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태복음5:1-6)

글을 쓰는 한 젊은 작가가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의 능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까?”
마크 트웨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도 딱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소. 글을 쓰기 시작한지 대략15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저술 능력이 형편없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지.”
“그러셨어요? 그럼 그 때 어떻게 하셨나요? 글쓰기를 포기하셨나요?”
그러자 마크 트웨인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난 그 때 이미 유명해져 있었는데····”

이 이야기를 우리의 믿음생활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처음 구원받은 감격,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사했습니다. 이 상태로 계속살 수 있다면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마음이 냉랭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화인 맞은 듯, 영혼은 메마르고 있습니다. 교회의 예배도 감격보다는 의무로 참석하곤 합니다. 내 신앙을 유지하는 것도 벅찬데 남에게 전도를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단 한 번의 영적인 변화의 체험으로 영원에까지 이를 수는 없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은혜에 목마른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고 선포하며 시작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기도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세례 받은 후에 광야로 가서 40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신 것을 시작으로 하여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셨고, 저녁이면 습관적으로 겟세마네로 들어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또 사역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 바쁜 일정가운데도 수시로 기도하시는 일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일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로 기도하시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남기신 일곱 말씀 중에 세 말씀이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생활은 예수님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사셨는지를 알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런 기도가 있었기에 현실에서 굴복하지 않고, 늘 풍성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으며 마침내 그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라고 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쓰고 있는 헬라어 δικαιοσ?νη ‘의(義)는 단어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올바름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말합니다. 언약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신실한 구원의 행위입니다.

1.이 하나님의 구원을 목말라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출애굽의 사건을 기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시대에 이집트로 이주했다가 430년 만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해방이 필요했습니다. 이집트의 왕 바로가 이스라엘사람들을 노예로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을 이집트 땅에 내리셨는데, 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이 유월절 사건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인방과 설주에 바르게 하였습니다. 그 날 밤 이집트전역에 죽음의 사자가 집집마다 휩쓸어 갔습니다. 장자와 처음난 모든 짐승들이 다 죽을 때, 양의 피가 있는 집은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고 해서 유월절입니다. 다른 것이  아닌 어린 양의 피가 구원의 증거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야’ 라고 사람들에게 소개한 세례요한은 바로 이 사건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죄와 허물로 죽은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는 예수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로마서4:25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요한복음3:16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의가 됩니다.
에베소서2:8,9,10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는 그의 만드신 바라.”

우리 구원의 감격이 시작된 것이 바로 여기서부터 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감당할 수 없는 죄책감, 그 무거운 죄의 짐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우리에게, 주님은 그 어떤 의로운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엄청난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습니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순간,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지은 모든 죄의 대가를 완벽하게 청산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6:4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 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십자가의 속죄의 죽음과 함께 죽고, 그의 의로우심의 부활과 함께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 사실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서 그 구원받음의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고 있다 함은 이 원초적인 사건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십자가를 다시 붙드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그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그 구원의 사건에 근거해 있습니다. 변화되어진 의로운 내 삶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구원의 희망이 조금도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흉악한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는 말은 그냥 포장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면 실로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의 희망은 오직 죄인인 나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다시 그 감격이 살아나게 됩니다.  
찬송가465입니다.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후렴)>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 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기약이 이르도록 언제나 주 만 바라봅니다.”

“맘속에 눈물을 흘릴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 때도 같이 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요한계시록2:1이하에 주님께서 에베소교회에 안타깝게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교회들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으뜸이 되는 교회였습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의 많은 좋은 점들을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사랑의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소망으로 인내하였습니다.
세상과 더불어 타협하지 않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면 교회를 어지럽히려는 자들을 척결하였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오는 핍박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최상의 교회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교회에는 교회의 문을 닫아야할 정도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 처음 행위를 버렸습니다.”
주님은 어디에서 어쩌다가 잃었는지를 알아서 회개하라고 하시면서, 만약에 돌이켜 회개하지 아니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셨습니다. 교회 문을 닫겠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 처음 행위입니다.  
건강 잃으면 다 잃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신앙인에게서 이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잃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것을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의 간절함이 진실한 믿음의 삶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주님은 지금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갈급한 마음으로, 구원의 감격을 이루어주신 그 십자가의 의와 그 은혜를 사모하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배부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다 된 것입니까?
믿음의 삶에 따른 변화가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예수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신학적으로 ‘칭의’의 문제입니다. ‘이신득의’라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믿음 이후의 삶이 문제가 됩니다.
변화 받은 삶, 곧 ‘성화’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6:1의 고민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생활에 처음 감격과 기쁨이 사라지고, 마음이 냉랭해지는 데는 바로 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새 사람이 되었으면 내 삶에 변화가 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믿음생활을 시작한지 3년이 되어도, 5년이 되어도 아니 몇 십 년이 되었어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는데 믿음에 대한 회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입니다.

2.삶의 의를 목말라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의에서 끝나지 아니하고,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실제적인 삶의 변화로 이루는 의를 목마름으로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드라큐라’ 라고 하는 영화를 본적이 있습니다. 사단을 상징하는 ‘드라큐라’에게 물리게 되면 같이 또 하나의 ‘드라큐라’가 되어 사망의 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큐라’가 무서워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마늘과 십자가와 빛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힘을 잃고, 빛 앞에서는 그 존재자체가 무너져버립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는 사단은 늘 우리 주변의 어둠 속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드라큐라’와 같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 놈 에게 잡히면 그 놈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전혀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붙들고 있는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빛 되신 주님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로마서6:10-14을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한 번만 죽으신 것이요, 그가 지금 살아계시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여러분 스스로가 죄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의 몸이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놀라운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자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
내 스스로가 내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죄는 우리를 충동질 합니다. 그 때마다 깨어있는 그리스도인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것에 대하여는 나는 죽었다고 선언해야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나를 그렇게 선언하고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몸을 정욕에 굴복시키는 일이 없어야합니다.
죽었다면 죽은 줄로 알아!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대하여는 산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의에 대하여 살아난 사람이다.’ 선언하고 적극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의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의를 사모하되 간절히 찾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1)나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선언하십시오. 사단과 죄가 내 주인이 아닙니다. 사단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사실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게 행동함으로서 사단의 종이 되었음을 교훈삼아 언제어디서든지 고백하십시오.
“예수는 나의 주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자원으로 삼으십시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선언하십시오. 당장 배부르고 만족한 삶의 길을 선택하지 말고 주님이 하신 진리의 말씀으로 사십시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119:105)  
“말씀이 우리를 죄로부터 분리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말씀으로부터 분리합니다.”
그 말씀에서 벗어나 좌왕우왕하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기준을 잡아 곧게 서십시오.  
무엇보다 삶의 주인을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오뚜기를 아십니까? 중심에 무거운 납이 들어있기 때문에 아무리 내 던져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지는 듯 하다가도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스도인은 거친 세상 풍파 속에서도 달콤한 유혹 앞에서도 절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3)쉬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며 주님의 다스리심을 사모하십시오. 주님의 도우심을 기대하십시오. 기도는 독백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드리는 우리의 믿음의 기도는 하늘보좌를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 말이 유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기도시간이 길기 때문도 물론 아닙니다. 예수 이름으로 드리는 믿음 때문입니다.
4)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십시오.
성령은 우리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그리스도인 당신에게 성령님은 항상 함께 하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아니 “성령님은 나와 함께하십니다.” 라고 선언하십시오.

기독교리더십의 탁월한 지도자, ‘존 맥스웰’은 “관계의 기술” 이라는 책에서 기독교지도자들이 끝까지 자신을 바르게 세워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경고의 벨”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날마다 일마다 때마다 다음과 물어야 할 10가지 질문 가운데 2가지는 이렇습니다.  
1.나는 지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가? 요셉처럼 날마다 하나님을 내 삶 속에서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2.나는 우선순위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가? 많은 기독교지도자들이 “성공을 하고 난 후에 그 성공의 비극적인 대가로 부부생활의 붕괴와 건강의 상실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까닭은 성공으로 가는 도중 우선순위가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첫째 하나님, 둘째 가족, 셋째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고, 가족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지킬 때에,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사역을 수행하는데 온전히 충성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6:33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
주님의 의를 부지런히 구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더하여 주십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실현할 지혜를 구하였더니 그가 구하지 아니한 재물도, 영광도 함께 주셨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배부를 것입니다.”

출처/최이우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