줍니다.
“나다!”라는 말은 말하기에도 참 좋습니다. 내게,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혹은 손길 하나만으로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아마 이런 느낌 때문에 우리는 이름을 밝히기보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누구에겐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은 웬만한 믿음과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1.
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 오셔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본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건너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리들이 예수님을 제 2의 모세로, 메시야로 알아챘고, 그분을 억지로 왕으로 옹립하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산 속으로 몸을 감추십니다.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은 다시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반대쪽 가버나움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아직 산 속에 계십니다. 그분의 습관을 생각한다면, 그분은 필경 그곳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을 겁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보다 먼저 갈릴리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산 속에 두고 먼저 내려가 배를 탑니다.
얼마를 진행해 나갔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배가 풍랑에 휩싸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호수 남쪽으로 급격하게 내리 깎인 지형이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풍에 휩싸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 현상이 이날 밤에도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이 풍랑과 싸우며 노를 저었지만, 불과 3마일도 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풍랑과 씨름하느라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태풍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는 법인데, 몇 시간 동안 바람은 잠잘 줄을 모릅니다. 처음에는 제법 여유 만만했던 제자들은 “이러다가 여기서 죽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 오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에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그분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낮에 제 정신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해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고 두려움에 짓눌려 죽음을 두려워하던 상황에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예수님처럼 보였겠습니까? 반대로, 죽음의 사자가 음부의 문을 열고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줄로 알았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사자처럼 보이던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만일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해서 “나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이 말을 통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움만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님과 이미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라는 말 한 마디에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나다”라고 말하는 그분의 능력을 알기에 그들은 순식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셨다”는 것처럼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덧붙이시지만, 실은 “나다”라는 말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2.
이렇게 보니, 이 말이 얼마나 좋게 들리는지요! “나다!”
여러분에게는 “나야!” 혹은 “저예요!”라고 말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뒤집어 말하자면,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말을 건넬 대상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아니, 여러분이 그렇게 말을 건넸을 때, 그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나누는 관계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성숙시켜 왔다면, 우리에게는 “나다”라고 말을 걸어 올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 말 한 마디에 깊은 위로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관계를 심화시켜 왔다면, “나야”라는 말로써 찾아가 용기를 북돋아줄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관계를 소홀히 해 왔다면, 그럴 수 있는 대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업적’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성취’라고 생각하는지요! 그래서 더 많은 업적, 더 큰 성취를 위해 관계를 희생시키는지요! 관계는 얼마든지 나중에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나중’이라는 때는 영영 오지 않습니다. 아니, 온다 해도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내게 “나야!”라는 말로 다가올 사람도, 내가 눈을 돌려 “나야!”라는 말로 위로해 줄 사람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성패는 누구와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줄을 잘 대어 출세하라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관계를 우선하고 중시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성취를 하고 아무리 성공을 해도 무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회자들과 삶을 나누는 시간에 영어 교회(Vision of Peace)교회의 Gordon Marchant 목사님, 우리 마고단 목사님으로부터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맨 처음 중국인 교회에서 중국인 2세를 위한 목회를 시작했을 때, 중국인 1세 교인 중 한 사람이 떠듬거리는 영어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 놓더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는데, 이제 아이들이 크고 나니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그 고민을 듣고 마목사님은 이민자 1세와 2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 교회에 가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몇 년째 이민자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고 계신데, 그 논문의 주제가 바로 이민자 1세와 2세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저희 교회에 오신 것도 바로 이런 소명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목사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목사님이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이제 4주째 접어듭니다. 그분이 이곳에 와서 한인 2세 여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도 역시 부모님과의 관계 단절을 고민 속에서 털어 놓더라고 합니다. 그 여자 분은, 비록 언어가 큰 장애물이기는 하지만, 성장하는 내내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와의 관계랍니다. 아버지와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별로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자신이 자라나는 동안 아버지가 너무나도 일로 바빴기 때문에, 부녀 사이에 만들어져야 할 관계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결과, 피상적인 의사소통 외에는 남남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군가?”하고 추적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 상황에서 제 딸이 아파 누웠을 때, 아버지인 제가 병상에서 딸의 손을 잡고 “얘야, 나다!”라고 했을 때, 그 딸이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혹은 그 딸이 어두운 질곡을 헤쳐가고 있을 때, “나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무슨 힘을 가질까요? 혹은 아버지인 제가 노쇠하여 마지막을 맞았을 때, 의식과 무의식을 오고 가는 상황에서, 제 딸이 제 손을 잡고 “아빠, 저예요!”했을 때, 저는 과연 그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참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하시겠습니까? 이것보다 여러분이 지금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저희에게 많은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우가 있고, 동료가 있고, 이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왜 저희에게 붙여주셨습니까?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성공하라고 그러신 것입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사랑하여 깊은 관계에 이르라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뗄 수 없는 하나이듯, 우리도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이 사랑에의 부름이 저희의 가장 중요한 부름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양질의 관계를 위해 구조 조정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나야, 여보!” 한 마디로 충분한 그런 관계에 이르도록 사귐을 심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에게 혹은 부모에게 혹은 형제와 자매에게 “나다” 혹은 “저예요”라는 한 마디로 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 교회의 식구로 부름을 받았다면, “나야!”라는 한 마디로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참된 영적 교제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함석헌 선생이 남긴 유명한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생각이 납니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관계를 가진 분이 계십니까?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사람, 혹은 내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에, 우리 교회에 있습니까?
저도 이 질문 앞에서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은혜를 허락하셔서, 제 아내에게, 제 자녀들에게, 제 부모님에게, 제 형제들에게, 제 친구들에게, 제 교우들에게, 제 제자들에게,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야”라는 한 마디로 통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저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성숙되고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제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업적과 성취에 붙들려 관계를 잃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 하신 ‘사랑의 계명’이 바로 이 관계에 있음을 깨닫고, 진정으로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
그런데 여러분, 그 모든 사람들에 앞서 혹은 그 모든 사람들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저희에게 “나다”라고 말해 줄 분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떠나고 결국 하늘과 땅에 나 혼자 남았을 때, 그 때에도 여전히 “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부르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청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느냐?”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시고는 “나는 나다”라고 답하십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고 번역되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참으로 번역하기에 까다로운 말입니다.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번역합니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채택한 “나는 나다”라는 번역도 꽤 좋은 번역입니다. 헬라 사람들도 히브리 성경을 번역할 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헬라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에고 에이미’ 즉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어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르면, 이미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친구처럼 자신들을 아끼시던 사람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을 것입니다. “나다!”라는 말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의 곤경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 아픔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분이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다!”라는 한 마디로 충분할 정도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억지 쓰고 있어서 그렇지, 돌아서고 보면, 처음부터 우리가 알았던 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진정한 하나님 체험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대면하는 순간,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았던 분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만나는 순간 “아버지”라고 혹은 “주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혹은 의식적으로는 모른다고 부정해 왔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분이 여러분에게 계십니다. 돌아만 보면,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마음 문을 열고 그분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분이 손을 내밀어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내게 손을 내밀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오늘 본문 마지막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배 안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자, 21절 마지막에 보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헤치며 밤 새 도록 저어간 거리가, 19절에 보면, 십 여 리 정도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25에서 30 스타디아쯤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 치수로 약 2-3마일 정도 됩니다. 갈릴리 호수의 동서 넓이가 가장 넓은 곳으로 따져 7마일 정도 되었으니, 밤새도록 노를 저었지만 호수의 반도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 안에 들어오시자 배는 신기하게도 ‘곧’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에 들어오시자 풍랑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주변 상황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달라진 것은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로와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들이 탔던 배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고통에 시달려 신음하며 “어떻게 이 밤을 지새울까?”하고 걱정했을 때, “나다!”하시며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아 주시고 제 곁에 머물러 주셨을 때, 저는 그 밤을 아주 쉽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나다”하면서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록 주변의 상황은 변함이 없지만,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과 힘을 얻음으로 우리는 곧 우리가 가려던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이런 분을 여러분은 가지셨습니까? 그렇습니까? 감사하십시다. 며칠 전에도 저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 어떤 성도로부터, “이런 상황에 의지할 분이 계시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곁에 계시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모시고 사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뱉는 “주여!”라는 말 그리고 여러분이 영적으로 듣는 “나다!”라는 말의 무게는 여러분이 그분과 나누고 있는 관계의 질에 의해 달라집니다. 예배로, 기도로, 묵상으로, 침묵으로, 산책으로, 봉사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 이 분을 아직 못 만나신 분들이 계십니까? 실은 아직 못 만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지어질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분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누구에겐가 속아서, 그분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믿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인지를! 인생은 결국 혼자인데, 늘 내 곁에 계시어 “나다!”하고 손잡아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듯,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여시고 그분을 여러분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분명, 그분 없이 살아온 그 동안의 생을 무척 아쉽게 느끼실 것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앞으로의 생애에 대해, 영국 출신의 어느 팝 가수의 말대로,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다!” 참 좋은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된 의미에서 “나다!”라고 말할 자격을 가지신 그분, 우리 주님을 여러분의 삶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의 인생의 항해가 방향이 서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저희 마음의 귀에
“나다!”라고 말씀해 주소서.
그 아름다운 음성을 들려주소서.
주님을 저희 인생의 배에 모셔 들여
이 거친 바다를 지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고쳐 주소서.
저희 눈과 귀와 생각과 삶의 방식을 고쳐 주소서.
저희가 소홀히 해 왔던,
저희가 손상시켜 왔던
모든 관계들을 고쳐 주소서.
저희에게 “나야”하고 손 내밀 사람,
저희가 “나야”하고 손을 내어 줄 사람
많아지게 하소서.
저희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저희 인생을 사랑의 인생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영원한 당신,
당신의 영원한 너,
이 사랑의 관계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여러분은 혹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하여 “응, 나야!” 혹은 “예, 접니다!”라고 말했는데, 그쪽에서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누구세요?”라고 응답해, 무안해 했던 경험이 있으십니까? 상대방이 내가 기대했던 그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 응답을 받은 경우에는 별로 무안할 것 없지만, 나를 즉시 알아볼 것이라고 기대한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무안하기도 하고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는 말은 특별한 인간적인 관계에서나 쓸 수 있는 특별한 말입니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는 말은 또 다른 상황에서 의미 있게 쓰입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처음으로 심히 아팠던 경험을 했습니다. 심각한 질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며칠 동안 누워 있으며 치료해야 할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 때, 통증과 씨름하며 기진맥진하여 잠에 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다시금 통증 때문에 희미하게 정신이 들 때, 옆에서 제 손을 잡으시고 제 귀에 들려주시던 “얘야, 나다!”라는 어머님의 음성을 기어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낮 익은 목소리, 세상에 태어나 처음 들은 그 목소리가 저를 향해 “얘야, 나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던져주는 위로와 평안의 무게는 제가 아는 척도로는 측량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다!”라는 말처럼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이 말은 듣기에 참 좋습니다. 특히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을 때, 이름 없이 “나야”라는 한 마디로 통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말을 걸어올 때, 그 말은 참 듣기 좋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와 걸음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의 아픔을 함께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와 평안을 제공해 줍니다.
“나다!”라는 말은 말하기에도 참 좋습니다. 내게,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도 혹은 손길 하나만으로도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요! 아마 이런 느낌 때문에 우리는 이름을 밝히기보다 “나야” 혹은 “접니다”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누구에겐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것은 웬만한 믿음과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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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보니,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 오셔서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본 것처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동편으로 건너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 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을 먹이십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무리들이 예수님을 제 2의 모세로, 메시야로 알아챘고, 그분을 억지로 왕으로 옹립하려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산 속으로 몸을 감추십니다.
날이 저물어가자, 제자들은 다시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반대쪽 가버나움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은 아직 산 속에 계십니다. 그분의 습관을 생각한다면, 그분은 필경 그곳에서 홀로 기도하고 계셨을 겁니다. 제자들은 아마도 예수님보다 먼저 갈릴리로 돌아가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하겠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산 속에 두고 먼저 내려가 배를 탑니다.
얼마를 진행해 나갔는데,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배가 풍랑에 휩싸입니다. 갈릴리 호수는 북쪽에 높은 산이 있고 호수 남쪽으로 급격하게 내리 깎인 지형이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풍에 휩싸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 현상이 이날 밤에도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은 밤새도록 이 풍랑과 싸우며 노를 저었지만, 불과 3마일도 가지 못하고 제 자리에서 맴돌았습니다. 몇 시간 동안 풍랑과 씨름하느라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갑자기 일어난 태풍은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는 법인데, 몇 시간 동안 바람은 잠잘 줄을 모릅니다. 처음에는 제법 여유 만만했던 제자들은 “이러다가 여기서 죽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압도됩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그들에게 다가 오십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두려움에 질린 제자들에게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그분이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낮에 제 정신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해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밤중에 이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것도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있고 두려움에 짓눌려 죽음을 두려워하던 상황에서 그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예수님처럼 보였겠습니까? 반대로, 죽음의 사자가 음부의 문을 열고 자기들을 잡으러 오는 줄로 알았겠지요. 그런데 죽음의 사자처럼 보이던 그 사람이 말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만일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과의 관계가 충분히 무르익지 못해서 “나다”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들은 이 말을 통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두려움만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대부분은 예수님과 이미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다”라는 말 한 마디에 그들은 그분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나다”라고 말하는 그분의 능력을 알기에 그들은 순식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능력의 주님께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셨다”는 것처럼 큰 위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덧붙이시지만, 실은 “나다”라는 말로 충분했을 것입니다.
2.
이렇게 보니, 이 말이 얼마나 좋게 들리는지요! “나다!”
여러분에게는 “나야!” 혹은 “저예요!”라고 말해줄 사람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뒤집어 말하자면, 여러분에게는 그렇게 말을 건넬 대상이 얼마나 있으신가요? 아니, 여러분이 그렇게 말을 건넸을 때, 그 말이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 모든 것은 우리가 나누는 관계의 질에 달려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성숙시켜 왔다면, 우리에게는 “나다”라고 말을 걸어 올 사람이 많을 것이고, 그 말 한 마디에 깊은 위로와 힘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관계를 심화시켜 왔다면, “나야”라는 말로써 찾아가 용기를 북돋아줄만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관계를 소홀히 해 왔다면, 그럴 수 있는 대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업적’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성취’라고 생각하는지요! 그래서 더 많은 업적, 더 큰 성취를 위해 관계를 희생시키는지요! 관계는 얼마든지 나중에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나중’이라는 때는 영영 오지 않습니다. 아니, 온다 해도 그 때는 너무 늦습니다. 돌아보면, 아무도 내게 “나야!”라는 말로 다가올 사람도, 내가 눈을 돌려 “나야!”라는 말로 위로해 줄 사람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의 성패는 누구와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줄을 잘 대어 출세하라는 뜻으로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관계를 우선하고 중시하지 않으면 아무리 많은 성취를 하고 아무리 성공을 해도 무익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 목회자들과 삶을 나누는 시간에 영어 교회(Vision of Peace)교회의 Gordon Marchant 목사님, 우리 마고단 목사님으로부터 아주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맨 처음 중국인 교회에서 중국인 2세를 위한 목회를 시작했을 때, 중국인 1세 교인 중 한 사람이 떠듬거리는 영어로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고민을 털어 놓더라는 겁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는데, 이제 아이들이 크고 나니 전혀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를 어쩌면 좋으냐?” 그 고민을 듣고 마목사님은 이민자 1세와 2세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 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인 교회에 가도 얼마든지 잘 할 수 있는 자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몇 년째 이민자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지금 목회학 박사 과정을 하고 계신데, 그 논문의 주제가 바로 이민자 1세와 2세 사이의 관계의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저희 교회에 오신 것도 바로 이런 소명감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목사님을 저희에게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마목사님이 이곳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이제 4주째 접어듭니다. 그분이 이곳에 와서 한인 2세 여자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도 역시 부모님과의 관계 단절을 고민 속에서 털어 놓더라고 합니다. 그 여자 분은, 비록 언어가 큰 장애물이기는 하지만, 성장하는 내내 어머니와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아버지와의 관계랍니다. 아버지와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데 별로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자신이 자라나는 동안 아버지가 너무나도 일로 바빴기 때문에, 부녀 사이에 만들어져야 할 관계가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 결과, 피상적인 의사소통 외에는 남남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누군가?”하고 추적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 아닙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 상황에서 제 딸이 아파 누웠을 때, 아버지인 제가 병상에서 딸의 손을 잡고 “얘야, 나다!”라고 했을 때, 그 딸이 어떤 느낌을 받을까요? 혹은 그 딸이 어두운 질곡을 헤쳐가고 있을 때, “나다. 내가 여기 있다”고 말한다면, 그 말이 무슨 힘을 가질까요? 혹은 아버지인 제가 노쇠하여 마지막을 맞았을 때, 의식과 무의식을 오고 가는 상황에서, 제 딸이 제 손을 잡고 “아빠, 저예요!”했을 때, 저는 과연 그 딸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참된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중요하지 않다고 외면하시겠습니까? 이것보다 여러분이 지금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더 중요하다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저희에게 많은 사람들을 붙여 주셨습니다.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교우가 있고, 동료가 있고, 이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을 왜 저희에게 붙여주셨습니까? 그 사람들을 이용하여 성공하라고 그러신 것입니까?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사랑하여 깊은 관계에 이르라고, 예수님과 하나님이 뗄 수 없는 하나이듯, 우리도 그렇게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하신 것 아닙니까? 이 사랑에의 부름이 저희의 가장 중요한 부름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 양질의 관계를 위해 구조 조정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나야, 여보!” 한 마디로 충분한 그런 관계에 이르도록 사귐을 심화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에게 혹은 부모에게 혹은 형제와 자매에게 “나다” 혹은 “저예요”라는 한 마디로 통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 교회의 식구로 부름을 받았다면, “나야!”라는 한 마디로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참된 영적 교제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함석헌 선생이 남긴 유명한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가 생각이 납니다.
만리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만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두거라” 일러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사람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그런 관계를 가진 분이 계십니까?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그런 사람, 혹은 내가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을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우리 가정에, 우리 이웃에, 우리 교회에 있습니까?
저도 이 질문 앞에서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은혜를 허락하셔서, 제 아내에게, 제 자녀들에게, 제 부모님에게, 제 형제들에게, 제 친구들에게, 제 교우들에게, 제 제자들에게, 저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야”라는 한 마디로 통하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니, 저의 인간관계가 그렇게 성숙되고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제 삶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업적과 성취에 붙들려 관계를 잃는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지켜 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이라 하신 ‘사랑의 계명’이 바로 이 관계에 있음을 깨닫고, 진정으로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4.
그런데 여러분, 그 모든 사람들에 앞서 혹은 그 모든 사람들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저희에게 “나다”라고 말해 줄 분이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모두가 떠나고 결국 하늘과 땅에 나 혼자 남았을 때, 그 때에도 여전히 “접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 우리에게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통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바로 그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집트에서 노예 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고 부르셨을 때, 모세가 하나님께 청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하나님이 너를 보내셨느냐?”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 하나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말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말씀하지 않으시고는 “나는 나다”라고 답하십니다. 개역성경에는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니라”고 번역되었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참으로 번역하기에 까다로운 말입니다. 학자들마다 여러 가지로 번역합니다만, 표준새번역에서 채택한 “나는 나다”라는 번역도 꽤 좋은 번역입니다. 헬라 사람들도 히브리 성경을 번역할 때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헬라말을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 ‘에고 에이미’ 즉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어투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르면, 이미 “나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처럼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말아라”고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은 친구처럼 자신들을 아끼시던 사람 예수의 음성을 들었을 뿐 아니라, 그분을 통해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을 것입니다. “나다!”라는 말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의 곤경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 아픔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분이 제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시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분은 우리와 너무 가깝기 때문에 처음부터 “나다!”라는 한 마디로 충분할 정도라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가 그분을 모른다고 억지 쓰고 있어서 그렇지, 돌아서고 보면, 처음부터 우리가 알았던 분임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진정한 하나님 체험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전혀 몰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대면하는 순간, 이미 오래 전부터 알았던 분처럼 느낀다는 것입니다.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만나는 순간 “아버지”라고 혹은 “주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혹은 의식적으로는 모른다고 부정해 왔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런 분이 여러분에게 계십니다. 돌아만 보면, 눈을 뜨고 보기만 하면, 마음 문을 열고 그분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분이 손을 내밀어 “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있더라도 내게 손을 내밀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 우리는 그 즉시로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안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오늘 본문 마지막에 흥미로운 대목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배 안으로 모셔 들였습니다. 그러자, 21절 마지막에 보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풍랑을 헤치며 밤 새 도록 저어간 거리가, 19절에 보면, 십 여 리 정도라고 했습니다. 원문에 보면 25에서 30 스타디아쯤 된다고 하는데, 이것은 오늘 치수로 약 2-3마일 정도 됩니다. 갈릴리 호수의 동서 넓이가 가장 넓은 곳으로 따져 7마일 정도 되었으니, 밤새도록 노를 저었지만 호수의 반도 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 안에 들어오시자 배는 신기하게도 ‘곧’ 목적지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배에 들어오시자 풍랑이 가라앉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주변 상황에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달라진 것은 제자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위로와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해졌을 때, 그들이 탔던 배는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목적지에 닿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고통에 시달려 신음하며 “어떻게 이 밤을 지새울까?”하고 걱정했을 때, “나다!”하시며 어머니께서 제 손을 잡아 주시고 제 곁에 머물러 주셨을 때, 저는 그 밤을 아주 쉽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겠나 싶습니다. “나다”하면서 다가오시는 주님의 손을 잡았을 때, 비록 주변의 상황은 변함이 없지만,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강과 힘을 얻음으로 우리는 곧 우리가 가려던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분, 이런 분을 여러분은 가지셨습니까? 그렇습니까? 감사하십시다. 며칠 전에도 저는 고통을 당하고 계신 어떤 성도로부터, “이런 상황에 의지할 분이 계시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라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언제나 곁에 계시어 “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을 모시고 사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복된 일입니다. 여러분, 거기서 멈추지 마시고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더 깊은 사귐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뱉는 “주여!”라는 말 그리고 여러분이 영적으로 듣는 “나다!”라는 말의 무게는 여러분이 그분과 나누고 있는 관계의 질에 의해 달라집니다. 예배로, 기도로, 묵상으로, 침묵으로, 산책으로, 봉사로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 중 이 분을 아직 못 만나신 분들이 계십니까? 실은 아직 못 만난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 지어질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분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누구에겐가 속아서, 그분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더 이로울 것이라고 믿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인지를! 인생은 결국 혼자인데, 늘 내 곁에 계시어 “나다!”하고 손잡아 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말씀하시듯, 그분이 여러분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문을 여시고 그분을 여러분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분명, 그분 없이 살아온 그 동안의 생을 무척 아쉽게 느끼실 것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앞으로의 생애에 대해, 영국 출신의 어느 팝 가수의 말대로,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 한 일이었다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나다!” 참 좋은 말입니다.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참된 의미에서 “나다!”라고 말할 자격을 가지신 그분, 우리 주님을 여러분의 삶에 모셔 들이시기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의 인생의 항해가 방향이 서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저희 마음의 귀에
“나다!”라고 말씀해 주소서.
그 아름다운 음성을 들려주소서.
주님을 저희 인생의 배에 모셔 들여
이 거친 바다를 지나게 하소서.
주님,
저희를 고쳐 주소서.
저희 눈과 귀와 생각과 삶의 방식을 고쳐 주소서.
저희가 소홀히 해 왔던,
저희가 손상시켜 왔던
모든 관계들을 고쳐 주소서.
저희에게 “나야”하고 손 내밀 사람,
저희가 “나야”하고 손을 내어 줄 사람
많아지게 하소서.
저희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저희 인생을 사랑의 인생이 되게 하소서.
저희의 영원한 당신,
당신의 영원한 너,
이 사랑의 관계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