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의 소원  (요 20:19-23)

오직 예수!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주님은 2000년 전 부활일 새벽 미명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살아나셨습니다. 무덤이 주님을 가두어 둘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기록하면서, 과장하지 않고 매우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확고한 어조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적 중의 기적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들의 십자가 죽음과 무덤 속에 장사된 이후에 따라오는 당연한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셔야 했고, 또 주님의 부활을 막을 수 있는 힘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반 뷰렌?이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고 말한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찌른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가 사랑과 윤리, 정직과 정의를 실현하는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불교나 유교나 회교에서도 주장하는 덕목입니다.

  다른 종교에서 알지도 못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우리 기독교에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이 있음으로 기독교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벧전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거듭남,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소망은 불가분리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 주님은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능력입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모임에 첫 번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당함을 목격하고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무런 의욕도, 계획도 없이 그저 한군데 모여 문들을 꼭꼭 걸어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오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의 관심은 그날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보여주신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가지신 소원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본문에는 부활의 영광을 가지신 주님께서 아직 육신적으로 연약한 제자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1. 제자들이 부활 신앙으로 무장하기를 원하심
  주님은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19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방에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로 하여금 이 사실을 확실히 믿게 하기 위함입니다.

  20절,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당시 제자들의 마음 상태는 예수께서 사망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여인들의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막 16:10-11,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의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고하매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2-13, “그 후에 저희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저희에게 나타나시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심지어 주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저들 앞에 직접 나타나셨을 때에도 믿지 못했습니다.
  눅 24:36-37,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어찌보면 제자들의 의심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그만큼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해(害) 받으시기 전에’ 거듭 말씀하신 부활의 예언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친히 나타나셨고, 저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고,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친히 행동하셨습니다.
  눅 24:38-39,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눅 24:41-43,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은 현대인이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제자 중 도마는 믿지 못한 자의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첫 번째 모임에 없었던 도마는 다른 여러 동료들의 증언조차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한 주님의 열심은 특심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다시 찾아오신 주님은 도마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요 20: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성도 여러분!  우리는 현대판 도마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자(아피스토스)가 되지 말고 믿는 자(피스토스)가 되라”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대화하는 이란성 쌍둥이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여동생이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난 말이지, 태어난 후에도 삶이 있다고 믿어.”
  오빠는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아. 여기가 전부라니까.”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여동생이 말했습니다. “말해줄 게 또 있어. 오빠는 안 믿겠지만 말이야. 난 엄마가 있다고 생각해.”
  쌍둥이 오빠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엄마라구?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난 엄마를 한번도 본 적이 없어.”
  오빠의 기세에 눌린 동생은 마침내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가끔 무언가 꽉 조여오는 것 같지 않아?  아주 기분이 나쁘고 어떤 때는 아프기도 해.”
  “나도 그래. 그런데 그게 어때서? ”
  “음, 내 생각엔 이 꽉 조여오는 게 다른 곳, 그러니까 여기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엄마 얼굴을 보게 될 곳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표시인 것 같아. 오빠는 흥분되지 않아?”
  바보 같은 소리에 질려버린 오빠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왜 사람들이 부활 사실을 믿지 못합니까?  그것은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비에 속한 문제를 과학으로 풀 수 없습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은 과학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나 권능을 초월한 문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소원은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것’ -- 바로 이것입니다.  


2. 제자들이 성령 받기를 원하심
  주님은 실의에 빠진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서 능력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22절,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성령’(프뉴마 하기온)에 관사가 없는 것은 성령의 인격적 측면보다 성령의 은사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있어서 필요한 능력을 받는 부분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받으라’(라베테)는 말은 요한복음의 다른 두 곳(18:31, 19:6)에서 모두 ‘십자가에 못 박도록 예수를 데려가라’는 문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과 로마 군병에게 넘겨짐(라베테)은 성령님을 제자들에게 넘기기(라베테)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소원은 우리 모두 성령 받아 능력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자세를 보십시오. 그는 성령에 충만한 제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은바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한 사람이었습니다.
  빌 3:10-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 성령의 능력에 붙잡힌 자는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성도는 신앙생활 때문에 오는 어떤 환란이라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을 향하여 오늘도 내일도 달려갈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는 영생의 확신으로 가득차 있고, 장차 받을 상급에 대한 분명한 소망으로 가슴 부풀어 있는 행복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에게 성령을 파송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능력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3.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 되기를 원하심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이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하십니다.

  21절 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부활의 소식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 두 ‘보내심’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보내신 보내심에는 '아포스텔로'(apostello), 곧 권위를 부여받고 보내심 받은 것인 반면,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보내심에는 ‘펨포’(pempo), 곧 권위 하에서 보내심 받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경우에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 표현하셨습니다(3:17; 5:36; 6:29; 8:42; 10;36; 11:42; 17:3).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라는 강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이 의미한 바는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의식이 투철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3:1에서는 예수님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아포스톨로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명의식은 다시 제자들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보냄 받은 자’라는 이 투철한 사명 의식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헌신하는 자로 변모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부활의 복음을 증거하기를 간절히 소원하고 계십니다.
  막 16:15,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성도 개개인이,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 전체가 반드시 지켜야 되는 중대한 사명입니다. 또한 이런 사명 위임은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우리 성도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권위로 세상으로 파송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전할 복음은 오직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입니다.

  고전 15:3-4,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  

  이 시대는 부활이 없는 복음을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전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19세기 구세군 창시자 윌리암 부스가 일찍이 예견한 대로입니다.
  “장차올 세기를 맞이할 가장 큰 위험은 종교는 있으나 성령이 없고, 기독교는 있으나 그리스도는 없고, 속죄는 전파되나 중생의 사실이 무시되며, 도덕은 있으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고, 천당은 말하나 지옥은 말하지 않는 시대적 흐름일 것이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 참으로 큽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으로 파송되어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전도자의 웅변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웅변에 있다면 전도는 사람이 믿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복음의 능력은 설교자의 학식에 달려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전도는 인간의 지혜로 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혀가 녹이 슬 때까지 전하고 허파가 다 소모되어 죽을 때까지 증거 한다 할지라도 성령의 능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여 영혼을 변화시키지 않는다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전도할 때 필수적인 두 가지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복음, 또 하나는 성령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두 가지를 세상 사람들은 제일 우습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간절한 기대는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의 증인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습니다.
  주님은 33년의 삶을 고난과 고통 가운데 사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마침내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셔서 하늘 보좌에 앉으셨고, 지금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파송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또한 주님의 부활이 장차 우리 부활의 증거가 됨을 확신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보내시는 성령을 충만히 받아 능력 있는 성도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보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도 동서 사방에 흩어져서 복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마 8:11). 우리가 복음 전도를 서둘러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때가 늦기 전에 서둘러 거두어 들여야 합니다.

  이 믿음 없는 불신의 시대에 부활의 주님을 믿고 전합시다. 부활의 능력으로 무장합시다.
  주님은 가슴 뜨거운 부활의 증인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는 용광로처럼 주변의 오이코스들의 차가운 마음을 녹여내는 주님의 군사가 되어져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소원에 부응하는, 그리하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주님의 제자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박순오목사 설교자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