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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영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부천제일교회)
지금 몇시쯤 되었습니까? 하는 물음을 급박히 묻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5분 남았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급히 발길을 옮기지 않을 사람은 없 습니다. 목사에게 종말을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대답하시던 종말을 종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종말의 시각을 아는 지식, 이것은 동물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듯 합니다. 한국에 배가 닿았습니다. 배와 부두 사이에 널판지가 놓여집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릴 수 있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쥐들이 쪼르륵 내리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배를 타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항해도중 그 배는 침몰하니까요. 잡다한 지식은 많아도 인간 자아의 마지막 시각을 모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점점 감방안은 냉기가 돌고 다마스크스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난 이 후에 오직 복음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바울에게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거룩 한 주님의 사도로서 살던 사람이 차디찬 감옥에서 겉옷하나 준비없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달려 갈길을 다 달려 갔고 인생의 끝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의 서신에서 종말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삶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는 추상적이거나 초인간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사람과의 관계, 즉 사람과의 사랑입니다. 11절, 마가를 데리고 오 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일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마가가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중도에 포기를 하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차 전도 여행을 떠날때 다시 마가와 동행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 바울은 마가의 동행을 반대했습니다. 이 조치는 인간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효율적인 선교였습니다. 그래서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경륜은 현재도 미래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릇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8절에 보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지역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선교의 효율성을 위한 갈등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마가는 인척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일차여행 당시에 실수한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이차여행의 동반자로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차 당시의 실수는 다시 이차 당시에도 저질러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바울에게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마가를 동반자로 하여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전도를 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정책에 있어서의 장단점은 하나님만 평가하실 것 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바울의 마음에는 그 당시 바나바와 마가사이에 둘 다 화평하지 못했고 의견을 달리하여 불화했던 아픔과 선교를 위해서 꾸중했거나 함께 선교 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바나바와 마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이 바울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지난 날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마음에 평안을 찾으며 화해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진행되고 있는 현재, 그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현재에서는 각자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이나 간접 경험인 지식으로 판단하여 효율성의 극대화를 노리고 서로 언쟁과 토론과 의견을 달리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위한 의견차일 뿐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날을 이 가을에 회상해 보십시요. 가깝게는 지난 때를 멀게는 몇년, 몇십년을 뒤돌아 보며 마음에 상처로 남은 사람들에게 화해의 편지를 띄우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왜냐하면 가을은 사유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몇사람 있었습니다. 데마하는 사람입니다. 10절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많은 양의 비가 왔습니다. 봄부터 애써 가꾸어 놓은 벼들이 수해에 침수되고 꺽어져서 논바닥에 쓰러저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논이 홍수로 인하여 침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 심기를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 가꾸어 놓은 농산물이 유실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농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하는 하늘 농사꾼이였습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해 갔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자라서 충분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대가 되는 정도로 자랐습니다. 앞으로는 데마는 바울을 도와서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좋아서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만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사도처럼 일하던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열심히 양육해 놓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을때 나의 마음은 아프며 목회의 의욕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렸던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해 주었던가? 갑자기 떠나 버린 그 빈자리는 깊은 마음에 외로움과 함께 상처로 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세상으로 떠나버린 사람,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에 편지를 보냅시다. 한 통의 편지가 그 마음을 완전히 녹여 놓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과 관심을 보이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 보십시요. 나는 씨를 뿌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식은 나의 수고와 능력으로 만 거듭나고 성장이 이루어 질 수 없음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가을에 아파하는 것은 굳이 바울의 마음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의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다. 그런고로 이 가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십시요. 주님이 아파하십니다. 당신의 믿음 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사랑 이 담긴 편지를 씁시다. 장기 결석자와 나태한 현재 나에게 영적인 편지 한장을 보내서 신앙이 다시 자랄 수 있도록 이 가을에 편지를 보내시지 아니 하시겠습니까?
14절 말씀을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알렉산더가 교회 에 어떤 해를 끼쳤는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사람이 아닌가하는 추측과 아울러 재판당시 바울을 곤란하게 증언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이 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걱정하고 이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가 목 회를 하는데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경험했던 일상적 사실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진실로 사랑하는 후임자와 그리고 양육해 가야할 성도의 심령상태를 알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하여할 책무 입니다. 이를테면 온실에서 묘목을 키우던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한다고 합시다. 이 때는 이제까지 관찰한 기록을 그대로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관찰을 토대로 새롭게 양육해 갈 방법과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 이러한 관창기록의 인계임무는 오직 양육받아야 할 대상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왜 목회자가 자기의 잘못과 실수를 후임 목회자에게 말을 하여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명예를 실추 시키는가 하는 의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알렉산드의 잘못은 사실입니다. 바울을 법정에 세운다던지 혹시 증인으로 나아가서 불리한 증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로 볼 때는 교회를 뿌리채 흔드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곤경에 빠뜨리면 결국 교회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목회자를 위해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알렉산드의 잘못에 대한 보복을 하거나 목회중에 이에 대한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알렉산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행치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 가을에 편지를 보내십시요. 참목회자라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격이나 영성이 주님에게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목회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합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아파하 면 교역자의 마음도 아픕니다. 성도가 슬퍼하면 교역자도 슬퍼합니다. 성도가 어려움이 오면 차라리 내가 그런 일을 만났으면 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교역자의 심령과 인격이 완전하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도 우리의 성정과 같다라고 기록한 말씀은 오늘의 사역자의 영성이나 인격 때문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성정이 어떤자보다 유별나게 달라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종이 쓰임을 받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의 성정에 관한 이해보다는 하나님이 그를 쓰신다고 하는 신뢰, 이것 으로 교역자를 존경하고 더불어 함께해야 여러분의 신앙과 영성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처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주로 교회의 봉사의 과정에서 견해가 달라서 적대적 관계로 발전해 가기 쉽습니다. 어찌되었건 주님의 사도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십시 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중보의 기도를 받는 은혜의 자리로 가십 시요.
16절에 바울의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 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성도가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앞 길 이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겠노라"
차라리 허물이 있다해도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생각하시고 지난 날에 사랑을 나누던 교사, 교역자, 구역장, 선교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이 가을에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여러분에게 축복기도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현존의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를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의 현존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의 이유와 동일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 이유, 주님이 나를 강건케 하신 이유, 주님이 나를 악에서 건지신 이유, 이 말씀을 다시 재이해하면 주님은 전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주님은 전도자를 강건케 하시 고 주님은 전도하는 사람을 환란과 어려움에서 건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8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하늘나라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이니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로마 당시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의 군대가 승리를 하고 개선했을 때는 항상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의 행군에는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패배의 자리인 전쟁에서 패배한 군인은 모두 전사자이거나 포로입니다. 그 곳에는 악취가 가득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란 승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승리란 한 사 람의 심령을 영적 전쟁터라고 보고 한 영혼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으면 영적 승리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21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 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겨울이 오면 바닷물이 얼어 버립니다. 그리고 항해 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서 디모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디모데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디모데, 그는 성공적인 주의 일꾼이었습니다. 인생에는 매사에 기회가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바람처럼 당도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나 속히 오라고 하는 부탁처럼 우리의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몇시쯤 되었습니까? 하는 물음을 급박히 묻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통행금지가 있었던 시절"5분 남았습니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급히 발길을 옮기지 않을 사람은 없 습니다. 목사에게 종말을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대답하시던 종말을 종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종말의 시각을 아는 지식, 이것은 동물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듯 합니다. 한국에 배가 닿았습니다. 배와 부두 사이에 널판지가 놓여집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릴 수 있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리기 전에 쥐들이 쪼르륵 내리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배를 타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항해도중 그 배는 침몰하니까요. 잡다한 지식은 많아도 인간 자아의 마지막 시각을 모르는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본문을 보면 점점 감방안은 냉기가 돌고 다마스크스로 가는 도중 주님을 만난 이 후에 오직 복음을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바울에게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거룩 한 주님의 사도로서 살던 사람이 차디찬 감옥에서 겉옷하나 준비없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그는 달려 갈길을 다 달려 갔고 인생의 끝을 감지하고 있습니다. 그의 종말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의 서신에서 종말이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곧 주님을 만날 날을 기다리는 삶은 무엇입니까?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는 추상적이거나 초인간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으로 준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인간적인 사람과의 관계, 즉 사람과의 사랑입니다. 11절, 마가를 데리고 오 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일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중도에서 마가가 질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중도에 포기를 하고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차 전도 여행을 떠날때 다시 마가와 동행하기를 바랬습니다. 이때 바울은 마가의 동행을 반대했습니다. 이 조치는 인간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효율적인 선교였습니다. 그래서 거절하게 되었습니다. 과거의 경륜은 현재도 미래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정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그릇칠 수 없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 38절에 보면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수리아지역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선교의 효율성을 위한 갈등이었습니다. 바나바와 마가는 인척관계에 있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일차여행 당시에 실수한 실수를 너그럽게 이해하고 이차여행의 동반자로 요청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차 당시의 실수는 다시 이차 당시에도 저질러 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어쩌면 그 당시에는 바울에게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생각해 보면 마가를 동반자로 하여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전도를 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 왔을런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선교정책에 있어서의 장단점은 하나님만 평가하실 것 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바울의 마음에는 그 당시 바나바와 마가사이에 둘 다 화평하지 못했고 의견을 달리하여 불화했던 아픔과 선교를 위해서 꾸중했거나 함께 선교 할 수 없는 이유를 밝히는 과정에서 바나바와 마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일들이 바울을 지금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가를 만나고 싶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지난 날의 아픔을 서로 위로하고 마음에 평안을 찾으며 화해하고 싶어하고 있습니다.
진행되고 있는 현재, 그것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 현재에서는 각자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이나 간접 경험인 지식으로 판단하여 효율성의 극대화를 노리고 서로 언쟁과 토론과 의견을 달리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을 위한 의견차일 뿐 상대를 미워하거나 무시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난 날을 이 가을에 회상해 보십시요. 가깝게는 지난 때를 멀게는 몇년, 몇십년을 뒤돌아 보며 마음에 상처로 남은 사람들에게 화해의 편지를 띄우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왜냐하면 가을은 사유의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몇사람 있었습니다. 데마하는 사람입니다. 10절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많은 양의 비가 왔습니다. 봄부터 애써 가꾸어 놓은 벼들이 수해에 침수되고 꺽어져서 논바닥에 쓰러저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예 논이 홍수로 인하여 침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 심기를 하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 가꾸어 놓은 농산물이 유실되거나 손상을 입으면 그 농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을 양육하는 하늘 농사꾼이였습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고 그리고 말씀으로 양육해 갔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자라서 충분히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기대가 되는 정도로 자랐습니다. 앞으로는 데마는 바울을 도와서 함께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세상이 좋아서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만 전파하며 하나님의 나라의 사도처럼 일하던 바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이러한 경우일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몇 년이고 몇 십년이고 열심히 양육해 놓은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교회를 나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을때 나의 마음은 아프며 목회의 의욕마저 상실하게 됩니다. 얼마나 정성을 드렸던가? 얼마나 열심히 사랑해 주었던가? 갑자기 떠나 버린 그 빈자리는 깊은 마음에 외로움과 함께 상처로 남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세상으로 떠나버린 사람, 이러한 사람이 있다면 이 가을에 편지를 보냅시다. 한 통의 편지가 그 마음을 완전히 녹여 놓는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시 관심을 기울이고 사랑과 관심을 보이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는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 보십시요. 나는 씨를 뿌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의식은 나의 수고와 능력으로 만 거듭나고 성장이 이루어 질 수 없음을 확증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가을에 아파하는 것은 굳이 바울의 마음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의 마음을 아프게 하십니다. 그런고로 이 가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십시요. 주님이 아파하십니다. 당신의 믿음 이 다시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사랑 이 담긴 편지를 씁시다. 장기 결석자와 나태한 현재 나에게 영적인 편지 한장을 보내서 신앙이 다시 자랄 수 있도록 이 가을에 편지를 보내시지 아니 하시겠습니까?
14절 말씀을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15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알렉산더가 교회 에 어떤 해를 끼쳤는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바울을 고소한 사람이 아닌가하는 추측과 아울러 재판당시 바울을 곤란하게 증언한 사람이 아닐까 추측이 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디모데를 걱정하고 이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가 목 회를 하는데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바울이 경험했던 일상적 사실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진실로 사랑하는 후임자와 그리고 양육해 가야할 성도의 심령상태를 알려 주는 것은 당연한 의무요 하여할 책무 입니다. 이를테면 온실에서 묘목을 키우던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이동을 한다고 합시다. 이 때는 이제까지 관찰한 기록을 그대로 넘겨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관찰을 토대로 새롭게 양육해 갈 방법과 대책을 세울 것입니다. 이러한 관창기록의 인계임무는 오직 양육받아야 할 대상자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왜 목회자가 자기의 잘못과 실수를 후임 목회자에게 말을 하여 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명예를 실추 시키는가 하는 의의를 제기하게 됩니다. 알렉산드의 잘못은 사실입니다. 바울을 법정에 세운다던지 혹시 증인으로 나아가서 불리한 증언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로 볼 때는 교회를 뿌리채 흔드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곤경에 빠뜨리면 결국 교회는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목회자를 위해 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결국 알렉산드의 잘못에 대한 보복을 하거나 목회중에 이에 대한 불이익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알렉산더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행치 않겠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중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까? 이 가을에 편지를 보내십시요. 참목회자라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인격이나 영성이 주님에게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오늘의 목회자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합니다. 대부분의 성도가 아파하 면 교역자의 마음도 아픕니다. 성도가 슬퍼하면 교역자도 슬퍼합니다. 성도가 어려움이 오면 차라리 내가 그런 일을 만났으면 하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교역자의 심령과 인격이 완전하게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도 우리의 성정과 같다라고 기록한 말씀은 오늘의 사역자의 영성이나 인격 때문에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의 성정이 어떤자보다 유별나게 달라서 큰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종이 쓰임을 받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종의 성정에 관한 이해보다는 하나님이 그를 쓰신다고 하는 신뢰, 이것 으로 교역자를 존경하고 더불어 함께해야 여러분의 신앙과 영성이 자라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처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주로 교회의 봉사의 과정에서 견해가 달라서 적대적 관계로 발전해 가기 쉽습니다. 어찌되었건 주님의 사도를 마음 아프게 한 것은 하나님의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한 통의 편지를 보내십시 요.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중보의 기도를 받는 은혜의 자리로 가십 시요.
16절에 바울의 마음이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내가 처음 변명 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성도가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성도가 형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의 앞 길 이 은혜가 넘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겠노라"
차라리 허물이 있다해도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진정 사랑하는 마음이 베어져 있습니다. 바울에게 편지를 보낸다고 생각하시고 지난 날에 사랑을 나누던 교사, 교역자, 구역장, 선교를 담당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이 가을에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여러분에게 축복기도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현존의 이유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7절,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를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바울의 현존의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현존의 이유와 동일하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 이유, 주님이 나를 강건케 하신 이유, 주님이 나를 악에서 건지신 이유, 이 말씀을 다시 재이해하면 주님은 전도하는 사람과 함께 하시고 주님은 전도자를 강건케 하시 고 주님은 전도하는 사람을 환란과 어려움에서 건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18절에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이유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은 주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을 시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면 하늘나라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2장 15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이니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로마 당시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로마의 군대가 승리를 하고 개선했을 때는 항상 향을 피웠습니다. 승리의 행군에는 향기가 진동합니다. 그러나 패배의 자리인 전쟁에서 패배한 군인은 모두 전사자이거나 포로입니다. 그 곳에는 악취가 가득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향기란 승리의 삶을 의미합니다. 승리란 한 사 람의 심령을 영적 전쟁터라고 보고 한 영혼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으면 영적 승리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21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 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겨울이 오면 바닷물이 얼어 버립니다. 그리고 항해 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서 디모데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보고 싶은 디모데를 학수고대 했습니다. 디모데, 그는 성공적인 주의 일꾼이었습니다. 인생에는 매사에 기회가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겨울은 바람처럼 당도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나 속히 오라고 하는 부탁처럼 우리의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주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