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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운성목사 (영도중앙교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소생할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수척한 채로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살아온 긴 세월, 무려 147년이라는 긴 시간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연들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 노인은 다름 아닌 야곱입니다.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란 말은 우리의 감정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을 맞는 사람의 마음은 여느 때와는 다릅니다. 야곱이 한 평생 전체를 회상하듯이, 이 시간 우리도 2002년 한 해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많은 사연을 안고 산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창세기 27장부터 시작하여 창세기 맨 마지막장인 50장까지 계속됩니다. 성경에서 이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묘사한 인물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말할 거리도 많고, 쓸거리도 많았습니다.
그는 집념이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이 아니라 아우라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쌍둥이라면 실제로는 똑 같은 것인데도, 태어난 그 잠간의 순서 때문에 평생 동생이 된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당시 법대로 하면 형은 가문의 이름과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습니다. 동생 몫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억울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는 형의 몫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사냥하고 돌아와 몹시 피곤하고 배고픈 형 에서와 흥정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맏아들의 명분을 샀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내 주면서 "오늘부터 내가 형!"이라고 말하는 야곱이나, 팥죽을 받아먹으면서 "오늘부터 네가 형 노릇해라"하고 장자의 자리를 가볍게 생각한 에서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은 야곱이 얼마나 집념이 강한가를 보여줍니다. 또 그가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을 보세요.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공모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던 리브가의 역할이 커 보이지만, 야곱의 욕심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형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 때 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얻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무려 7년 동안을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던졌습니다. 이십 년이 흘렀을 때, 그는 네 명의 아내와 열 한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가족뿐입니까? 그는 외삼촌의 집에서 재산에도 욕심을 냈습니다. 외삼촌의 짐승들을 관리하면서, 점박이와 어룽진 것은 자기 몫으로 하기로 외삼촌과 약속했습니다. 그는 건강하고 실한 것들을 자기 것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튼튼한 녀석들이 태어나면 모두 점박이들이었습니다. 그의 양들은 모두 튼튼했습니다. 여러 노력들을 통해서 그는 많은 재산도 모았습니다. 홀 몸, 무일푼으로 외삼촌의 집에 간 지 이십 년 만에 그는 대단한 것을 얻었습니다.
본문은 병들어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아들 요셉이 문병하러 온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것들에 관해서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3절 이하를 보세요.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생육, 번성, 많은 백성 등의 표현은 얻는 차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것들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얻었지." 실제로 야곱은 많이 얻었습니다.
여러분, 2002년도에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일터를 얻으셨습니까? 승진하셨습니까? 새로운 지위를 얻으셨습니까? 많은 경제적 소득을 얻으셨습니까? 결혼했습니까? 자녀를 낳으셨습니까? 새 집을 사셨습니까? 자격증을 얻었나요? 뭘 얻으셨습니까?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사람들은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얻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얻는 것"의 뒷면에 어떤 고통이 따르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는 "얻기 위한 삶"이 우리 인생 전체를 망치기도 합니다.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주위를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신문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성탄절에 모 대학의 교수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1988년부터 14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무려 487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소위 논문왕이라고 불렸습니다. 일 년에 평균 35편 정도의 논문을 썼고, 거의 열흘에 한 편씩 논문을 발표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분은 저서도 무려 24권이나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우 나이 사십 대 중반에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얻는 삶도 피곤하고 힘든 삶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얻기 위한 노력이 결국은 과로가 되고, 몸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얻어서 행복하셨습니까? 물론 저는 우리 모두가 많이 얻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차원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얻으면 행복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혹시 앞으로 살다가 얻기는커녕 있던 것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는 우리에게 불행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얻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사는 인생은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세계적 부자였던 "록펠러"는 겨우 33세에 100만 불의 순익을 얻는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3세에는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회사를 소유했습니다. 53세에는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호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로피셔"라는 병을 앓았는데, 눈썹과 머리칼이 빠지고 초췌하게 말라 가는 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로 "1년을 살기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당시 사업은 너무 잘돼서 하루에 100만 불을 벌었지만, 그는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괴로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순간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허무했습니다. 밤새 괴로워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습니다.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내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는 침대 곁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로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은 록펠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형식적 신앙생활을 청산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난 후 교회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 교회가 뉴욕에 있는 유명한 "리버사이드 처어치"입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업을 위해서 자기 모든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을 내린 직후 이상하게도 그는 잘 먹기 시작했고 잠도 잘 자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가 거의 55세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는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얻는 것에 너무 목표를 두지 마세요. 그것이 인생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었던 것들이 그의 인생에 별 행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너무도 쉽게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인생은 얻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습니다. 획득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상실의 슬픔도 있습니다. 야곱도 많이 상실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모은 물질은 그에게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주고, 사위로 삼아준 외삼촌과의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또 그는 그 많은 소떼, 양떼를 위하여 세겜성에 땅을 사고 정착했는데, 그로 인해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에게 몇 마리의 양만 있었다면 세겜성에 눌러앉아 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이 없어서 고통인 사람도 있지만, 물질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그는 라헬을 목숨처럼 사랑했습니다만, 외삼촌의 집을 떠나 세겜을 거쳐 벧엘에 이른 후에 라헬이 죽고 말았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는 도중, 난산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사랑한 사람이 가장 먼저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본문 7절에서 야곱은 라헬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내가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사랑한 것일수록 먼저 잃게 되는 일이 인생에 얼마나 많습니까?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렇습니다. 그는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를 잃었습니다.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그렇게 사랑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일찍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명예와 돈도 다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후에 비로소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 어거스틴으로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잃은 것은 아내만이 아닙니다. 그는 라헬이 남긴 아들을 아내 대신 요셉을 사랑하고 끔찍이 위했습니다. 그는 라헬의 첫 아들인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히면서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17살 된 요셉을 잃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지만,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가 아들을 잃은 후 얼마나 깊이 슬퍼했는지,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얻는 기쁨에 뒤이어 바로 상실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여러분은 2002년 한 해 동안 어떤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2002년도를 지나는 동안 우리 교회도 많은 분들을 잃었습니다. 한 해 동안 열 한 분의 교우들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교회 등록되어 나오시던 분들이고, 그 외에 교우들의 가족 친척까지 하면 더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치명적으로 건강을 잃은 분들이 있습니다. 재산의 손실을 본 분도 있습니다. 자녀의 마음을 잃은 분도 있습니다. 일터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집념을 가지고 매달렸던 어떤 일에서 실패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난 한 해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얻는 것은 성공이요, 잃는 것은 실패"라고 규정짓는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으니, 그의 인생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그의 일생을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격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시면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라고 하시면 실패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자신입니다. 야곱은 본인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였습니까? 본문 15절 중간부터 보면 야곱은 말하기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길러 주생애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건져주신 은총의 생애라고 평가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자신의 긴 생애를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 아름답고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잃어버린 줄로 알았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서 있습니다. 또 요셉의 두 아들,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앞에 있습니다. 요셉을 다시 만날 것, 손자까지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얻은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셉을 잃어버렸던 세월은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그 상실 때문에 총리가 된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집에 데리고 있었다면 평범한 목자가 된 게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니, 상실이 변하여 놀라운 복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길게 보아야 합니다. 얻었다고 금방 기뻐하고, 잃었다고 금방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지금 잃어서 아쉬운 것들이 많지만, 그것이 나중에 우리에게 어떤 복이 되어 돌아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도 야곱의 생애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2002년 한 해 동안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지만, 그리고 그 얻은 것의 덧셈과 잃은 것의 뺄셈을 할 수 있겠지만, 그 계산 결과에 상관없이 지금 느끼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질 않습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한 여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나는 장면마다 촬영을 했습니다. 어떤 바다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찍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저녁 어스름의 석양을 찍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사진들을 늘어놓고 보니, 어떤 사진이 일출 사진인지, 어떤 사진이 일몰 사진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바다 위에 태양이 걸쳐 있는 모습이 비슷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태양이 지는 저녁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시작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끝내는 마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임종의 순간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한 해의 마무리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 주일이 신년 첫 주일 이상으로 기쁘고 감사하고 아름다운 주일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행복과 감사로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야곱의 147년 간의 긴 생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 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젊어서 성취의 기쁨을 노래했을 때보다도, 많이 얻어서 기뻐 부르던 노래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하는 감사의 노래야말로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2002년도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우리가 "마지막에 부를 노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장 밖으로 나올 때 경기에 이겼어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그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경기를 패하고 나올 때라도 그 경기에 출전했음을 기뻐하면서 함박 웃음으로 퇴장할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 이미 얻은 것과 잃은 것의 덧셈과 뺄셈은 끝난 지 오래입니다. 이미 그 계산은 의미가 없습니다. 얻은 게 더 많으면 어떻고, 잃은 게 더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뭐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끝내는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많이 얻었어도 복된 게 아닙니다. 잃은 게 많았어도 끝내는 그 순간 행복하다면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면 오직 일평생 함께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환하게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그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내다보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열 여섯 살 소녀처럼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함께 부를 마지막 노래입니다. 우리 생애 마지막에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더 이상 소생할 가능성이 없어 보일 정도로 수척한 채로 침상에 누워 있습니다. 그는 살아온 긴 세월, 무려 147년이라는 긴 시간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연들과 사건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갑니다. 이 노인은 다름 아닌 야곱입니다. 야곱은 임종을 앞두고, 지난 세월을 반추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란 말은 우리의 감정을 풍부하게 만듭니다. 마지막을 맞는 사람의 마음은 여느 때와는 다릅니다. 야곱이 한 평생 전체를 회상하듯이, 이 시간 우리도 2002년 한 해를 돌아보길 원합니다.
야곱은 누구보다 많은 사연을 안고 산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창세기 27장부터 시작하여 창세기 맨 마지막장인 50장까지 계속됩니다. 성경에서 이토록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묘사한 인물도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말할 거리도 많고, 쓸거리도 많았습니다.
그는 집념이 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형이 아니라 아우라는 것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쌍둥이라면 실제로는 똑 같은 것인데도, 태어난 그 잠간의 순서 때문에 평생 동생이 된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당시 법대로 하면 형은 가문의 이름과 재산 대부분을 물려받습니다. 동생 몫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야곱이 억울한 생각을 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그는 형의 몫에 눈독을 들였습니다. 결국 어느 날 그는 사냥하고 돌아와 몹시 피곤하고 배고픈 형 에서와 흥정하여 팥죽 한 그릇으로 맏아들의 명분을 샀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내 주면서 "오늘부터 내가 형!"이라고 말하는 야곱이나, 팥죽을 받아먹으면서 "오늘부터 네가 형 노릇해라"하고 장자의 자리를 가볍게 생각한 에서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은 야곱이 얼마나 집념이 강한가를 보여줍니다. 또 그가 형의 축복을 가로채는 장면을 보세요. 어머니 리브가와 함께 공모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복을 가로챘습니다. 이 장면에서는 작은아들 야곱을 더 사랑했던 리브가의 역할이 커 보이지만, 야곱의 욕심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형을 피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살 때 그는 어떠했습니까? 그는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얻고야 마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는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라헬과 결혼하기 위하여 무려 7년 동안을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사랑을 위해 온 몸을 던졌습니다. 이십 년이 흘렀을 때, 그는 네 명의 아내와 열 한 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가족뿐입니까? 그는 외삼촌의 집에서 재산에도 욕심을 냈습니다. 외삼촌의 짐승들을 관리하면서, 점박이와 어룽진 것은 자기 몫으로 하기로 외삼촌과 약속했습니다. 그는 건강하고 실한 것들을 자기 것이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튼튼한 녀석들이 태어나면 모두 점박이들이었습니다. 그의 양들은 모두 튼튼했습니다. 여러 노력들을 통해서 그는 많은 재산도 모았습니다. 홀 몸, 무일푼으로 외삼촌의 집에 간 지 이십 년 만에 그는 대단한 것을 얻었습니다.
본문은 병들어 임종을 앞둔 아버지를 아들 요셉이 문병하러 온 장면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아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얻은 것들에 관해서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3절 이하를 보세요.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생육, 번성, 많은 백성 등의 표현은 얻는 차원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것들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얻었지." 실제로 야곱은 많이 얻었습니다.
여러분, 2002년도에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일터를 얻으셨습니까? 승진하셨습니까? 새로운 지위를 얻으셨습니까? 많은 경제적 소득을 얻으셨습니까? 결혼했습니까? 자녀를 낳으셨습니까? 새 집을 사셨습니까? 자격증을 얻었나요? 뭘 얻으셨습니까?
무엇인가를 얻는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사람들은 "얻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얻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얻는 것"의 뒷면에 어떤 고통이 따르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때로는 "얻기 위한 삶"이 우리 인생 전체를 망치기도 합니다. 얻기 위해서는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주위를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자신을 돌볼 겨를도 없습니다.
신문을 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성탄절에 모 대학의 교수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1988년부터 14년 동안 교수로 재직하면서 무려 487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소위 논문왕이라고 불렸습니다. 일 년에 평균 35편 정도의 논문을 썼고, 거의 열흘에 한 편씩 논문을 발표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분은 저서도 무려 24권이나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우 나이 사십 대 중반에 담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분은 짧은 기간 동안에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얻는 삶도 피곤하고 힘든 삶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얻기 위한 노력이 결국은 과로가 되고, 몸을 돌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얻어서 행복하셨습니까? 물론 저는 우리 모두가 많이 얻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은 새로운 차원을 보라고 말씀합니다. 과연 얻으면 행복할까요? 만약 그렇다면 혹시 앞으로 살다가 얻기는커녕 있던 것도 잃어버리게 되면 그 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는 우리에게 불행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얻는 것"에 목표를 두고 사는 인생은 대단히 문제가 많습니다.
세계적 부자였던 "록펠러"는 겨우 33세에 100만 불의 순익을 얻는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43세에는 미국에서 가장 커다란 회사를 소유했습니다. 53세에는 억만 장자가 되어 세계 최대의 부호라고 불렸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알로피셔"라는 병을 앓았는데, 눈썹과 머리칼이 빠지고 초췌하게 말라 가는 병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의사로 "1년을 살기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날 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당시 사업은 너무 잘돼서 하루에 100만 불을 벌었지만, 그는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괴로운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순간 그 많은 재산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너무도 허무했습니다. 밤새 괴로워하다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습니다. "돈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내게 모든 것이 되신다!" 그는 침대 곁에 주저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로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은 록펠러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형식적 신앙생활을 청산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지난 후 교회 하나를 지었습니다. 그 교회가 뉴욕에 있는 유명한 "리버사이드 처어치"입니다. 그는 "록펠러 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사업을 위해서 자기 모든 재산을 쏟아 부었습니다. 이러한 결단을 내린 직후 이상하게도 그는 잘 먹기 시작했고 잠도 잘 자게 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가 거의 55세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는 98세까지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얻는 것에 너무 목표를 두지 마세요. 그것이 인생을 지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얻었던 것들이 그의 인생에 별 행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너무도 쉽게 그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인생은 얻기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습니다. 획득의 기쁨이 있는가 하면, 상실의 슬픔도 있습니다. 야곱도 많이 상실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모은 물질은 그에게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물질 때문에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주고, 사위로 삼아준 외삼촌과의 인간관계가 파괴되었습니다. 또 그는 그 많은 소떼, 양떼를 위하여 세겜성에 땅을 사고 정착했는데, 그로 인해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겁탈을 당하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그에게 몇 마리의 양만 있었다면 세겜성에 눌러앉아 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물질이 없어서 고통인 사람도 있지만, 물질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 그는 라헬을 목숨처럼 사랑했습니다만, 외삼촌의 집을 떠나 세겜을 거쳐 벧엘에 이른 후에 라헬이 죽고 말았습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는 도중, 난산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장 사랑한 사람이 가장 먼저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본문 7절에서 야곱은 라헬을 잃은 슬픔을 이야기합니다.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내가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오히려 격한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하였느니라"
사랑한 것일수록 먼저 잃게 되는 일이 인생에 얼마나 많습니까? 유명한 어거스틴도 그렇습니다. 그는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를 잃었습니다.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그렇게 사랑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일찍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은 명예와 돈도 다 포기하게 하셨습니다. 어거스틴은 그가 사랑하던 모든 것을 다 잃게 된 후에 비로소 우리가 존경하는 인물 어거스틴으로 성숙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잃은 것은 아내만이 아닙니다. 그는 라헬이 남긴 아들을 아내 대신 요셉을 사랑하고 끔찍이 위했습니다. 그는 라헬의 첫 아들인 요셉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그에게만 채색옷을 지어 입히면서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겨우 17살 된 요셉을 잃었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갔지만, 야곱은 요셉이 짐승에게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가 아들을 잃은 후 얼마나 깊이 슬퍼했는지, 그 누구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입니다. 얻는 기쁨에 뒤이어 바로 상실의 고통이 따라옵니다. 여러분은 2002년 한 해 동안 어떤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셨습니까? 2002년도를 지나는 동안 우리 교회도 많은 분들을 잃었습니다. 한 해 동안 열 한 분의 교우들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이 분들은 우리 교회 등록되어 나오시던 분들이고, 그 외에 교우들의 가족 친척까지 하면 더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가 상실한 것은 소중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치명적으로 건강을 잃은 분들이 있습니다. 재산의 손실을 본 분도 있습니다. 자녀의 마음을 잃은 분도 있습니다. 일터를 잃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집념을 가지고 매달렸던 어떤 일에서 실패한 분들도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난 한 해의 삶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얻는 것은 성공이요, 잃는 것은 실패"라고 규정짓는다면, 야곱의 생애는 어떤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얻기도 하고, 잃기도 했으니, 그의 인생은 성공입니까? 실패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그의 일생을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격도 없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평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평가하시면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실패라고 하시면 실패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 평가할 수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자신입니다. 야곱은 본인의 생애를 어떻게 평가하였습니까? 본문 15절 중간부터 보면 야곱은 말하기를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서 길러 주생애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환난에서 건져주신 은총의 생애라고 평가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순간에 자신의 긴 생애를 하나님의 손안에서 이루어진 아름답고 성공적인 인생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잃어버린 줄로 알았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서 있습니다. 또 요셉의 두 아들, 손자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앞에 있습니다. 요셉을 다시 만날 것, 손자까지 만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얻은 것도 많았고, 잃은 것도 많았지만, 지금 이 순간 행복했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눈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셉을 잃어버렸던 세월은 견디기 힘든 세월이었지만, 그 상실 때문에 총리가 된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집에 데리고 있었다면 평범한 목자가 된 게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지나놓고 보니, 상실이 변하여 놀라운 복이 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길게 보아야 합니다. 얻었다고 금방 기뻐하고, 잃었다고 금방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고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입니다. 지금 잃어서 아쉬운 것들이 많지만, 그것이 나중에 우리에게 어떤 복이 되어 돌아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도 야곱의 생애를 실패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인정하신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렇게 함께 예배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2002년 한 해 동안 얻은 것도 있고, 잃은 것도 있지만, 그리고 그 얻은 것의 덧셈과 잃은 것의 뺄셈을 할 수 있겠지만, 그 계산 결과에 상관없이 지금 느끼는 것은 감사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질 않습니까?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지 않습니까?
한 여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서 만나는 장면마다 촬영을 했습니다. 어떤 바다에서는 떠오르는 태양을 찍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저녁 어스름의 석양을 찍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사진들을 늘어놓고 보니, 어떤 사진이 일출 사진인지, 어떤 사진이 일몰 사진인지 잘 알 수 없었습니다. 바다 위에 태양이 걸쳐 있는 모습이 비슷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태양이 지는 저녁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여러분, 시작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끝내는 마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임종의 순간조차도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한 해의 시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한 해의 마무리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오늘 마지막 주일이 신년 첫 주일 이상으로 기쁘고 감사하고 아름다운 주일이 되길 원합니다. 우리 마음이 행복과 감사로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야곱의 147년 간의 긴 생애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 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젊어서 성취의 기쁨을 노래했을 때보다도, 많이 얻어서 기뻐 부르던 노래보다도, 오늘 본문에서 일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고 고백하는 감사의 노래야말로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2002년도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 우리가 "마지막에 부를 노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운동 선수가 경기장 밖으로 나올 때 경기에 이겼어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그는 불행합니다. 그러나 경기를 패하고 나올 때라도 그 경기에 출전했음을 기뻐하면서 함박 웃음으로 퇴장할 수 있다면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노래를 부를 때, 이미 얻은 것과 잃은 것의 덧셈과 뺄셈은 끝난 지 오래입니다. 이미 그 계산은 의미가 없습니다. 얻은 게 더 많으면 어떻고, 잃은 게 더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래서 달라지는 게 뭐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끝내는 순간 행복하지 않다면 많이 얻었어도 복된 게 아닙니다. 잃은 게 많았어도 끝내는 그 순간 행복하다면 그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 순간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면 오직 일평생 함께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환하게 웃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년에도 그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을 내다보면서 기대감에 부풀어 열 여섯 살 소녀처럼 행복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함께 부를 마지막 노래입니다. 우리 생애 마지막에도 이 노래를 부를 수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