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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목사 (지구촌교회)
인류의 역사 속에는 매우 대조적인 삶을 살아가는 두 명의 사상가가 있습니다.
한사람은 가르친 대로 어느 정도 비슷하게 살았고, 한사람은 가르침과 정반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라는 사람입니다. 이 철학자는 오늘 우리가 정의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매우 자기 자신에게도 엄격한 도덕을 스스로 에게도 요구하였던 일종의 모랄리스트(moralist), 일종의 도덕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임마누엘 칸트에게 와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의 삶에서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그는 솔직히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도덕을 가르치고 도덕철학을 강론하지만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로 살고 싶은 유혹이 내 속에 있다고...".
그러면서 계속 말하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인생의 마당은 내가 가르친 바를 실행하기 위한 학교 교실과도 같다.". 시간이 지나가고 세월이 지나갔지만, 시공을 초월해서 지금도 이 철학자가 지금도 우리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가 가르치는 바를 실행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 속에 있습니다.
또 한 사람 이 사람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인 영향을 끼친 사상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칼 막스(Karl Marx)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철학의 핵심은 소위 노동자 계층에 대한 애정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칼 막스의 전기를 기록한 폴 잔슨(Pole Johnson)이라는 사람의 전기를 읽어보면 그는 언제나 매우 역설적으로 노동자보다는 중산층 지식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고, 사실은 노동자를 무시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서 단 한명의 진실한 노동자 친구를 갖지 못했던 사람이요, 가족이나 측근들과 언제나 다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사실상의 목표는 그가 부르조아가 되는 것이었고, 그의 인생살이 마지막 십년간은 두 명의 하녀를 데리고 사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고 말할 정도의 매우 가르침과 모순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것이 공산주의의 비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비슷한 유형의 비극이 그리스도인인 여러분과 저의 삶 속에도 일어나고 있다, 혹은 일어 날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저는 이것을 그리스도인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조금 교회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어느 정도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우리가 알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라고 착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과 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에는 얼만큼의 일치가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던지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님이 어떤 율법사와 영생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그러다가 율법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율법의 가장 커다란 계명이 무엇이냐고 주님이 율법사에게 물었습니다.
율법사는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는 이미 대답을 알고 질문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옳다. 네 대답이 정답이다. 그대로 행하라."
그러나 이 사람은 어떤 교훈을 받기 위해서 말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논쟁을 하기 위해서 말을 시작했기 때문에 계속 말꼬리를 붙들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내 이웃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이웃사랑의 한 전거와 케이스로, 이웃 사랑의 진정한 한 의미와 행동의 케이스를 입증하시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신 유명한 비유가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비유 속에 나타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참된 사랑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첫째로, 사랑은 자신을 열 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을 여는 것, 자신을 오픈(open)하는 것, 자신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여러분과 저에게 왜 사랑의 행동이 어려울까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가 자신을 닫아 버리고 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닫아 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웃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요. 이웃들의 신음소리가 들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세계 안에만 갇혀 살기 때문입니다. 한 정신과 의사는 그의 에세이를 통해서 현대인들의 절반 이상은 아마도 자폐증의 경향을 갖고 있다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실제로 자폐증 환자는 아니지만, 자폐증의 경향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현대인들을 진단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처절하리 만큼 자기중심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히 입증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가리켜서 미 제너레이션(me generation)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좀 시간이 지나갔지만 지나간 유머 가운데 "엄마나 맞아"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엄마 나 맞아'', ''''아 맞지'', '''' 그런데 왜 사람들이 나보고 너래''
철저하게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중심주의의 세대를 풍자한 이야기 일 것입니다.
확실히 현대인들에게는 어떤 자폐증의 경향이 있습니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자폐증은 외부와의 모든 접촉을 끊어버리고, 자기만의 세계 속에 파묻혀 자기만 생각하고 주위에 대해서 어떤 관심도 나타내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으며, 타인과의 대화의 능력을 상실한 채 혼자만의 세계 속에 몰입하고 있는 병, 소위 오티즘(autism)이라는 의학적인 표현을 갖습니다. 그런데 이런 자폐증환자에게도 한 가지는 뛰어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사람은 환자입니다.
얼마 전에 한참 많은 사람이 보았던 ''레인맨(The Rain Man)'' 이라는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연기는 이 병에 대한 왜곡되고 과장된 연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폐증환자의 내면세계를 보여 주는 일에는 충분히 성공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 자폐증 환자의 최고의 문제, 제일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의 교류의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스토리 속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인의 모습이 어쩌면 이 자폐증환자의 성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 여기 강도 만나서 여리고 길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던 이 사람의 곁을 그대로 지나 친 레위인과 제사장, 그들은 보고도 못 본 사람이고, 그 신음소리를 들어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갑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보지 않기를 원했고 듣지 않기를 원했을지 모릅니다. 여기 어떤 도피증, 혹은 자폐의 성향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좀 눈이 마주 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들의 소리가 들려 와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의 감정이 느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를 열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자신을 공개하는 것,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여는 것, 그것이 사실은 치유의 시작이고 사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여는 만큼만 건강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존경을 받고, 어떤 특권을 누리면서 살지만, 그러나 사랑을 배우는 일에는 실패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바로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처럼, 레위인처럼 그들은 사회의 중산층, 지도계급,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고 존경을 받는 입장에 있었지만, 자기 자신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 사랑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이 과거에 다시 이 땅에 돌아왔을 때, 아마 일본 식민지 시대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아무도 믿지 못하고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한 왜곡된 모습을 이 땅의 민중들이 갖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 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소위 애국 계몽, 강연을 다니면서 한 가지를 줄기차게 외치고 다녔습니다.
"삼천만 동포 여러분 우리가 공부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을 공부하십시다. 둘째, 사랑을 공부하십시다. 셋째, 사랑을 공부하십시다." 그는 사랑 공부하기를 외치고 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의 스토리 속에 나타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 사람은 사회적으로는 열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마리아 지방아래 유대 지방에 살던 사람들은 몹시도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들이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피가 혼혈되었다는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비유 속에 이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을 돌볼 수가 있었다고, 사랑할 수가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입니까?
사회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평가하지 못했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존귀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사랑을 배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자, 이 사람의 사랑의 실천의 모습을 본문 속에서 주목해 보십시오.
33절에 "어떤 사마리아 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자, 우선 "그를 보고"라고 쓰여 있습니다.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있었습니다.
"불쌍히 여겨" 즉, 그의 가슴이 열려 있었던 모습을 오늘 여기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34절에 "가까이 가서"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발은 묶여 있지 않았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 마땅히 사랑해야할 사람을 향해서 달려 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붇고 손으로 싸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손은 묶여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은 자기만을 가꾸기에 바쁜 손길이 아니었습니다. 열려있는 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의 호주머니도 물론 열려 있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정말 사랑하기를 원하시나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먼저 자기 존재를 개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손을 열줄 알아야 합니다. 가슴을 열 줄 알아야 합니다. 문을 열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여는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자신을 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은 무엇입니까?
둘째로, 한걸음 더나가서 사랑은 필요를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우리가 스스로를 열고 이웃들에 다가서서 사랑을 실천하기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한마디로 정답을 말하면 그것은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 하겠습니다. 상대방의 필요를 채우는 것. 나의 필요가 아닌, 사랑해 줄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가 이웃들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랑의 액션(action)을 취하지만, 사랑하다가 내 사랑의 의도가 상대방에게 전달되지 못한 채 오해와 상처를 유발시키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사랑하려는 마음은 있었지만, 사랑하는 방식을 몰라서 그래요. 내 방법으로 사랑한 거지요. 우리는 상대방의 처지에서 그를 섬기는 일을, 그를 돕는 일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내 방법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사랑하기를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사랑의 액션(action)을 취하기 전에 잠시 행동을 중단하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어떻게 도와드리면 좋겠습니까?"라고...
이것이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마리아 사람은 이렇게 사랑을 표현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34절을 다시 보시면 "가까이 가서"로 시작됩니다.
자, 오라고 그러지 않았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나에게로 오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상처를 싸매기 시작합니다.
자, 말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잘 들어 보세요. 전도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상처를 싸매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사랑이 교감되지 않은 사람에게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먼저 그의 필요, 그의 상처를 싸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사랑의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보세요.
예수님이 지나가면서 접했던 수많은 민중들, 수많은 무리들, 그 많은 무리들을 보시고 예수님은 먼저 설교부터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먼저 그들을 고쳐주시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고치는 일을 먼저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좀더 여유 있는 공간 속에 주님은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그들과 나누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가 전도한다고 하지만 한국 교회가 우리 시대 속에, 사회 속에 전도의 능력을 상실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전도에 아무도 감사하고 있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불신자들의 불평을 들어보세요. 그것은 우리들의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 좀체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 전에 우리 교회에서 제직들을 대상으로 소위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자연적 교회성장, 즉 건강한 교회 성장을 위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 때 건강한 교회성장에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필요를 공급할 줄 아는 전도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랑에 응답하는, 그들의 사랑의 필요 앞에 응답하는, 사랑에 응답하는 전도가 우리시대의 새로운 전도 방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대방의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 상대방이 편안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울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읽었지만, 제가 최근에 그 책을 다시 읽으면서 얼마나 도전이 되는지 모릅니다.
핸리 나우엔이 쓴 『컴패션(The Compassion)』이라는 책으로 "사랑"이라는 책입니다. 그 중에 보면 바보들의 마을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보들의 마을.
어떤 사람이 여행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바보들의 마을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마을에 들어가 보니까, 밀농사를 짓는데, 사람들이 밀밭에 못 들어가고 있었답니다. 그러니까 농사를 지을 수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왜 못 들어가는지 물어보니까 밀밭에 괴물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밀밭에 들어가 보니까 밀밭에 큰 멜론, 참외들이 있었어요. 그거 가지고 괴물이라고 못 들어가는 거였지요. 자, 그 마을이 무슨 마을이라구요? 바보들의 마을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기가 막혀서 ''아, 날 따라오시오.'' 그리고는 칼을 들고, 밀밭에 들어가서 그 괴물인 참외를 칼로 여지없이 찍었습니다. 그리고 높이 찍어 가지고 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보라구, 이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런데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다 도망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 괴물을 무자비하게 찍은 저 사람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찍을 거라고'' 그러면서 다 도망 가버리고 만 겁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사람이 길을 잃어서 바보들의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똑같은 현상을 봤어요. 참외를 괴물이라고 생각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 참외인걸 알았지만, 그는 그들과 같이 놀랬습니다. 그들의 두려움을 자기의 두려움처럼 생각하고 그들과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참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시간을 두고 그들을 설득해서 그것이 괴물이 아니고 참외라는 것이 충분히 전달된 다음에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 밭에 들어가서 괴물인 참외를 마을 사람들 스스로 제거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사람들의 자리에 내려가서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섬길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찾아내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 강도 만난 자, 그를 돕고 있었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을 말한 후에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율법사에게 던지십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대답하기를 자비(mercy, compassion)를 베푼 사람입니다. 바로 이렇게 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이웃들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나가서, 사랑은 책임을 질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사회로부터 매우 냉소적 반응을 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숫자가 늘지만 그 숫자의 늘음이 사회 속에 감동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최근에는 교회의 숫자 자체도 증가하지 못하는, 정체상태에 들어갔다는, 그리고 심지어 교인 숫자의 감소의 위기까지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우리들의 사랑의 실천의 미흡이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 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한국 교회가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오니까 어떤 지도자 한 분이 몹시도 반론을 제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통계숫자까지 제시하면서 한국교회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건 왜곡된 것이라고. 그러면서, 그 분은 사실 정부가 도와준 것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진행되고 있는 많은 자선 사업 구호 사업, 그리고 북한 돕기, 이런 사역을 냉정하게 계산해보면 거의 70%는 기독교에 의해서, 또 거의 개신교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다고 변호하시는 광경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느낌을 가졌어요. 저분의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들의 사랑은 이 사회 속에 평가되지 못하고 전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의 사랑의 방식이 잘못된 때문은 아닐까? 행여나 우리들의 사랑의 실천은 일회용 선전 정도에 그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이런 반문이 제 마음 속에 있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은 결코 일회용 자선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강도 만나 쓰러진 이 사람에게 달려갔습니다. 상처를 싸매주었습니다. 응급처치를 한 것이죠. 그러나 그의 자선행위는 일회용 응급처치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주목해 봐야 합니다.
다시 한번 34절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의 34절을 보시면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붙고, 싸매고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또 이튿날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면서 주막주인에게 가로되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숙박비가 더 들면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사랑은 책임 질줄 아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거기까지 나가고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지는 맙시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해서 이 세상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일생을 우리가 다 책임져야 한다고 지금 제가 소리 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이 비유를 말씀하신 주님의 더 중요한 의도는 인생의 길을 가다가, 내 여리고 길을 가다가, 나의 길을 가다가 내 발부리에 채여 내 도움을 바라고 있는 그 사람만이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이 처지, 이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그 사랑 앞에 응답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입니다.
한 삼 개월 전에 로마서 12장을 큐티를 하다가 거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더군요,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또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에게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
믿음의 분수, 믿음의 불량, 전에는 지나갔던 그 단어가 저에게 몹시 들어왔어요.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는 제 목회사역에 많은 부분을 반성했습니다. 가끔씩 헌신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보면, 이 목사가 열이 나거든요. 그래서 설교하다가 소리치고 말이죠. 저도 별로 헌신하지 못하면서 말이죠. 그런 저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사람들에게 믿음의 분량이 다른데, 아직 성숙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나친 것을 요구하고 강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산상수훈에 보시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 너희보고 오리를 가고자 하거든 십리도 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십리까지 갈 수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믿음의 분량 때문에 거기까지 지금 갈 수가 없단 말이죠. 어떤 사람은 5리를 가고자 하는데 "현재 내 믿음의 분량대로라면 1리나 2리 정도밖에 못가요"라고 말한다하더라도, 우리가 그 사람을 비난 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2리까지 가던 내가 이웃과 3리를 동행할 수 있다면, 그리고 내일은 믿음의 분량이 증가하면서 4리를 갈 수 있고, 5리를 갈 수 있다면,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우리가 십리까지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분량을 주목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다만, 우리가 믿음의 분량만큼이라도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분량만큼이라도 이웃에게 최선을 다해 전도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결코 일회용, 선전용 사랑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속적인 사랑이어야 하고, 작은 사랑의 연습이라 할지라도 계속되는 사랑, 그래서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되는, 그 사랑이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이 될 수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쓸수록 풍성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업하시는 한 분이 조금 여유가 생겨서 산골에 별장을 짓기 시작했어요. 우물을 파야 할 텐데, 어디서 물이 나오는지 몰라서 시골에 보면 지관이라고 하나요, 땅을 잘 보는 어떤 노인 분에게 부탁해서 우물을 어딜 파야하는지 물어서 딱 지정을 했는데 그것이 맞았답니다. 파보니까 우물에 물이 막 솟아요. 그래서 거기에 펌프를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노인이 그 분에게 부탁을 하기를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펌프질을 하셔야 합니다."그런데 사나흘 펌프질을 하다보니까 물이 너무 많이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이만하면 족하겠구나 생각하고 스톱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재정 여유가 넉넉하지 못해서 공사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한 육 개월쯤 있다가 다시 건축 공사를 마무리짓기 위해서 공사를 하다보니까, 그 우물을 펌프질을 하다보니까 물이 나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노인에게 가서 물으니까 노인이 하는 말이 "내가 매일 조금씩이라도 펌프질을 하라고 했는데 그대로 했습니까!" 그 사업가가 대답하기를 "사나흘 하니까 물이 너무 많이 나와서 제가 그만두었는데요", "에이 그래서 그렇지!"
"지하의 수맥이라는 것은 고무 튜브와 같아서 펌프질을 해주면 계속해서 그 수맥의 강은 넓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펌프질은 안 하면 다시 줄어들고 맙니다."
저는 우리들의 사랑이 그렇지 않나 생각 되요. 사랑은 연습할수록, 조금씩 실천할수록 사랑의 강은 더욱더 넓어 질 수 있는 거예요.
미국 체인스토어 가운데 ''세븐 일레븐''의 스토리 가운데 어떤 스토리를 읽다가 무척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 몬타나주의 세븐 일레븐 회사에서 서비스를 감독하는 감독관이 나와서 그 가게를 돌아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겨울이었습니다. 추운 겨울 막 눈 바람이 날리는데, 이런 날은 손님이 별로 없겠지! 가보니까 가게들에 손님이 없어요. 그런데 아주 산마루에 접해 있는 세븐 일레븐 체인점에 의외로 손님이 많아요. 그래서 관찰을 해보니까 거기 로베르트라는 명찰을 하고 판매대에 앉아서 돈을 받는 자매가 너무 친절하게고 상냥하게 사람들을 맞아 주는 거예요. "그렇지 서비스가 중요하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몇 사람들이 왔다가 나간 후에 노인 하나가 들어옵니다. 초라해 보이는 노인이었는데 그 세븐 스토어 매장을 빙빙 돌더니 바나나 하나 사는 거예요. 그리고 그 노인은 사람들이 다 나가기를 기다려서 판매대에 와서는 바나나를 올려놓으니까, 직원이 이름을 기억하고 그 이름을 부르면서 여러 가지 개인 생활을 물어보고, 그리고 바나나 하나를 잘 포장 해주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밖에까지 나와서는 그를 끌어안아 주면서 힘내서 사시라고 그러면서 옷도 잘 만져주고 씩 웃으면서 내일 또 오라고, 내일 또 오겠다고.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감독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유명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맞아, 저 노인은 바나나를 사러 온 것이 아니야. 저 노인은 사랑을 사러 온 것이지"
그래서 이 말이 세븐 일레븐의 매니저를 교육시키는데 유명한 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물건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물건을 파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렇게 오늘의 메시지를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전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사랑에 목마른 이웃들이 너무도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사랑을 사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다 일어나서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잠시 조용히 기도하시면서 여러분 잠시 돌아보시면, 눈을 떠서 돌아보시면 우리주변에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한 사람이였지만, 주님 앞에 나와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경험 할 수 있었다면 이제 내 사랑의 샘이 메마르지 않도록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십시오 사랑을 나누는 곳에 함께 하시는 주님! 하나님 이사랑 나누며 남은 인생 살아가게 도와주세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사람에 손을 잡을 수 있는 그들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내 가슴, 내 손길이 내 발걸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따라 우리가 어떻게 남을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사랑에 목말라 하는 이웃들 이 사랑의 기다림을 안고 주목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 주님!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십자가에서 증명하신 그 사랑을 안고 다가서는 우리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찬양합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우리의 수많은 이웃들. 나도 한땐 사랑에 목말라 사막을 헤매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 만나서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내 안에 솟아나는 사랑의 힘을 나는 이제 이 사랑의 샘물을 이웃과 나눌 책임 있는 자임을 깨닫습니다. 아직도 우리 곁에 목말라 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다가가 하나님 그들의 여기고 고통스러운 저미는 손길을 잡아 줄 수 있는 그들의 상처를 싸맬 수 있는 그리고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증거 할 수 있는 우리들의 손, 우리들의 발걸음, 우리들의 가슴, 우리들의 영혼, 사랑하는 영혼 되게 해 주십시오. 이 가을 이 사랑을 전하기 위해서 다시 나아가는 당신의 백성들의 발걸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의 사랑의 교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